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n Nov 14. 2021

남자는 춘다. 플라멩코를.

잠시 멈춤, 일보 후퇴, 춤추며 이보 전진

  플라멩코?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하면서도 낯선 이름이었다. 어떤 춤일까? 검색해보니 원색의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무대 위에서, 또는 그보다는 소박하지만 여전히 풍성하게 퍼지는 치맛단의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세비야의 길거리에서 탭댄스를 추듯 경쾌한 박자로 발을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은 플라멩코 추는 '남자'였다. 남자라는 단어를 추가해 찾은 검색 결과 중 영상 두어 개를 보고 나자 궁금해졌다. 이런 정열적인 춤을 추는 소설 속 남자는 누구일까?

  예상치 못하게도 책을 펼치자마자 만나는 남자는 남훈 씨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내에게 밥 달라고 요구하는, 이제 막 은퇴하려는 예순일곱의 굴착기 기사. 요즘 젊은 애들은 너무 패기가 없어서, 아니면 부모님이 다 준비해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혀를 끌끌 차고, 시켜먹자는 말에 버럭 화를 내는, 배 나오고 머리 벗어진 늙은 남자. 이 남자가 플라멩코를 춘단 말인가? 

허태연, 『플라멩코 추는 남자』, 다산책방(2021).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바로 이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간경화로 죽을뻔했던 마흔한 살의 남훈 씨는 그 해 겨울 퇴원하자마자 문구점에서 가장 비싼 노트를 사 '청년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남은 생에 꼭 이루고 싶은 목표를 기록한 일지.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떠들썩한 때에 예순일곱이 된 그는 '청년일지'를 기억해내고 은퇴하기로 마음먹는다. 오래된 장식장 속에서 낡아가던 가죽 노트를 꺼내 넘겨본다. 이제 남훈 씨는 젊은 시절의 자신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할 것이다. 비록 그러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과제들이 상상과는 다르고 각 과제를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전혀 예상 밖의 일들을 맞닥뜨리겠지만. 뜻밖의 궤도를 그리는 이 여정에서 남훈 씨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과 세계를 만난다.


너무나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조금 특별한, 남훈 씨


  이야기 도입에서 만나는 남훈 씨는 별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보수적이고 꼬장꼬장하며 가부장적인, 흔하디 흔한 60대 후반의 남자처럼 보인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면 270쪽에 달하는 그의 이야기를 단숨에 읽어버릴 순 없었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도 꽤 평범하지만 그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자질이 있다면 그것은 '추진력'이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지만 그 버킷리스트에 쓰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말로 노력하는 사람은 얼마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런 류의 '죽기 전에 꼭 해보아야 할 일들' 목록은 막연한 희망사항에 그친다. 지루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반짝 힘을 주는 찰나의 꿈이다. 마치 '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 목록처럼. 

  하지만 남훈 씨는 '청년일지'를 읽고 거기에 쓰인 과제를 하나하나 수행해나간다. 남보다 먼저 화내지 않기. 청결하고 근사한 노인 되기. 외국어 배우고 해외여행 하기. 건강한 체력 기르기. 자서전 쓰기. 이혼한 첫 아내와의 딸 보연에게 사과하기. 각 과제를 위해 그는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의식적으로 욱하고 치받는 화를 누르고 부드럽게 말하려고 하고, 낡은 속옷을 전부 내다버리고, 백화점에 가서 새 속옷을 사고, 명품관에 가서 정장을 구경하고, 신사복 상점에 가서 정장을 맞추고, 도서관에 가서 배울 언어를 정하기 위해 자료조사를 하고, 어학원과 춤 학원에 등록하고, 명사들의 자서전과 작법서를 보며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을 쓰고,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첫째 딸을 찾는다. 방구석에 앉아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몸을 움직여 새로운 곳을 찾아가고,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시도해보고, 그 과정에서 새 인연을 만난다.

  26년 전 남훈 씨는 그때그때 드는 생각을 '청년일지'에 적었을 것이고, 그렇게 정해진 목록은 처음에는 모두 별개의 과제들이었을 것이다. 아마 젊은 시절의 그는 막연히 이루고 싶은 일들을 생각날 때마다 기록하며, 점잖은 노인이 된 자신의 모습, 해외여행을 하는 자신의 모습, 운동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단편적인 장면으로 상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순일곱의 그가 실제로 그 과제들을 하나하나 수행해나가려고 하자 일곱 개의 독립적인 장면이었던 것들이 묘하게 얽혀 들어 하나의 삶이 된다. 남훈 씨가 망설임 없이 몸을 움직여 '청년일지'대로 살기 위해 뛰어드는 추진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일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평범한 남자는 조금 특별해진다. 그는 자신의 비겁함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정하며 과거의 실수를 외면하지 않고 만회하려 최선을 다한다. 사회가 노인들에게 매몰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용기를 내어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해보고, 때로는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빠도 젊은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 아주 진부한 이야기다. 하지만 남훈 씨는 이 일들을 자연스럽게 해내는, 이야기 속의 점잖고 인성이 훌륭한 할아버지가 아니다. 그는 버럭버럭 화를 내기도 하고 불리할 때는 홀랑 자기 정당화를 해버리기도 하는, 당장이라도 길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밌는 것이다. 그런 그가 하는 의외의 선택들과 그 선택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주어-동사-목적어' 대로 말하기


