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처럼 마음에 녹아드는, 김초엽 저 <행성어 서점>

이 짧은 SF 소설에도 마음이 이토록 충만해질 수 있음을...

by 정정


김초엽 저<행성어 서점>


김초엽 저, <행성어 서점> 완독.


짧은 단편소설 모음집이라 금방 읽었다.

출근길, 퇴근길, 대기 시간 틈틈이 읽었더니, 때마침 눈 내리는 출근길 정류장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맞이했다.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작가는 SF 장르의 작가라고들 소개가 되곤 한다.


(SF라 하면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당연시 여겨지는 SF 장르에 내포된 광활한 우주의 이미지, 우주 전쟁이나 스타워즈 같은 대서사의 이야기, 아니면 화려한 마블 세계관이라든지, 마션 같은 현실성이 가미된 이야기라든지...)


하지만, 내 기준에서 그의 글들은 우리가 익히 아는 SF 장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김초엽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글에는 마음이 담겨있고 조금 다른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 각도의 차이와 시선의 차이로 얼마나 재미있는 상상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웅장하고 스펙터클한 우주전쟁이나 이과 감성의 이야기나 그런 게 없어서, 누군가에겐 어찌 보면 소소한 그의 글이 '이게 SF가 맞나?'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지구에도 미스터리하고 아직 과학으로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은 현재, 우주를 바라보고 SF 장르에서 이런 이야기도 있을 법 하지 않은가.


나는 오히려 그래서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SF 장르의 글에서도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고 내게도 있을 법하게끔 적당한 현실성이 묻어나며, 어느 정도 상상의 나래를 펼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그의 단편소설 모음집인 <행성어 서점>은 정말 짧은 단편들로 엮여진 책이다.

처음엔 한편, 한편 다 다른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 이야기들 사이로도 '늪의 균사체들의 연결망'처럼 이야기가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있음을 마지막 페이지로 향하면서 깨닫게 된다.



짧은 단편 글들 속에서, 나는 '시몬을 떠나며'와 '늪지의 소년'이 좋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몬을 떠나며'는 시몬이라는 행성에 대해 여행하고 시몬에 대한 여행 가이드 책을 써야 하는 작가가 정류장에서 시몬 사람을 만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가 통하는 둘의 대화에서 "왜 시몬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사는가"에 대한 질문이 던져지고, 가면에 대한 진실을 답한다. 비극으로 시작한 가면은 시몬인들에게 있어서 비극적 결말이 아닌 뜻밖의 엔딩을 선사한다.

왜 가면을 쓰나요? 하고 묻던 지구인인 작가의 물음은 사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질문이 아닐까. 오늘날엔 사회생활용 웃음, 사회생활용 쿠션어, 사회생활용 성격 mbti까지 (농담 식으로 가벼이 여기지만) 따로 구분 지어서 부르곤 하지 않은가. 가면을 쓰면 표정이 안 보이고, 감정을 느낄 수 없지 않냐는 물음 역시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사실 표정이 중요할까. 어색하고 억지웃음보다 무표정이지만 진심 어린 마음이 더 깊은 감정을 이끌어낸다고 생각한다.

'시몬을 떠나며'를 읽은 후, 짧게나마 상상했다. 나는 '시몬'의 세계관으로 보면 어린 시절엔 지구인들 속 시몬인이었고, 자라면서 지구용 가면을 한 겹 더 얹었을 것 같다고. 그리고 성인이 되고 여러 가지 갈래의 사건들을 겪은 후에서야 비로소 다시금 지구용 가면을 벗어버리고 시몬으로 돌아간 상태...?


재미있게 읽었다. 늪지의 소년과 균사체들의 감정도, 단편집 사이사이를 연결 짓는 오웬의 뭉치들 같은 연결망의 세계관 스토리도, 김초엽이라서 쓸 수 있는 마음이 담긴 글이자 나에게는 생각을 하게끔 하는 책이었다.


(물론 나는 이렇게 끄적여야 내 생각이 손가락을 통해 뱉어낼 수 있는 편이다. 안 하면...ㅎㅎ)



12월 21일, 눈 내리는 겨울 어느 날 출근길의 끝자락에서 시작해서 점심시간에 마무리 지은 후기...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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