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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May 31. 2024

세상의 날것 나의 날것

세상의 정보는 우리 안의 마음과 결이 다르다. 정보는 우리가 외워야 할 숫자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요즘 인기 있는 의상, 모자 같은 것들도 모두 정보이다. 머리로 아는 모든 것들이 정보이다. 우리의 뇌는 처리에 있어서 효율성은 좋을지 몰라도 처리 자체의 질에 있어서는 그리 좋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우리에게 좋은 것과 도움이 되지 않는 것 사이의 판단은 우리의 의식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절대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반복을 하면 그저 그것이 '해야 할 것'으로 인식 뿐이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있듯이, '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우리 행동의 동기에는 '하고 싶은 것'만 있어야 한다. 어떤 것이 우리에게 결국 좋기 때문에 당장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은 그 결과를 얻고 싶은 것이어서 하는 것이다. 당장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동기는 '하고 싶은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행동의 동기가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곧 '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이다'라는 말처럼 단순한 동의 반복이다. 그것은 동기 없는 행동이니 곧 명령이 있으면 그대로 행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뇌에서 내려온 명령대로 행동하는 사지의 동작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뇌가 있다는 것이다. 동기가 있어서 그 동기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할 행동을 계산하고 그렇게 계산한 결과대로 나오는 출력이 행동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을 생략하는 것은 뇌에는 편한 일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 또한 반복되면 뇌는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 정도라고 인식할 것이다.
정보를 흡수하는 것은 뇌가 하는 일이다. 생각하는 것도 뇌가 하는 일이다. 정보를 수동적으로 흡수할 것이냐 계속해서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지만 스스로 글이라도 나올 수 있게 도와주는 생각을 할 것이냐는 내가 의도적으로 선택해야 할 문제이다. 선택을 하고 나면 뇌는 그저 거기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생각하는 것이 당연히 번거롭다. 정보를 얻는 행위와는 달리 생산성도 없어 보인다. 곧바로 써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도 버리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나의 판단이 '그래도 글을 계속 써야 한다'라면 글을 쓸 생각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 뇌이다. 나의 의도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몸에서 의지를 가진 것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나 자신의 존재와 면역체계.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할 때 밖에서는, 심지어 내가 보기에도, 새로운 것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우리 머릿속에서는 그동안 의도적으로나 의도적이지 않은 방향에서 들어온 정보들을 머금고 걸러내고 흡수할 수 있는 만큼 흡수한 다음 다시 그 흡수한 것에 비추어 새롭게 정보들을 해석한다. 이렇게 해석한 정보들과 눈과 귀를 통해 바로 들어온 정보 중 어떤 것에 집중할 것인가는 내가 선택한다. 뇌에게는 바로 들어온 정보를 흡수하는 편이 편할 것이다. 해석한 정보들은 또다시 새로운 정보의 해석에 사용되고 이것은 계속해서 뇌가 힘든 일을 해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반면 세상의 날것은 그대로 기억만 하면 될 일이다. 그것도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는 기계적인 동작만 할 뿐이다.
글을 쓰지 않고 미적거리는 것은 용서할 만한 일이다. 글을 쓰지 않고 멍하게 있는 시간이 아까워 재미있는 인스타그램의 피드와 스토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용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런 것을 물론 본다. 즐기기도 한다. 유튜브 스토리와 달리 일부러 내용을 구겨 넣지 않은 것이 많은 인스타스토리는 지하철 같은 곳에서도 즐겨 보는 편이다. 하지만 글을 쓰거나 글을 쓰기 위한 명상의 시간에 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뇌에 편한 일이어서 중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뿐 아니라 각종 댓글들이나 자극적으로 말도 안 되는 뉴스 기사도 내 눈을 세상 쪽으로 돌리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세상에게는 그것들이 날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내 경험과 세상에 대해 보고 들은 것들을 머금고 걸러내고 흡수하고 해석한 것들이 날것이지만 뇌에게는 세상의 날것이 흡수하기 편한 것이다. 생각이 필요 없으니까. 그러나 나에게 생생한 것은 내가 해석한 정보뿐이다. 그리고 해석할 시간도 넉넉히 주어야 한다. 인스타 스토리도 생생하다고? 아니다. 아무리 남의 아픔이 커 보여도 나의 가려움보다 생생할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구의 기쁨도 나의 따가움보다 클 수 없다. 아무리 좋은 렌즈로 촬영한 고화질의 현장 장면이라도 내 오래된 기억 속의 희미한 기억보다 더 생생할 수 없다.
나는 글을 살기 위해 쓴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리고 생각하기 위해 글을 쓴다. 생각은 아무런 결실이 없다. 글이라도 만들지 않으면 쓸모없는 행동이 된다. 행동. 뇌로 하는 일이지만 손발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행동이 맞다. 저 미래 어디에선가 판단의 기준이 될 활동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생각과 결론들은 그렇게 소중한 내 경험의 세포들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행위라도 따르지 않으면 중요하다고 판단할만한 적극적인 행동이 없기 때문에 간과하기 다. 사실 간과해도 문제가 없다. 쓸데없는 일이라고 느끼면서도 계속한다면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효과가 없는 이라면 아무거나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문제이다.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금세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파묻혀 죽어버릴 것만 같다. 생각하는 능력을, 글을 쓰고 싶다는 의지 자체를 질식시켜 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오늘도 일부러 글을 쓴다. 계속해서 쓰고 또 쓰며 밖에 있을 때 틈나는 대로 인스타그램을 켜는 것을 허락한다. 내가 애써 낸 시간에 켜보지 않도록.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자식 없다고 하지만 내 의지를 잘 따르는 내 몸 또한 없는 법이다. 때로 내면에서 '그렇게 해서 생기는 것이 무엇인가? 재테크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글쓰기를 위한 생각이라니, 그 생각이, 그렇게 쓴 글이 재테크에 도움이 되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 키보드에서 손을 떼면 한다는 일이 인스타그램 좋아요 누르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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