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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10. 2024

걷기, 어디론가 향하는 기계적인 행동

내가 언제부터 걷기를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기억나는 건 중학교 때, 학교 옆 공원을 지나 소방서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신호가 뀌면 길을 건너서 새로 생기고 있는, 주택을 허물고 새로 짓는 건물들과 그곳에 새로 들어오는 가게들을 보면서 걷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가 희미하게 보일만 한 곳에서 또 다른 횡단보도를 건너 집으로 왔던 길이다. 그 길들의 대부분은 지금도 그때의 그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 전은,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중동 신도시가 막 들어서기 시작했을 때여서 다른 쪽으로는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아 아직 흙바닥이었던 학교 앞,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신발부터 양말, 바지 밑단까지 모두 진흙 범벅이 되던 공원 부지를 지나 상공회의소를 끼고 오르막길을 오르고 나초등학교 때는 이름만 들어본 적이 을 뿐이었던 심곡초등학교를 지났다. 그곳에서 제법 넓은 길을 건너 부천대학교 지나치면 집에 오는 길이었다. 버스를 타려면 공원부지를 지나서 5반 버스를 거나 학교 뒤로 가서 5-4번 버스를 타고 부천역에서 내려야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버스를 당연한 듯이 타고 다녔지만 처음 한동안은 왠지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는 일이 너무 번거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단순히 걷는 것이 대중교통보다 오래 걸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걸을 만한 거리여서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기 싫을 때는 망설이지 않고 걸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었으니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 지루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반면 집으로 걸어갈 때면 항상 다른 볼거리가 있었다. 언제나 처음 보는 차는 있게 마련이었고, 모르는 사람이지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든 스케이트보드 연습을 하고 있든 한쪽에서 수도에 연결한 호로 차에 물을 뿌리고 있든, 어쨌거나 똑같은 광경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들을 보기 위해 걸었다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생각보다 그렇게 특이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기억에 남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기다려서라도 버스를 탄 적수두룩하고, 걷기로 했을 때도 그냥 습관처럼 충동적으로 결정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등학교 때까지는 길거리에서 워크맨을 듣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대학교 때처럼 뮤직비디오 보듯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하긴, 대학교 때도 그렇게 음악을 덧씌운 세상을 보고 싶을 때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음악을 들었지 걸으면서 듣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교통사고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럼 정말 내가 '걷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말할 때 내가 좋아한다고 말한 진정한 목적어는 무엇이었을까? 는 것의 무엇이 좋아서 걸어 다니는 것이 좋아진 것이었을까? 대학 시절 느 날 갑자기 걸어서 서강대교를 건너기로 했을 때, 그리고 그 뒤로 종종 그러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무엇이 그렇게 좋았던 것일까? 그날, 학교 C동 건물 8층에서 한강 쪽을 보다가 문득 한강이 예뻐 보인다는 생각이 들자 곧장 1층으로 엘리베이를 타고 내려와 후문으로 나갔다. C동이 가장 후문 쪽에 있던 강의동이었기 때문에 내려와서 바로 학교 밖으로 고민 없이 나갈 수 있었다. 당시는 핸드폰 지도가 없었던 때였기 때문에 창문으로 서강대교를 바라본 방향을 짐작해서 걸을 뿐이었다. 후문에서 큰 길가로 들어섰을 때, 초등학교를 끼고 좌회전을 했다. 이렇게 가다 보면 다리와 관련 있는 무슨 표지판이 있겠지 하는 막연히 짐작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전까지는 한강다리근처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건너본 것도 전철을 타고 건넜던 것뿐, 차를 타고 건너본 적조차 아직 없을 때였다. 전철로 40분이면 가는 거리를 버스를 타고 다시 신촌에서 갈아타가며 한 시간도 넘게 돌아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버스로도 한강을 건너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길을 빨리 찾았다. 한 블록 정도 걸었을 때 서강대교가 고가도로처럼 앞을 막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 막은 건 아니고 그 아래로 차도 다닐 있는 높이었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그 아래로 신호등이 있어서 건너려다 오른쪽 건너편에 올라가는 육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서강대교라는 표지판은 있었지만 처음이라 고가도로처럼 보이는 이것이 서강대교라는 뜻인지 확실하지 않아 직접 올라가 보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올라가 보고 아니면 내려오자,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 자전거를 끌고 내려왔다. 복장을 보니 단거리는 아니 것 같고 그렇다면 이 고가도로는 한강다리가 맞지 않겠냐는 확신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고가도로를 올라가는 마음으로 계단을 끝까지 올라가니 가슴이 뻥 뚫리는 대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렇게 넓은 고가도로는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바닥이 약간 아치형이라 건너편이 보이지도 않아 더 웅장해 보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때, 눈앞의 광경에 감탄을 하기는 했지만 나는 정확히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무언가를 보고 놀라기 위해 걸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한강 다리를 건넌 것은 새롭긴 하지만 신기한 것도 아니고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여의도까지 도착하는 동안 내내 나름 즐거웠다. 내 다리로 어딘가에 도달한다는 그 자체에 재미를 느꼈던 것일까? 그날 말고도 이유 없이 다리가 아플 정도로 걸어 다니는 일은 종종 다. 코엑스에서 출발해서 강남을 한 바퀴 돌아 잠실새내로 가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랬고 올림픽공원에서 출발해서 영동대로를 지나 가로수길과 한남대교를 지나 이태원과 광흥창역을 거쳐 다시 서강대교를 건너 여의도에서 버스를 타고 돌아올 때도 다리가 많이 아팠다. 렇지만 그 정도 걸으면 다리가 아픈 건 아픈 거고 한편으로 새로운 기분이 든다. 마치 머리가 둥둥 떠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몸과 사지는 그저 부속품일 뿐이고 실제 이동하는 건 내 눈과 머리인 것 같은 기분. 눈과 머리에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다리는 걷는 동작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다리가 계속 걸을 수 있도록 몸은 영양분을 소화해서 혈액에 실어 보내주는 것뿐이다. 한마디로 다리가 아프긴 하지만 자신에게는 차에 올라탄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걸어 다니는 즐거움은 드라이브와 다를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사실 풍경을 즐긴다는 점을 보면 속도를 제외하고 똑같은 게 아닐까?
