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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01. 2024

긴장을 풀기 위한 SNS

수단은 수단에 머물러야 한다

2009년쯤이었던가.
트위터라는 것을 처음 접했다. 당시 내가 사용하던 피처폰은 엘지전자에서 나온 풀스크린폰이었다. 터치 방식은 지금과는 다른 뭔가로 눌러야 하는 플라스틱 필름으로 된 것이었고, 드래그 반응도 조금 느렸다. 당시 정전기식 터치스크린을 내세운 코원의 에스나인이라는 엠피쓰리플레이어도 사용했지만 나중에 아이폰 3Gs가 들어오고 나서 깜짝 놀랐을 만큼 터치 드래그에 문제가 많았다.
트위터에는 140 자라는 제한이 있었고 그래서 미국에서 영어로 트윗을 하는 데에도 갖은 약자가 많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글자수 제한은 한글에서도 똑같아서 한글로 140 자라는 제한은 굳이 약자까지 쓰지 않아도 중언부언하지만 않으면 될 만한 양이었고, 처음의 트위터 용도대로라면 그저 하고 싶은 말들을 하는 공간일 뿐이어서 그냥 140자가 다 되면 올리고 다음 글을 이어서 작성해서 또 올리면 되는 문제였다. 팔로우를 몇십 명 정도만 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아이폰이 들어오기 전에는 와이파이가 지원되지 않아서 통신사의 데이터 용량을 늘리고 집에서는 컴퓨터로만 인터넷에 접속을 했다. 트위터의 경우에는 독일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빨간색으로 데코레이션이 된 웹페이지가 있었는데, 트위터 화면을 휴대폰에 맞게 없앨 것은 없애고 동영상이나 그림 같은 미디어도 표시하지 않도록 설정할 수 있는 서드파티 역할을 했다. 아예 트위터 홈페이지는 처음 가입할 때에만 들어가고 집에서조차 그 웹페이지를 통해 트위터를 즐겼던 것 같다. 애초에 사진을 별로 보지 않고 글만 줄줄 읽어 내려가기만 해도 신기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PC통신을 즐기던 세대였다면 이미 근 10년 이상을 PC통신에서 텍스트 중심으로 지내오다가 인터넷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갖은 미디어 규격이 생겨나던 시기였는데 미디어가 없는 페이지로 변환해서 즐기겠다는 것은 후퇴라는 이미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유독 사진을 자주 올리던 계정들이 많았던 것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나 또한 인터넷으로는 이런저런 밈이 올라오는 것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 PC통신이라는 것을 세대가 어느 정도 겹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접하지 않은 상태다 보니 게시판 문화라는 것 자체가 그리 친근하지 않았기에 트위터에서 피드의 글들만으로 충분히 재미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핸드폰을 이용해서 접속한다는 것이 특징이 된 최조의 사례이기도 했다. 어느 날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너무 밀려서 운전하던 과장님이 어디 사고라도 난 게 아닌가 하는 말을 하시길래 트위터에서 검색을 해 보았는데 누군가 내가 있던 고속도로의 어느 휴게소 부근에서 사고가 났다며 사진을 한 장 올렸다. 그 사진을 차에 있던 다섯 명이 돌려 보고 승용차의 하얀색과 번호판만 보고 호기심에 '정말 이게 원인인가 한 번 보자.'이러고 다시 떠들었다. 그 와중에도 차는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가고 있었고, 사진에서 사고가 나서 차를 세워둔 것이 1차선이라고 되어 있어서 혹시 몰라 과장님이 2차선으로 차선을 옮긴 상태였는데 어느 순간 1차선 차들이 갑자기 2차선으로 끼어들면서 나아가는 것이 보였다. 다들 긴장을 하고 이제 사고 수습하는 곳에서 트위터에 올라왔던 똑같은 차가 있는지 보는데, 견인차에 매달려 있는 흰색 승용차가 트위터에서 본 그 번호판을 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다들 "이건 뉴스 프로그램이라고 보아야 하는 거 아냐?"라고 했고, 나는 "쓰는 사람이 엄청 많으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죠. 지금은 쓰는 사람이 몇백 명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지금 그 위치를 인스타그램이 차지한 것 같다. 그 중간에 포스퀘어 같은 앱들이 끼어들기는 했지만 모든 과정의 일관성 있는 흐름은, 휴대폰으로 접속하는 비중이 늘어났다는 것과 즐기기 위해 사용하는 데이터가 점점 많아졌다는 것이다. 글에서 사진으로, 사진에서 비디오로 감상하는 것도 업로드하는 것도 늘었다. 틱톡은 뉴스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사용하지도 않고 그다지 시류와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제 글 중심에서 글은 보지도 않고 영상만 보는 인스타그램으로 나의 스마트폰을 이용한 킬링타임의 주류도 바뀌었다. 심지어 영상에 한글을 잔뜩 박아 놓으면 바로 옆으로 넘긴다. 관심이 있는 사람은 볼 테니 올리지 말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누구나 쉽게 광고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보니 그 광고 자체를 믿기 힘들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트위터를 사용할 때는 간혹 선문답 같은 한 문장씩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의 말을 들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턱 하고 올려놓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도 트위터의 기능이기는 했다. 그런 것도 머리를 식힐 겸 읽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충분히 수요와 공급의 법칙의 범주에 들어갈 만한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다만 나는 선문답 같은 그런 글은 책으로 읽지 그런 걸 읽겠다고 SNS를 하지는 않는다. 희한하게 그런 계정을 보면 반감이 들었고, 그런 계정은 팔로우하지도 않고 심지어 가끔 나에게 팔로우 한 다음 나중에 해제하는, 일종의 팔로워 수를 늘리는 영업을 하는 계정도 있다 보니 블록처리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선문답이 필요 없다. 머리를 식히고 싶으면 그런 영상을 보면 된다. 쉽다. 휴식이 휴식답다. 그러나 그럼에도 충분히 머리를 식히지 못할 때가 있다. 머리를 식힌다는 것은 다시 머리를 써야 할 상황에 대비한다는 뜻인데, 머리를 다시 쓸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나무를 베다가 도끼를 다시 갈아내고 식힌 다음 다시 나무를 베어야 하는데 날을 가는 부분을 빼고 식히기만 하는 셈이다. 그러면 똑같은 시간을 생산성 없이 보내고 생산적인 일은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 충분히 적당히 사용하는 것 같다가도 인스타그램이 선을 넘는 것 같은 때가 종종 있다. 어렸을 때 텔레비전이 그랬던 것처럼. 만화영화 하나만 보려고 했는데 20분이면 끝나는 만화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두 시간째 멍하게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그런 경우. 거기부터 잘못된 건가 보다. 인스타그램에는 죄가 없다. SNS의 잘못이 아니다. 조금 긴장을 풀지 말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빵장수 야곱의 책이 다시 읽고 싶어 진다. 긴장을 놓은 듯하면서도 지혜는 잊지 않는 자세. 언제나 나의 본질은 바뀌지 않으니 계속 살아갈 날들을 계속 원하는 모습으로 살기 위해 익힌 방식은 언제나 잊지 말고 고수해야 한다는 교훈.
오늘도 해가 뜨고 내일도 해가 뜨지만 그 해는 같을 수도 있고 같지 않을 수도 있다. 나빠지지만 않게 하려면 같은 태양이 되도록, 내게는 적어도 같은 태양일 수 있도록 스스로 다독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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