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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May 30. 2024

키보드, 글쓰기 전용 키보드

키보드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을 한다. 게임용으로 사용하는 기계식 키보드, 고무판이 들어있는 멤브레인 키보드 등 만드는 방식과 구조는 다르지만 어떤 것이든 사용하는 데 기분이 더 좋았으면 좋겠다, 키감이 좋았으면 좋겠다, 키를 두드릴 때 소리가 어땠으면 좋겠다, 등의 생각으로 키보드를 고를 뿐이다. 한 번 키보드를 고르면 게임용 키보드이기 때문에 문서작업을 할 때는 다른 것을 꺼낸다든지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밖에 나갈 때 가지고 나가는 키보드가 별도로 있거나 할 뿐이다. 그때그때 바꾸는 것이 귀찮아서일 수도 있지만 보통은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업무용 컴퓨터를 켜고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로그인을 한다. 나는 그 로그인을 할 때 사용한 키보드로 문서작업까지 한다는 것이 왠지 어색하다. 어쩔 수 없이, 그리고 생각 없이 사용하고는 있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집에서 사용하는 컴퓨터로는 문서 작업을 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노트북이나 다른 기기를 가지고서만 글을 쓰는데, 윈도우 로그인할 때는 터치스크린이어서 화상 키보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키보드의 용도가 겹치지 않는다.
사실은 같은 키보드를 사용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은 없다. 단지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뿐이다. 키보드는 엄연히 글을 쓰는 환경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부엌에서 서서 글을 써도 잘 써지는 날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시로 글을 쓰기 위해 부엌으로 가는 일은 없듯이, 범용으로 하나의 키보드를 모든 용도로 사용하더라도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글을 쓰려고 그 키보드를 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게임용 키보드가 있다면 그 키보드를 게임에서 단축키를 누르기 위해 사용하는 용도로만 쓰지, 글을 쓰는 데 사용하려고 다시 꺼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게임을 할 때 단축키를 지정하고 누르면 프로그램에서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해당 동작을 해 준다. 반면, 글은 기계는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영혼으로부터 나와서 그 글자들의 조합을 의미로 알아보고 어 나갈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기계에게 키보드로 글을 쓴다는 말은 단순한 의미 없는 나열의 기록에 불과한 것이 들어오는 것이다. 기계가 보는 문서는 우리가 보기에 의미 없는 숫자의 나열인 것과 다름없다. 반면 로그인부터 게임에 이르기까지 키보드를 통해 들어간 데이터는 기계가 필요로 하는 정보들이다. 당장 동작에 필요하거나 계산을 해야 하거나 관계없이 그 상태로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은 없다. 문장은 기계로서는 알 수 없는 암호 같은 것을 단순히 저장만 할 뿐이다. 프로그램을 코딩하더라도 결국은 기계가 어떻게 동작할지 지시를 내려주는 것인데 글은 말 그대로 그림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키보드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기계 입장에서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데이터인 셈이다.
이 모든 것을 같은 키보드를 가지고 사용한다는 것은, 기계에게야 아무 느낌이 없겠지만, 나로서는 크나큰 오류인 것처럼 느껴진다. 기계에게 이런 의미 없는 데이터를 주기 위해서는, 지극히 내 입장에서 필요한 글을 쓰게 위해서는 내 느낌과 내 글에만 도움이 될 만한 키보드가 필요하다. 기계에 입력하는 데이터들이 키보드의 키에서 나오는 정보범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하지만 소프트웨어마다 각 키가 의미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들의 의미는 모여서 문장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다 똑같은 손가락의 연장의 기능이지만, 손가락에서 나오는 그 데이터가 기계에 맞추어져 있는지 우리 머릿속 추억과 기억에 맞추어져 있는지에 따라 엄연히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모두 별도의 키보드를 사용해야 한다, 사람들이 잘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로서는 그렇게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이미 그렇게 사용하는 컴퓨터도 있다. 노트북이 터치 스크린이 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회사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별도의 키보드를 구입해서 가져다 놓을 것도 아니다. 그저 소프트웨어에서 요구하는 단편적인 입력과 문장이 만드는 글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생활의 모든 곳에서 깜짝깜짝 놀라며 깨달아 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키보드를 사용하지 않는 글쓰기, 말로만 해도 알아서 기록으로 만들어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글쓰기를 하게 되면, 그때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키보드로 입력한 정보의 아날로그적인 측면과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을 비교할 필요 없이 애초에 소리 전체가 아날로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기를 통해 들어온 글자를 소프트웨어적으로 사용을 하거나 사람의 언어 규칙에 따라 저장하는 것이 분명히 구분되는 것과 애초에 언어 규칙으로 들어온 것을 다시 소프트웨어적인 입력과 언어로 분리해서 해석해야 하는 문제는 크게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하고 싶은 말이 명확하고 확고하지만 그 자체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이 되어서 설명을 하려고 해도 결국 동어반복이 되는 일이 있다. 키보드에 대한 내 생각이 그런 경우에 해당되는 것 같다. 계속해서 '글을 쓰기 위한 도구는 글을 쓰기 위해서 특별히 마련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로 귀결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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