  남훈 씨는 스페인어를 배우기로 한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무엇도 에둘러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 "만일 동사를 먼저 말하는 언어를 사용했다면 조금 더 진취적으로 세상을 살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50). 스페인어 학원 선생 카를로스는 첫 시간에 "새로운 언어형식이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고 한다(56). 은퇴 후 '청년일지'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는 남훈 씨는 정말로 새로 배우는 스페인어의 형식처럼 새로운 관계와 삶을 만든다. 10년 동안 운전해온 볼보 굴착기를 팔면서 늙다리 청년을 만난다. 스페인어 학원 선생 카를로스도 만나고, 정장을 사러 간 백화점 명품관에서 냉대를 받고 우연히 간 신사복 상점 '보석의 왈츠'에서 재단사도 만난다. 재단사가 "춤이라도 추실 수 있게, 편안하게"(59) 옷을 만들어주겠다는 말에 영감을 받아 남훈 씨는 스페인어 학원 수업시간에 본 플라멩코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플라멩코 강사도 만난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의 조언을 듣고 오래전에 외면한 딸, 보연도 만나러 간다. 그는 이 모든 일을 거침없이 멋지게 해내지는 못 한다. 늙은이가 이런 걸 한다고 무시하면 어떡하지? 굴착기 운전사였다고 나를 얕잡아보면 어떡하지? 딸이 나에게서 돈을 뜯어내려 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걱정하고 의심하면서도 결국에는 해낸다. 

  '주어-동사-목적어' 어순으로 말하는 언어를 배우며 그렇게 사는 법을 배운다. 나는-무엇을-한다 순으로 말하면 '무엇을'에 생각이 머문다. '한다'라는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멈칫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한다-무엇을 순으로 말하면 '무엇을'을 생각하기 전에 '한다'라고 선언부터 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청년일지'의 삶을 만들어간다. 남훈 씨는 배운다. 스페인어를. 남훈 씨는 춘다. 플라멩코를. 남훈 씨는 쓴다. 자서전을. 남훈 씨는 만난다. 보연이를. 


코로나19 팬데믹: 강제 멈춤


  코로나19 팬데믹이 직접적으로 이야기에 끼친 영향은 이렇다. 남훈 씨는 언젠가 은퇴를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행하면서 은퇴를 서두르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고 당장 건강에 이상도 없었지만 죽음의 위협은 더 이상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청년일지'에 써놓은 과제를 죽기 전에 수행하려면 하루라도 더 빨리 시작해야 했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그는 과제 중 하나인 '해외여행 하기'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만약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행하지 않는 상황이었다면 과제의 순서가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팬데믹 때문에 그는 '해외여행 하기'를 가장 뒤로 미루어야 했고, 그전에 다른 과제들을 수행해야 했다. 먼저 정장을 맞추고, 스페인어와 플라멩코를 배우고, 자서전을 쓰기로 했다가 보연을 만난 후에 스페인을 갔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을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코로나는 우리 사회와 우리 인생을 어떤 의미에서는 멈추게 했다. 이 멈춤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때때로는 되돌아볼 기회도 주었다. 코로나 때문에 환자 면담이 금지되어 병원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사람들과 가족 대신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들, 이동이 제한된 사람들. 소설 속에는 이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하지만 남훈 씨가 코로나로 인해 은퇴하기로 결심하고 다른 과제들을 먼저 수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강제로 우리를 멈추게 함으로써 코로나는 바쁘게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지나치고 미루던 것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환경과 의료시스템, 노동자 인권, 계층 문제 같은 것들을. 외면하고 있던 문제들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상황은 더 아비규환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영원히 덮어둘 수는 없는 문제들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직시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코로나는 앞으로, 앞으로만 달리던 우리를 멈춰 세워 숨기고 싶어 했던 부분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새 가정을 위해, 지금의 아내와 딸 선아를 위해 외면했던 딸 보연을 마주해야 했던 남훈 씨처럼, 우리는 껄끄러운 우리의 비밀들과 약점들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물론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재난이었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 운운하는 것은 진부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어떻게 '희망'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훈 씨가 결국 보연과 함께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서 맞춤 정장을 차려입고 세비야 스페인 광장에서 플라멩코를 춘 것처럼, 코로나19가 종식되고 우리도 미루어왔던 일들을 해결하기를, 하고 싶었던 것들을 이루어내기를 바란다. 코로나로 인한 강제 멈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부지런하게 찾자고, 남훈 씨의 언어로 이야기해본다. 우리는 함께 이겨낸다. 이 시기를. 우리는 잃지 않는다. 희망을.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문학생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