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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n Nov 30. 2021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책을 '듣는' 새로운 경험

  요즘 일주일에 하루는 꼭 서점에 가려고 한다. 집에서 가까우면서 이런저런 출판계 트렌드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 교보문고 같아 거의 매주 방문하는데, 한참 전부터 눈에 띄었던 책이 있다. 외국소설 베스트셀러와 종합 베스트셀러 매대에 언제부터 놓여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책이었다.

아마 서점에 종종 발걸음을 하는 분이라면 한 번쯤은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짙은 푸른색의 무광 표지와 띠지에 큼지막하게 쓰인 '인생의 두 번째 기회를 드립니다'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매트 헤이그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이야기다.

매트 헤이그,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노진선 옮김, 인플루엔셜(2021).

  베스트셀러 매대는 꼼꼼히 살펴보는 편이므로, 물론 이 책도 오다가다 펼쳐보았다. 앞표지와 뒤표지, 띠지, 책의 가장 앞을 읽어보았고 중간에 아무 데나 펼쳐서 두어 장 읽어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고른 책들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이 짧은 의식으로는 미처 매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다가 뒤늦게 다른 계기로 접하는 책들도 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으레 그렇듯, 책과의 관계도 처음 받은 느낌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경우가 경험상으로는 더 많았다. 그래서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내려놓았었다.



그렇게 몇 주가 더 흘러갔다. 나는 꾸준히 오프라인과 국내·외 온라인 서점을 들락거렸다. 그런데 이 책은 오프라인 서점 베스트셀러 매대에서 내려오지도, 온라인 서점 첫 페이지에서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항복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구입했다. 대중이 그토록 이 책을 사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확신하며.


첫인상은 과학일까?


  도대체 이 책은 왜 그렇게 잘 팔릴까? 그 궁금증에 못 이겨 읽기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자인도 한몫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점에 가서 표지가 보이도록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보다 보면 책 디자인에도 유행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즘은 은은한 파스텔톤의 배경에 소설 제목만 깔끔하게 넣거나 심플한 일러스트를 그려 넣은 표지가 유난히 많이 보이는데,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의 표지 또한 그렇다. 이 책이 대중에게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를 강조하는 띠지조차 파스텔톤의 하늘 같은 느낌을 주도록 은은하게 디자인되었다. 흔히들 '감성적'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런 디자인이다. 표지를 열어 페이지를 넘겨보면 몇 가지가 더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차례가 따로 없고 흰 공간이 많다. 페이지 위아래 여백도 조금 넓은 편이지만 이야기의 한 장 한 장이 짧기 때문에 생기는 공백이 큰 탓도 있다. 각 장의 제목과 본문 사이, 그리고 장이 끝난 뒤 남는 공간이 여유롭다. 

흰 공간이 가득한 페이지

표지와 띠지에서부터 본문까지, 내용을 읽기도 전에 받는 느낌이 있다. 쉬어가는 책이구나. 잠이 오기를 기다리며 베개에 기대앉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첫인상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자 장점은 쉽다는 것이다. 쉽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독자에게 가닿을 수 있을지,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어느 정도 높이의 진입장벽이 있는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책이 '쉽다'라고 할 때에는 의미가 다르겠지만, 나에게 어떤 책이 쉽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기본적으로 문장이 단순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은유나 비유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소설의 구성이 실험적이지 않고 정석적이다. 쓰이는 어휘도 평이하다. 서사가 중심이 되는 소설인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작가가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꽁꽁 숨겨져 있지 않다. 

  어떤 책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숲길을 굽이굽이 더듬어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빽빽한 나무 사이로 언뜻 무언가를 발견하듯이 작가의 메시지를 찾아 나서야 한다. 또는 눈을 감은 채 손끝으로 퍼즐 조각의 감촉을 느껴가며 힘들게 퍼즐을 맞추고 마지막에 눈을 떠 완성된 그림을 마주하듯 알게 되는 책들도 있다. 이런 읽기를 요구하는 책은 정신력과 시간, 정성과 노력을 많이 들여야 한다. 읽는 과정에서 좌절하거나 아득해지기도 하지만 이런 책들이 주는 즐거움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진입장벽이 높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다. 책이 아무리 좋아도 독자를 만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그런 책이 아니다. 눈이나 발에 특별히 걸리는 것 없이 직선으로 쭉 뻗은, 잘 닦인 산책로를 선선히 걷는 것과 비슷하다. 도착지점은 출발지점에서도 명료하게 보이고, 독자는 단지 그 도착지점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그 길 자체를 즐기면 되는 것이다. 사실 어느 문학작품이든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 비슷할 수밖에 없다. 문학은 모두 인간의 삶에 대한 것이므로. 소설이 쉽다는 것은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직설적이고 단순하다는 뜻이다. 크게 정신력을 들이지 않아도 그 메시지를 전달받고, 이해하고, 그에 대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쉽기 때문에, 그리고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메시지를 재미있게 전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독자를 만나 어떤 즐거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인생의 두 번째 기회를 드립니다


  책의 띠지는 보통 잠재적 독자의 눈길을 끄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책의 정수를 담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눈에 띄기 위한 디자인과 문구를 택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의 띠지는 이 책이 현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를 어필하면서 책의 요점까지 담아낸다. 소설이 쉽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책을 한 문장으로, 독자에게 말을 거는듯한 느낌으로 요약하면 띠지의 문구가 된다. "밤 12시, 죽기 바로 전에만 열리는 마법의 도서관에서 인생의 두 번째 기회를 드립니다." 주인공 노라 시드는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는 깊은 절망감에 빠져 죽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약을 잔뜩 삼키고 그가 눈을 뜬 곳은 사후세계가 아닌 삶과 죽음 사이의 중간지대, 자정의 도서관이다. 거기서 노라는 그가 살면서 했던 모든 선택에 따라 달라졌을 모든 삶의 가능성을 담은 책들을 마주하고, 사서 엘름 부인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삶을 살아볼 기회를 얻는다.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을 발견하면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노라 시드가 자정의 도서관에서 정착할만한 삶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를 책으로 보는듯하다.


