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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May 31. 2024

호텔방과 모래성

샤워를 하면서 글을 쓸 생각을 하다 보니 커피 생각이 간절해졌다. 모카포트를 씻어 두기는 했지만 다시 커피 원두의 무게를 재고 수동 그라인더로 갈고 모카포트에 부은 다음 잘 풀어주고 다시 조립해서 작은 불에 올려놓고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에 가서 글을 쓸까, 아니면 커피를 사가지고 올까 하는 고민이 잠깐 들었다. 커피를 사 와서 글을 쓰는 것도 좋고 호텔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는 것도 좋다.
그동안 출장이나 여행을 가면 꼭 짧게나마 글을 쓰곤 했다. 여행지 호텔방에서 책상을 온전히 글을 쓰는 용도로 사용해 보지 않은 것은 손에 꼽힐 정도이다. 적어도 책을 읽기라도 했다면 아쉽기는 했어도 나쁘지 않은데 책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못한 채로 돌아오면 뭔가 비용을 지불한 만큼 서비스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혹시 글을 쓰겠다는 목적으로 호텔에 묵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제껏 그렇게 해 본 적은 없었다. 호텔방에서, 생소한 방에서 글을 써본 적은 있지만 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그런 장소를 찾아가 본 적은 없다. 성수동인지 어딘가에 한두 시간 글만 쓸 수 있는 장소를 대여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카페에 커피를 마시러 가서 글도 쓰는 경우가 있지, 어딘가를 글을 쓰기 위한 목적으로 비용을 지불한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글을 쓰겠다고 호텔을 잡으면, 무엇보다도 그 비용이 신경 쓰여서라도 글만 쓰려고 하게 될 것이다. 성격상 분명히 느긋하게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물리적인 환경이 아니라 머릿속의 생각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을 오히려 답답하게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한 글자라도 빨리 써야 한다면서 내내 책상에 앉아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자신이 그런 식으로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 또한 잘 안다. 목적 있는 행동에는 그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책임이 뒤따른다. 그 책임감은 글의 내적인, 글 자체의 성격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동기를 줄지 방해를 줄지는 임의로 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아는 한 방해가 될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이 나에게 주어진 일종의 기회라는 아이디어는 일면 오만한 생각이다가도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마음은, 당연하겠지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나를 괜찮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이 그나마 다행인 것이고, 심지어 이유가 없는데 막연히 싫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누군가 잘못 친 골프공이 살짝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와 내 머리를 맞춘다고 해도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시간을 돌릴 권리도 없다. 더 넓게 보면 태양의 톱니바퀴 중 어디가 잘못되어 태양풍을 미친 듯이 뱉어내어 그 영향으로 며칠 동안 쓴 글이 전자기기에서 사라져 버린다고 해도 대비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지구가 이상한 소행성과 혜성의 영향으로 태양의 궤도에서 벗어나더라도, 혹은 모종의 이유로 우주가 꺼져서 존재가 없었던 것처럼 된다고 해도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여기까지는 내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고, 통상적으로 나에게 일어난다고 하는, 내 몸에 일어나는 것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호르몬의 영향으로 생기는 변덕은 나 자신부터 당황스럽게 했던 것이 이미 여러 번이고, 내 몸은 물질세계에서 유일한 내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하듯이 혹사시키면 바로 암 같은 병이 걸리거나 나중에 치매가 걸릴 것이라고 하고, 당장에도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몸의 일부를 잃거나 죽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렇다고 내 내면에 대해서는 안전한가 하면, 처음 이야기한 것처럼 원하는 것이 있어 가지려고 하면 나중에 가서는 그것이 오히려 나를 방해하는 것처럼 1초 미래의 기분조차 알아내기 힘든 것이 나이다.
이 모든 것들, 특히 몸에 대한 생각들을 하다 보면 나라는 존재는 물질적으로 알 수 없는, 자아만 있을 뿐이고 이 세상에서 내 몸이라는 탈 것만 가진 채로 알아서 경험해 보라며 던져진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내 몸도 내가 아니고 그 밖의 세상은 내가 아닐 뿐 아니라 내 의지가 닿지도 못한다. 돈이나 권력도 '말'과 '서류'를 통해 내 의지를 멀리 닿게 한다는 착각으로 인해 만족감을 주지만, 그런다고 해서 몸이 고분고분하게 아무 병도 없이 지나가는 것도 아니다.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천한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면, 나는 그 구분을 의미 없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나서서 큰 소리로 외칠 의지도, 관심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내 직업과는 별도로 나 자신이 이 몸의 일부인 뇌와 공모하여 글이라는 의미 덩어리를 내놓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을 천한 일이라고 부른다면 받아들일 것이다. 귀한 일이라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이다. 더 안으로 들어간 나 자신은 어떻게 된 모습인지 알지 못한다. 나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아는 사람, 관심이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천국을 가기 위해서 반드시 다른 사람과, 사회와 얽혀야 한다면 나는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다. 해탈하기 위해 나를 버려야 한다면, 나는 몸은 버리되 뇌는 제외하고 싶기에 해탈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는 생각을 하는 주체로서 존재하겠지만, 뇌에서 가지고 있는 언어 능력과 단어와 그 밖의 경험이 포함된 기억이 없다면 우리가 의미하는 생각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즉 저 뇌가 없더라도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그러니까 생각이라는 것이 우리 원초적인 존재가 하는 생각과 물리적인 세계에서 우리 뇌에 의지해서 하는 생각 두 가지로 분리할 수 있는지가 명확해져야 생각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 물리적인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가 더 깊은 곳에 있다고 가정하고 생각하는 것을 즐기는 뇌를 가진 것이 나인지, 나라는 존재가 이 몸에 달린 뇌를 가지고 조금 더 이 물리적인 세상에 가까운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인지. 모든 것이 모래성이다. 모래성보다 가벼우니 다행이라 생각하고자 하지만 그조차 내일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는 변덕이  모래성 안에 넣어 두기에 너무나 무겁다. 세계는 내면의 내가 보기에 언제든지 너무나 쉽게 무너질 수 있고 유지되는 것이 기적인 곳이다. 모래성은 모래성일 뿐이니까. 다른 곳에 바위로 지은 성이 있어서 임시로 사는 이곳에는 모래성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라는 상상이 내가 처음이 아닌 이유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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