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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May 31. 2024

글쓰기 on the 노트

몇 년 전 인터넷 서점 한 군데에서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를 새로 표지를 만들어 판매한 적이 있었다. 한창 정신이 없는 때였는데 그 와중에도 가지고 싶어서 한 세트를 주문했다. 옛날 버전에 비해 표지가 내 마음에 들었기도 했지만 그전에 가지고 있던 것을 욕조에서 읽다가 미끄러지면서 물에 반쯤 담갔다 꺼내는 바람에 잘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붙지 않게 잘 말렸는데도 빳빳해진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새 책을 언젠가 다시 구입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기도 했다. 세트는 단순했다. 새 표지 한 권과 부록으로 똑같은 표지로 된 노트를 한 권 받았다. 사람들이 좋다고 고른 것인지 출판사에서 투표를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중간중간에 소설 속 구절들이 한 페이지씩이나 차지하고 들어 있다. 그 외에는 일반적인 수첩이어서 언젠가 써야지 하고 놔둔 게 벌써 몇 년째이다.
올해 초부터는 그 노트를 다시 꺼내어 글쓰기 노트로 사용하고 있다. 손으로 예전처럼 글을 쓰지는 않는다.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있으면 급할 땐 휴대폰을 꺼내서 구글 메모로 한두 줄씩 적어 놓고 나중에 그걸 보면서 글을 쓰고는 하는데, 너무 급하지 않으면 연금술사 노트를 꺼내어 메모를 하는 식이다. 아침에 아직 잊지 않은 꿈을 작아 보기도 하고 그냥 생각난 것을 한두 줄씩 적다가 조금 길어져서 안 되겠다 싶어 다시 핸드폰으로 이어서 쓰기도 한다. 메모가 목적이지 글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이 가지를 치지 않도록 글씨를 흘려 써서라도 재빨리 적어 내려가야 한다.
그렇게 적은 노트를 펴서 메모를 열 번 넘게 읽다 보면 글을 써야겠다는 의지가 생기면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생각이 느껴진다. 아무 이유도 연관성도 없이 언젠가 술을 마시다 나와서 둘러보고 공기가 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거리가 눈앞에 펼쳐지기도 하고 대학 때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던 강의실 문이 생각날 때도 있다. 강의실 생각을 하니, 갑자기 공대와 달리 문과대는 교수실 문이 쇠가 아니라 나무라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훔쳐갈 게 없어서였을까. 하지만 공대 교수실 한쪽에 있던 책이 가득 꽂힌 책꽂이와 달리 문과대의 몇몇 교수실은 지나다니면서 들여다보일 때면 책꽂이는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고 미처 꽂을 자리를 찾지 못한 남은 책들은 책상 근처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최신이 중요한 학문과 과거 전체가 경중 없이 모두 연구 대상인 학문의 차이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책으로 가득한 그 이미지는 왠지 지금도 부러운 느낌이다.
노트는 일부는 그렇게 꿈의 기억나는 부분이 적히기도 하고 단순히 떠오른 착상, 소설의 디테일 등으로 점점 채워지고 있다. 표지에는 'The Alchemist', 'Paulo Coelljo'라고 쓰여 있는데 나중에 그 노트가 내 글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되고 나면 조금 껄끄러운 상황이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한글로 가득 찬 노트를 보고 파울로 코엘료의 것이라고 착각할 바보가 있을 거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작가의 작품의 이름이 쓰여진 노트를 작품 구상 같은 용도로 사용한다는 것이 미안해지는 그 정도의 자존감이 그때 가서는 있었으면 하는 희망인 것이다.
사실, 사막의 이미지가 상당히 강렬하다. 모든 것을 묻어버리고도 숫자로 밀어버리는 모래 알갱이와 하늘의 노란 태양이라는 두 가지가 동시에 결합된 곳이라는 이미지, 척박한 땅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역동성 등. 그래서 '듄'의 장면을 이미지로 만든 노트가 나오자마자 구입해서 쓰려고 했다. 하지만 듄 역시 원작 소설이 있기도 했고, 실제로 가지고 다니면서 낡게 되면 그 사막 그림이 어떻게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미 가지고 있는 노트나 쓰자는 쪽으로 생각이 바뀐 것이었다. 하지만 글을 미친 듯이 써 내려가고 주제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면서 연금술사 노트를 다 쓰게 되면 언젠가 사막 그림의 노트로 바꾸게 되지 않을까.
한때는 그런 노트가 생기면 내 글로 그 노트를 다 채우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손글씨로 수첩을 채우면 그 수첩의 내용을 다시 읽을 날이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한다. 아무리 자동으로 글을 인식해 주는 소프트웨어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도, 모니터로 읽을 수 있는 것과, 그런 소프트웨어의 도움으로 모니터로 읽을 수도 있는 상태라고 하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나조차 읽을지 알지 못하는 글을 남들이 읽기 바라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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