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5년을 거슬러 첫사랑을 헤아리다 <Jan 25. 2016>
꽁꽁 얼었다.
하얀 눈이 덮인 나미나라 공화국의 강을 바라보다 진풍경에 머릿속까지 하얘지는 느낌이다. 나는 말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잠시나마 눈앞에 펼쳐진 설원을 가슴에 폭 담았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처럼 딱 추웠던 겨울 말이다.
꽁꽁 얼어붙은 강에서 오빠를 비롯한 동네 친구들과 썰매를 타던 기억이 소록소록 되살아났다. 한 겨울 추위에 썰매를 타기 위해, 마당에서 오빠와 삼촌들은 조그마한 나무판자들을 어디선가 구해와 망치로 뚝딱뚝딱 썰매를 만들었고, 얼음판 위에서 더 잘 미끄러질 수 있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것들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그러다 드디어 썰매가 완성된 후에는, ‘가자~’를 연발하며 우르르 다 같이 몰려 뛰어나갔던 기억! 차가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줄줄 흐르는 콧물들을 연신 옷소매로 닦아내며 번갈아 썰매를 탔었다. 그렇게 얼음판 위에서 ‘쓰르륵~ 쓰르륵~’ 팔이 빠지도록 썰매를 저어댔고, 우리들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 재미난 놀이는 해 질 녘 엄마가 우리들을 찾으러 와서야 끝나곤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
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
하얀 눈밭에 대고 여주인공이 사별한 애인을 그리워하며 산을 향해 부르짖던 모습이 떠올랐다.
잘못 배달된 러브레터로 시작되는, 눈 덮인 오타루 시와 고베 시를 무대로 펼쳐지는 일본 로맨스 영화. 죽은 연인 ‘이츠키’를 잊지 못하는 한 여자 ‘히로꼬’와 그 연인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중학교 동창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펼쳐지는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이야기이다.
겨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라고나 할까? 누구나 가지고 있을 학창시절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고등학교 1학년, 친구 따라간 교회에서 아주 우연히 인사하게 된 남학생. 외모가 약간 서구적이기도 하고, 눈매가 톰 크루즈와 닮은 면이 없잖아 있어 별명이 톰 크루즈였던 그다. 그는 내 얼굴을 한두 번 본 것 밖에 없는 데, 고3이 되었어도 여전히 나를 좋아한다는 소식이 친구를 통해 들려왔다. 진정한 짝사랑이었다. 나는 그 당시 ‘도도함’의 절정이었다.
대학입시를 위해 한참 공부하던 고3 시절, 그는 시립도서관으로 날 찾아왔다. 쑥스러운 표정으로 별 말없이 커다란 노트 한 권을 건네주었고, 그 날 펼쳐본 그 노트에는 한 장 한 장 본인이 좋아하는 시와 글들이 가득했다. 뜻밖에 노트의 뒷부분에는 러브레터 영화 속 ‘이츠키’처럼 내 얼굴을 스케치한 그림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그 그림에 별 감흥이 없었고 허접한 그림솜씨에 웃음만 나왔었다. 노트에는 아무리 보아도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쓰여 있지 않아 싱겁기 그지없었고, 버리기엔 정성이 가득한 듯도 해 그저 서랍 한쪽에 보관만 해 두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그는 서울로, 나는 고향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고, 대학교를 가면 본격적으로 나와 사귀어 보려던 그의 바람은 친구하자는 나의 답변에 좌절되었다. 사실 나는 그가 싫지 않았었는데, 왜 그리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학생이 된 몇 달 후, 그는 '같은 학교에서 어쩌다 보니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났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스러웠으나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1학년을 마칠 무렵 군대를 가겠다며 불쑥 내 앞에 또 한 번 나타났었고, 잘 다녀오라며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내게 있다.
그런데, 그는 안타깝게도 군대를 가자마자 평소 잘 드러나지 않았던 지병이 발견되어 군대에서 나오게 되었으며,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그 길로 영원히 걸어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럽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른다.
오늘은 그런 그에게 영화에서처럼 안부를 묻고 싶다. 드넓게 펼쳐진 하얀 설원을 보면서 문득 말이다.
그동안 사느라 바빠 잊고 지냈던 내 어렴풋 첫사랑이랄 수 있는 그,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그를 25년을 거슬러 다시 헤아려본다. 그리고 러브레터의 한 장면을 내 머릿속에, 입가에, 오버랩 해 본다.
너무나 절절한 그 마음을 몰라주었던 철없던 나를 용서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