#41. '안도현'님의 시를 통한 위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ㅡ [너에게 묻는다]
아주 오래 전,
지인에게 <너에게 묻는다>라는 이 시를 건네 받아 처음 읽었을 때가 떠오른다. 굳이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시, 그 강한 임팩트를 구절구절 읊지 않아도 되리.
시상의 간결함과 시적 표현의 노련함에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그리고 한.참.을 ‘뜨겁다’라는 개념에 혼란해진 뇌 속을 헤집어대야만 했던 기억도 있다.
물오른 더위 탓도 있겠으나 이런 저런 번잡한 잡념과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한껏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 여름날. 내가 나에게 무한 위로를 보내야 하는 늦은 오후. 이럴 때 마음에 드는 시 한 편 만큼이나 내게 깊은 위로를 안겨 주는 게 또 있으랴.
그래서 그 오래된 기억의 한자락을 더듬어 '안도현 님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집을 다시 펼쳐본다.
ㅡ[낡은 자전거]
너무 오랫동안 타고 다녀서
핸들이며 몸체며 페달이 온통 녹슨 내 자전거
혼자 힘으로는 땅에 버티고 설 수가 없어
담 벽에 기대어 서 있구나
얼마나 많은 길을 바퀴에 감고 다녔느냐
눈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많이 알수록
삶은 여위어가는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자전거야
자전거야
왼쪽과 오른쪽으로 세상을 나누며
명쾌하게 달리던 시절을 원망만 해서 쓰겠느냐
왼쪽과 오른쪽 균형을 잘 잡았기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이만큼이라도, 왔다
ㅡ[모항으로 가는 길]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윈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서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 번쯤 내동댕이쳐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을 달리면
객짓밥 먹다가 석삼 년 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가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 이 길은 말하자면
좌편향과 우편향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데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 나섰다가 지친 너는,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
저 잘난 세상쯤이야 수평선 위에 하늘 한 폭으로 걸어두고
가는 길에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
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 게 나올 거라는
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처럼
모항도 그렇게 가는 거야
모항에 도착하면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너는 물어오겠지
아니, 몸에다 마음을 비벼넣어 섞는 그런 것을
꼭 누가 시시콜콜 가르쳐줘야 아나?
걱정하지 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이미 모항이 네 몸 속에 들어와 있을 테니까
ㅡ[연애]
연애시절
그때가 좋았는가
들녘에서도 바닷가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있던 시절
사시사철 바라보는 곳마다 진달래 붉게 피고
비가 왔다 하면 억수비
눈이 내렸다 하면 폭설
오도 가도 못하고, 가만있지는 더욱 못하고
길거리에서 찻집에서 자취방에서
쓸쓸하고 높던 연애
그때가 좋았는가
연애 시절아, 너를 부르다가
나는 등짝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다
무릇 연애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문득문득 사람이 사람을 벗어버리고
아아, 어린 늑대가 되어 마음을 숨기고
여우가 되어 꼬리를 숨기고
바람 부는 곳에서 오랫동안 흑흑 울고 싶은 것이기에
연애 시절아, 그날은 가도
두 사람은 남아 있다
우리가 서로 주고 싶은 것이 많아서
오늘도 밤하늘에는 별이 뜬다
연애시절아, 그것 봐라
사랑은 쓰러진 그리움이 아니라
시시각각 다가오는 증기기관차 아니냐
그리하여 우리 살아 있을 동안
삶이란 끝끝내 연애 아니냐
'연애'를 읽다보니, 풋풋한 이십 대 시절의 사랑이 떠오른다.
누군가를 좋아하면서도 상처 받을까봐 두려워 슬그머니 자존심을 내세워 물러섰던 때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마음을 무작정 '사랑'이란 이름으로 치장하던 때이기도 하다. 그런 그 때의 사랑을 '쓸쓸하고 높던'이라고 표현한 시인의 시선은 역시나 예사롭지 않다.
@ 고흥 외나로도 일출
늘 모항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출렁이는 게 삶인듯 하다.
너무 오랫동안 타고 다녀서 혼자 힘으로는 땅에 버티고 설 수가 없는 자전거처럼 될 때까지, 살아있는 동안은 어쩌면 시인의 말대로 '끝끝내 연애하듯' 가슴 일렁이며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한 편의 잘 씌어진 시 앞에서는 항상 잠시 주춤거리게 되고 마냥 생각이 깊어진다.
시인의 고뇌를 따라가보고, 그 사색의 깊이에 풍덩 빠져도 보고.
그렇게 시에서 사람들에게는 결코 받을 수 없는 짙은 위로와 마음의 정화와 살아갈 힘을 때때로 얻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마음에 드는 시 들을
한없이 읽고, 또 읽을 수 밖에 없다…… .
"시란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이고, 이해는 또 다른 사랑이다. 모든 인간에게서 시를 본다." ㅡ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