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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Jul 13. 2023

자연인이 되는 이유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읽기 시작했는데 첫 이야기의 배경이 여수 향일암이었다. 몇 년 전 그곳을 다녀온 생각이 나면서 이내 슬픈 마음이 차올라서 책장을 덮고 말았다. 홀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자연인이 되는 것은 그런 장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은 아닐까. 이곳에 가면 이런 슬픔이, 저곳에 가면 저런 슬픔이 차올라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살던 집, 동네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아파트와 프랜차이즈 가게가 넘쳐나다 보니 새로운 동네에 가도 크게 낯설단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실제로 얼마 전 울산과 부산에 다녀왔는데 아들은 몇 번이고 서울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장소뿐 아니라 사람들도 문제이다. 싫은 인간을 피해 회사나 모임을 떠났는데 다른 곳에도 꼭 그와 같은 인간들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도 어찌나 비슷한지 아픈 곳만 골라 콕콕 찌른다. 어쩌면 그들이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싫은 장소, 인간들을 피하려면 깊은 산속으로 홀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하필 산이냐고?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맨 경험이 있는 이들은 알 것이다. 산속에 들어가면 다 비슷비슷한 풍경이라 어디가 어디인지 알기가 어렵다. 게다가 계절이 변할 때마다 완전히 풍경이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장소인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산에서는 장소와 연관된 깊은 상처가 남기가 어렵고 설령 남았다고 해도 도시의 그것보다는 쉽게 지워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모든 자연인들이 싫은 것을 피해서 도망쳐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고자 떠나온 이들도 있으리라. 왜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냐고? 누군가를 열렬히 짝사랑해 본 이들은 알 것이다. 좋아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사람을 그저 바라보는 것은,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보다도 더 끔찍하다는 사실을. 


사랑뿐 아니라 돈이나 권력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흔히 자연인들을 욕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개중에는 욕심이 지나쳐서 세속에서는 더이상 살아갈 수 없었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배신한 연인을 부숴버릴 거야라고 말했던 90년대 드라마의 여주인공 마음처럼, 가질 수 없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아예 외면하는 것을 선택하고 산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마찬가지로 타인과의 비교가 괴로워 SNS를 싹 지운 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미래의 자연인 후보일지도 모르겠다. 


중년 남자들이 '나는 자연인이다'란 프로그램을 좋아하고 자연인을 동경하는 것에도 이런 심리가 깔려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젊음의 패기는 없어졌고 남은 생에는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이 남았다. 큰 부자가 된 친구, 여전히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는 친구, 가족과 늘 화목한 친구, 꾸준히 운동을 하며 건강을 자랑하는 친구 등. 자신이 간절히 갖고 싶었던 것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부러우면서 미운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미운 것들, 좋은 것들이 다 보기 싫어졌지만 훌쩍 떠날 수 없는 그들은 오늘도 자연인을 보며 대리 만족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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