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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Jul 13. 2023

독서의 이유

소설가 김영하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를 재밌게 읽어서 따라 해 보았다. 제목에는 독서라고 쓰긴 했지만 사실 나는 책 읽기란 표현을 더 좋아한다. 누군가에게 취미에 대해서 말할 때도 책을 읽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지, 독서와 작문을 좋아합니다라고 하지는 않는다. 왠지 더 딱딱한 느낌이 들고 무언가 각을 잡고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아서이다.


흔히들 부모가 먼저 책 읽는 본(本)을 보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부모님이 책을 읽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무척이나 책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의 주장에 힘을 보태는 증거는 또 있다. 아들은 내가 집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자주 보았지만 책 읽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는 책을 읽으며 재밌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선택지가 없을 때의 이야기다. 다른 재밌는 놀 거리가 있는 집에서는 책을 읽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작년인가 안 쓰는 물건들을 버릴 때 아이의 책도 거의 정리해버렸다. 마법천자문이나 와이책 같은 것들은 버리기가 아까워서 슬며시 물어보았다. "이 책들 정말 안 볼 거니? "응" "그러면 버린다." "응" "진짜 버린다." "응" 아이는 일말의 아쉬움도 없다는 듯이 쿨하게 답을 할 뿐이었다.  


읽을 책이 모자라서 늘 아쉬웠던 어린 시절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60권짜리 동화책을 사 오신 것이 처음 책에 빠지게 된 계기였다. 침대맡 여닫이 서랍장에 소중히 넣어두고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하도 읽다 보니 책 제목만 봐도 내용이 술술 기억나는 경지에 이르렀고 그렇게나 재밌던 동화책들이 점점 시시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다른 집에 가면 읽을거리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 것은.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집에 돌아갈 때까지 붙들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어른들은 대부분 책을 빌려주거나 선물로 주었다. 하지만 책에 대한 나의 갈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어린이용 책들이 너무 얇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 친구네에 놀러 갔는데 거기에는 엄청 두꺼운 책이 있었다. 만화로 된 과학 백과사전이었다. 몇 시간을 빠져서 읽었는데도 다 읽지 못했다. 다행히 아버지 친구분이 그 책을 빌려주었고 집에 와서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끝이 나지 않고 한참이나 남아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솜사탕 같은 느낌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1Q84를 출간했을 때 소설가 김연수는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왜냐고? 책이 두꺼웠기 때문이다. 이미 충분히 검증이 된 작가의 책은 두꺼울수록 좋다는 그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어린 시절에 비슷한 경험을 한 덕분이었다. 과학 백과사전을 오래도록 붙들고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분량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용이 당시의 나에게는 꽤나 어려웠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인 걸로 기억하는데 그 책에서 배운 과학 상식들이 중고등학교 때까지 유용하게 쓰였을 정도이니 어찌 빨리빨리 읽을 수 있었겠는가. 


가끔씩 할머니의 손을 잡고 고모네에 놀러 갈 때면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거기에는 ABE 문고의 책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무려 88권이나 되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책은 '얼음 바다 밑 노틸러스'와 '바닷가 보물'이었다. 특히 '바닷가 보물'은 아직도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책이다. 요즘도 새로운 도서관에 갈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꼭 검색을 해본다. 여태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나는 바닷가 보물의 주인공인 메리를 참 좋아했다. 그녀는 남들에게는 바닷가에 널려있는 돌멩이에 불과했던 '돌 동물'을 참 아끼고 좋아했다. 돌 동물은 메리가 화석을 부르던 말인데 너무 예쁜 표현이지 않은가. 내가 우리나라 교육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었으면 화석이라는 말을 죄다 돌 동물로 대체하고 싶을 정도이다. 


깨진 곳 없이 완전한 돌 동물을 발견하면 뛸 듯이 기뻐하고 새로운 돌 동물을 발견하면 더없이 설레하던 메리는 금세 나의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도대체 동물들이 어떻게 딱딱한 돌이 되었을까 한참을 고민했고 실제로 동네 바닷가에서 돌 동물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단 하나의 돌 동물도 발견하지 못했고 이내 흥미가 식고 말았다. 하지만 메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돌 동물들을 변함없이 사랑했고 훌륭한 화석학자가 되었다. 나중에는 고고학의 어머니라고까지 불리게 되었고. 나의 소중한 친구인 그녀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바닷가 보물에 나오는 벨렘나이트란 단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순식간에 마음을 뺏길 것만 같다. 메리가 '손가락 돌'이라 부르며 유난히 좋아했던, 고대 오징어의 딱딱한 부분이 화석으로 변한 벨렘나이트. 이 단어가 왜 그리도 어린 시절의 내 마음을 설레게 했을까? 손가락 돌이란 예쁜 이름도, 벨렘나이트란 멋진 이름도 둘 다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여행의 이유'에서 김영하는 호텔이 좋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일상의 아픔과 해야 할 일들이 없기 때문이라 했다. 책을 읽는 것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다. 책 읽기에 몰입하면 현실을 벗어나 그곳으로 가게 된다. 시공간을 넘어 작가와, 책 속 주인공과 친구가 되고, 때로는 주인공과 하나가 되기도 한다. 


또래보다 조금 더 고독했던 어린 날의 나에게 책은 안식처이자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책은 여전히 나에게 큰 위로를 주고 더없이 좋은 친구로 함께 하고 있다. 책을 만나서, 책을 좋아해서 참 다행이다.


참, 얼마 전에 바닷가 보물이 있는 도서관을 알게 되었다. 강남역 근처에 있는 국립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이다. 담담하게 글을 쓰고 있지만 처음 발견하고 얼마나 반갑고 좋았는지 모른다. 조만간 소중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에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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