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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Jul 13. 2023

까칠함의 이유

며칠 전 부엌 싱크대에서 집게벌레를 발견했다. 집게벌레는 여러 번 빠져나오려고 애를 썼지만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매끄러운 표면을 기어오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기를 제외한 벌레들에게는 꽤나 너그러운 편이라 살려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수세미를 들이밀었다. 집게벌레가 수세미에 기어올라오면 재빠르게 구해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이놈이 도무지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신중하고 조심스러운지.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물체를 경계하며 앞 다리로 계속해서 두드릴 뿐이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메시지가 DNA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일까. 


수세미가 아닌 다른 물건들을 들이대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손으로 잡아내야 하나 생각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통통하고 미끄러워 보이는 몸통을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꽁무니에 달린 집게도 신경이 쓰였고. 그런데 가만히 관찰을 하다 보니 집게벌레의 집게는 과연 실효성이 있을까 싶었다. 적을 공격하기 편하려면 꽁무니가 아닌 앞쪽에 집게가 달린 것이 낫지 않나. 아, 그러면 또 먹이를 먹을 때 불편하려나. 아니면 전갈처럼 관절 같은 것이 있어서 꽁무니에 있는 집게를 쉽게 구부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집게벌레는 통통한 배 뒤에 덜렁 집게가 달려있는 형태라 그것을 한껏 구부리다가는 배에 쥐가 날것만 같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집게벌레의 삶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종이 두 장을 가지고 와 기어코 집게벌레를 구해냈고 방생해 주었다. 아무쪼록 힘겹게 집게를 쓰는 일이 없는 삶을 살아가려무나. 


돌이켜보면 구원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은 집게벌레뿐만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벌레들이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아! 생각해 보니 당연한 것이었다. 낯선 손길을 만난 벌레들의 끝은 대부분 죽음이었으리라. 겨우 목숨을 부지한 소수의 벌레들은 갑자기 나타나는 낯선 물체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이 생겼고 그것이 대대손손 이어지고 있으리라. 


획득 형질(후천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 것 아니냐고? 지금까지는 그것이 진리였지만 후성 유전학이 발전함에 따라 획득 형질 역시 유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발견되었다. 난생처음 만나는 인간을 경계하는 수많은 벌레들과 야생 동물들을 봐도 그럴 것 같지 않은가?


벌레들을 징그럽게 여기는 이들이 대다수이고 나 같은 인간이 별종에 가까울 것이다. 아마 대다수의 벌레들은 오래도록 자신들을 해치려는 인간들만 만나왔지 나처럼 도와주려는 인간은 거의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인간에 대한 경계심을 풀 수 있겠는가.


문득 영화 '조의 아파트'가 생각난다. 주인공 조는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바퀴벌레를 보고 깜짝 놀란다. 바퀴벌레는 코웃음을 치며 이야기한다. 언제 말할 기회라도 줘봤냐고. 마주치기만 하면 소리를 지르고 때려잡으려고 난리를 피우는데 어찌 말을 건넬 수 있었겠냐며. 


도움의 손길을 경계하고 거부하는 벌레들을 보며 인간들의 까칠함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까칠한 벌레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따뜻한 말 한마디와 친절의 손길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언젠가부터 자신에게 내미는 모든 손길을 적대시하기 시작한 것이고. 


그런데 그들은 알고 있을까. 개중에는 진짜 선한 의도를 가진 손길도 있었다는 것을. 그들의 까칠한 태도가 따뜻한 선의를 차가운 무관심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사실 벌레들의 까칠함은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정말로 목숨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까칠함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종종 까칠한 인간들을 만나면 어느 드라마의 대사가 떠오르곤 한다. 사실은 사랑받고 싶으면서 사랑받지 못할 짓만 하고 있다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폭행하고 죽이는 범죄가 왕왕 일어나고 다른 사람을 등쳐먹으려는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 와중에 어떻게 다른 사람의 선의를 믿고 친절함을 유지할 수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점점 까칠해져 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면서.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뉴스가 아닌 진짜 주변의 세상을 한 번 돌아보길 바란다.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을 떠올려봐도 좋으리라. 개중에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의 비율이 얼마나 되던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결국 확률의 문제이다. 극악무도한 범죄자와 파렴치한 사기꾼의 뉴스가 연일 흘러나오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보통의 인간들이 훨씬 많다. 정말로 선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사는 이들도 적지 않고. 


미움받을 용기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오른다. 저자인 기시미 이치로는 다른 사람을 믿으며 사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람을 믿음으로써 때로는 손해를 볼 수 있지만 전 인생을 놓고 봤을 때 사람을 믿으며 사는 것이 사람을 믿지 않고 사는 것보다 나 자신의 행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을 믿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다 적으로 여기게 된다. 적이 가득한 세상을 사는 것보다는 친구가 가득한 세상을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결국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충분히 까칠해질만한 이유가 있어도 친절을 유지한 채 친구가 가득한 세상을 살 것인지, 온통 적으로만 가득한 세상을 까칠함이란 무기로 대항하며 살 것인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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