서강대교를 건널 때는 밤섬까지의 아치 아래를 걷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붉게 칠해진 아치는 맑은 날, 특히 가을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너무 쨍해서 마치 하늘과 아치의 색칠이 겹친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난다. 경계선이 삐죽죽한 남색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하늘을 보면 그런 색상의 대비가 눈을 찌르는데 그때 버스나 트럭이 지나가면 바닥도 울렁거린다. 그 두 가지가 합쳐지면 마치 약한 파도가 치는 물 위를 걷는 듯한 비현실적인 감각을 만들어낸다. 아치까지는 아직 난간이 높아 한강물은 잘 보이지 않지만 물까지 보인다면 정말 초현실적인 느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울렁거리는 느낌을 좋아하지 아서 하늘은 놓치지 않고 꼭 쳐다보지한편으로는 재빨리 지나가려고 하는 편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즐겁게 걸었던 것은 모두 목적지가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목적지와 시간. 학교에서 걸어서 집에 가는 길은 집이라는 목적지가 있었지만 집에 도착해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았기에 걸어가는 경로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다리를 건널 때도 서너 시간 공강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충분했고 여의도에서도 바로 돌아올지 라면이라도 사 먹을지, 아니면 벤치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실지 모든 선택이 자유로웠다.
그렇다면, 내가 걸어 다니는 즐거움은 차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를 지나는 경로로 한 바퀴 돌아 집으로 돌아와 주차하는 그런 드라이브와 비슷하지 않을까? 경제 논리로 보아도 시간자원의 측면에서 보아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단순한 기분전환. 그 기분전환이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야말로 기분이 전환이 되는 활동.
그런데 나에게 기분전환하는 방법이라고 하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독서다. 독서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니고 나에게 있어 독서는 세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감정이입용이고 두 번째는 지식 습득용, 그리고 마지막이 시간 때우기 용이다. 그런데 시간 때우기 독서는 머릿속이 맑아지는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뿐이고 집중을 해서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책을 '겪게'되는 것은 감정이입형 독서이다. 지식습득 독서는 말 그대로 공부여서 실제 어딘가에 신경을 많이 쓰거나 외워야 할 때 다른 분야로 잠깐 눈을 돌려서 집중력을 유지하는 용도이다. 영어 공부를 하다가 쉬운 수학 문제를 한두 개 풀거나 그래픽계산기에서 옛날 사람들이 복잡한 방정식으로 재미있는 그림을 그렸던 것을 따라 해 보는 것과 같은 일이다. 감정이입형 독서는 실제로 집중의 정도가 매우 높은 데 비해 스트레스는 매우 낮게 느껴지는 독서이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서 아쉬움이 느껴지거나 혹은 그 이후 스토리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기분으로 비유하자면 재미있는 꿈을 꾸고 나서 지금 깨어난 것이 현실이고 즐거웠던 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와 비슷하다.
내가 갑자기 독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꿈에서 깨어나서 꿈인 것을 알았을 때'의 느낌이 내 걸음이 드디어 끝에 다다랐을 때의 느낌과 비슷기 때문이다. 분명한 목적지나 목표 시간이 없기 때문에 끝은 내가 아무 때나 정하게 되는데, 더 걸어가면 다리가 많이 아플 것 같다거나 지금 버스를 타야 할 것 같다는 이유로 그 끝이 갑자기 오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러면 버스나 지하철에 몸을 싣고 오늘 걸으면서 본 것들과 가본 곳들을 가만히 되짚어 보게 된다. 책을 덮을 때 감정적으로 이입해 있던 '그곳'에서 나오느라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과 걷다가 그만두게 되어 이제까지 본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것은 얼핏 보아도,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똑같은 일다.
그러니 나에게 있어 걷기는 감정이입형 독서와 같고, 단지 나라는 지성체가 몸을 이끌고 집밖으로 나가서 산책 혹은 걷기라는 활동으로 특정 시간 이상을 보내느냐 아니면 책 속으로 들어가 감정을 이입해 화자를 따라다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것이 가성비 면서는 훨씬 나은 경험이 될까? 아니다. 내가 나의 걷기에 대한 정말 솔직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게 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글도 내가 걸어 다니면서 보는 것, 느끼는 것을 동일하게 경험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모든 책이 각각 다르게 느껴지듯 내가 걷는 것 역시 그 많은 책들 중 한 권처럼 다른 책과 다르다. 즉, 모든 독서는 각각 하나의 산책이고 나의 걷기도 매번 각각이 한 권, 한 권의 산책인 셈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파격적인 가설로 결론 삼을까 한다. 내가 걷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걷는 일 분 일 분이 한 문장 한 문장과 같기 때문이라고. 아쉽게도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걷기에 대해 고찰하는 데 사용한 모든 경험이 나의 경험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만큼이나 "세상은 아름다운 한 권의 책과 같다."는 말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나에게 있어 세상은 "모든 순간이 각각 다른 한 권 한 권의 책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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