책을 읽는 또 다른 경험, 오디오북


  오디오북을 제대로 들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 생소한 매체를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실 나는 이 책이 취향이 아닐 것임을 알면서도 골랐고, 그런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작가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장은 단조로운 편이었고 반복이 많았다. 번역도 아주 매끄러운 느낌은 아니었는데 간간이 비문도 보여서 약간 미심쩍은 마음으로 읽은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스트셀러에서 그토록 오래 버텼던 데에는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앞에서 얘기했던 대로 그 궁금증에 읽기로 결심한 게 크다. 개인적 취향과 대중의 선호도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굳건한 베스트셀러에 대한 궁금증은 개인적 취향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완독 하기 위해 오디오북이라는 매체를 찾았다. 

  세상에는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이 있고, 각 매체마다 매력도, 특징도, 타겟층도 다르다. 나는 텍스트를 여러모로 선호하는 편이다. 애초에 책과 관련된 일을 업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 자체가 영문학을 전공으로 접하고 나서였으므로, 나는 생각할 거리를 주고 공부할 여지가 많은 책들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온통 포스트잇을 붙이고 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보는 책을 선호해왔고 그런 방식의 독서를 즐겨왔기 때문에 이 책은 솔직히 취향이 아니었다. 종이책으로 읽기에는 조금 곤욕스러울 만큼. 그래서 오디오북을 찾아 틀었다. 『기획회의』에서 언급되었던 오디오북 어플 '윌라'를 다운해놓기도 했던 참이었으니까.

  오디오북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이내믹했다. 단순히 성우의 책 낭독을 녹음한 것이 아니었다. 상황에 어울리는 배경음악이 깔리기도 하고, 책에 묘사된 소리들이 생생한 효과음으로 다가온다. 비가 오고 있다는 묘사가 있으면 빗소리가 나고, 발소리가 들린다고 하면 저벅저벅 발소리가 나는 식이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했고, 계속 듣다 보니 생각한 것 이상으로 몰입하게 되었다. 책으로 읽을 때는 이래저래 취향이 아니어서 지루한 감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오디오북으로 들으니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즐길 수 있었다. 

  매체에 따라 더 잘 들어맞는 이야기가 있다고 늘 생각해왔다. 어떤 이야기는 장편소설, 어떤 이야기는 단편소설, 어떤 이야기는 영화, 어떤 이야기는 드라마…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매체가 오디오북이었다. 오디오북은 개인적으로 책과 영화, 음악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있다고 느꼈다. 시각적으로 제공하는 정보는 없고, 인물의 심리까지 해설자의 설명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은 책에 가깝다. 음악이나 효과음 같은 소리와 텍스트를 읽어주는 목소리만으로 독자, 또는 청자는 스스로 장면 장면을 상상해내야 한다. 영상매체와 달리 주어지는 묘사와 설명만으로 독자가 적극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능동적으로 내용을 받아들여야 한다. 

  반면, 종이책과 달리 오디오북은 텍스트가 흘러가버린다. 이런 점은 영화, 또는 음악과 비슷하다. 오디오북의 청자는 책의 독자처럼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하여 읽거나, 멈춰서 생각에 잠기거나, 인상 깊은 구절에 표시를 할 수 없다. 엄밀히 따지면 할 수야 있겠지만 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편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오디오북은 정해진 속도가 있다. 청자는 재생을 눌러놓고 진행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어떤 책들은 오디오북으로 듣기 버거울 것이다. 이야기가 직선으로 쭉 뻗은 것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복잡하게 말려들어갈 때,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어려울 때, 자주 멈춰서 생각하고 필기해야 할 때. 그러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오디오북으로 듣기에 좋은 책이었다. 

  음악과 비슷한 점은 물성이 없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비교적 덜 받는다는 것이다. 종이를 엮어 만든 책이라는 물성 덕분에 종이책을 읽는 다양한 경험-손에 닿는 표지의 감촉, 책의 무게, 종이의 냄새, 페이지를 넘길 때 손 끝에 감기는 종이의 느낌 등-이 있듯이, 오디오북을 듣는 고유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과 눈이 자유롭기 때문에 음악을 들을 때처럼 이동하면서도 들을 수 있었는데, 이는 책, 영화 모두와 완전히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나는 지하철 안에서 시간을 보낼 때나 산책을 하면서 많이 들었는데, 산책하는 동안 들은 부분들은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 책의 물성에 대한 감각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으며 경험한 시간과 장소의 감각 덕이다.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의 풍경, 피부에 와닿는 바람의 온도, 주변의 냄새, 뒷목을 덥히는 햇빛의 따뜻함.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텍스트에 더 풍부한 시공간적 경험을 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근사했다. 매트 헤이그가 1차로 만들어낸 세계에 독자가 또 다른 맥락을 덧입힐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식의 읽기-듣기라고 해야 할까?-가 아주 매력적으로 잘 어울리는 텍스트라는 점에서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오디오북으로 들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각 잡고 앉아서 해야 하는 독서가 부담스러운 독자에게는 더더욱. 지하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잠들기 전에, 외출 준비를 하면서 편하게 읽고, 또 들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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