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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09. 2024

질감과 영원

언제쯤이었을까.

아마 1997년이었을까.

아니다 그때도 물론 그렇지만 그 이전부터였다. 어쩌면 1993년 이전이었을지도 모른다. 공부하다가 지루해지면 교과서를 가까이에서 뚫어질 듯 들여다보고 있고는 했다. 특별히 무언가를 찾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눈으로 질감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것이 취미까지는 아닐지라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있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것이라던가 하는 건 아니고 공부하기 싫어서 책상을 향해 흘러내리다 보면 책상에 엎드려서 결국 눈이 가는 곳은 교과서인데 그렇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글자들이 이루는 의미보다 글자의 존재 자체가 또렷하다는 것이 자극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종이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종이가 빳빳하고 밋밋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구멍 같은 주름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부러 압축을 해서 편평하게 만든 것이라는 느낌. 하지만 갱지 같은 섬유의 느낌은 아니고, 단지 더 얇은 종이를 구겨서 압축해 조금 더 두껍게 만든 것 같다는 것에 가까웠다. 거기에 글자가 올라가 있는데, 종이 질감에 따라 글자가 변하지 않는 점이 신기했다. 종이가 움푹 파인 곳이라고 해도 글자를 위아래 아무리 돌려 보아도 글자는 종이의 표면에 얹은 것이어서 글자의 그 부분도 푹 들어가 있어야 할 텐데 실제로는 그런 느낌 들지 않았다. 그것은 종이가 패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우리 눈에 과장되어 보여서였을 수도 있고 글자의 색이 너무 진해서 알아보기 힘든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종이에 스며들어 있거나 하는 게 아니라 별도로 얹어져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교과서의 그림을 보면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가운데에 점이 있는 동그라미가 모여서 사진이든 그림이든 표시하고 있었다. 진한 곳은 동그라미가 더 진한 색이었고 옅은 곳은 동그라미가 옅은 색이었다. 멀리서 보면 그냥 그림이나 사진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원으로 분해가 된다는 것이 당시에는 신기했다. 나중에 고등학교에 가서는 그러한 기법이 점묘법이라는, 서양 미술사의 하나의 기술적인 요소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점묘법이라는 단어를 내가 보아온 그것에 연결시키는 데에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고등학교 때에는 집에 레이저프린터가 생겼다. 동사무소에서 컴퓨터 교실에 다니시던 어머니께서 가끔 엑셀 연습을 한다고 프린트를 하고는 하셨는데, 그 인쇄물이 꽤나 신기했다. 흑백 프린터였는데, 손톱으로 부드럽게 긁어보면 토너가 붙은 곳이 가볍게 느껴졌다. 어느 날은 컴퓨터로 외워야 할 단어들을 잔뜩 프린트해서 공부를 하다가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당시 레이저프린터 기술 때문이었는지, 글자가 꽤 두꺼워 보였다. 표의 줄도 또한 굉장히 가는 줄이었는데, 그 가늘기와 토너의 두께가 비슷한 것 같았다. 손톱을 대 보니 가볍게 느껴졌고, 자세히 들여다보자 명조체의 가장자리에서 둥근 처리를 하면서 픽셀 모양으로 계단이 진 것과, 종이에서 약간 두껍게 올라와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그 글자 모양으로 아주 얇은 간판을 만들어서 글자를 붙인 것만 같았다. 지금 같으면 3D프린팅을 한 것 같았다고 하겠지만 당시에는 그 모양과 비교할 만한 것들이 자모를 따로따로 만들어 형광등이 있는 판때기에 붙인 형태의 간판밖에는 없었다.
그 프린터로 그림을 뽑으면 속이 꽉 찬 원이 모여서 그림을 이루었다. 색이 흐리면 그 원의 크기가 줄어든다. 색을 표시하지 않는 흑백 인쇄물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사진을 출력하면 그런 모습이 더 두드러졌다. 비행기 사진을 인터넷으로 다운로드하여서 출력을 하고 보니 어디서 많이 본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교과서는 아니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신문의 흑백사진도 비슷한 느낌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었다.
질감을 들여다보는 일은 지금도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문서를 컴퓨터로 작성하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자제하는 편이다. 모니터는 보아야 해서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하지만 책을 읽을 때는 가끔 집중이 되지 않을 때 보통 책 밖의 어느 곳, 특히 창밖을 쳐다보지만 때때로 책 안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페소아의 산문을 읽거나 수학에 대한 책을 읽을 때는 특히 그렇다. 그럴 때는 글자를 아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곤 한다.
최근에 나온 제품은 아니지만 중국에서 나온, 복수의 렌즈를 사용해서 단순히 돋보기로 보는 것보다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제품이 있는데 그 제품을 사용해서 들여다보면 요즘 책도 가끔 글자가 두꺼운(획이 굵은 게 아니라 정말 종이에서부터의 두께) 책이 가끔 있다. 그렇게까지 들여다보는 건 사실 어떤 물건을 꺼내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글을 쓰든 책을 읽든 한동안 그만하고 놀겠다는 뜻이기는 하다. 몸이 흘러내려서 잠시 눈 가는 대로 쳐다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하지만 재미가 있는 걸.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그 시간 동안 글자를 이루고 있는 물질들은 그 자리를 정확히 지키고 있다. 종이의 질감도, 글자들의 표면도 모두 굳건하다. 약하기 그지없는 종이에 인쇄되어 있는 무늬에 불과한, 게다가 다른 글자들과 함께 그 종이에 있는 글자들 관계가 있어야만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글자들이지만 그들이 물질적인 공간에서 차지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3차원의 안정감이다. 원자 단위에서는 쉴 새 없이 전자들의 중첩이 일어나고 있다거나 하는 일들은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단지 그들이 내가 바라본 동안 그 자리에 있었고, 내가 들여다보기 전에도 있었으며, 내가 들여다보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자리에 계속해서 있을 거라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바라본 그 순간에 비하면 영원의 기간 동안 그 글자들이 살아남아 의미를 전해줄 것이라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그 시간이 짧을수록 그 시간을 위해 기다려왔고, 그 시간 이후 머무 시간은 그 시간에 비하면 영원이 된다. 읽히지 않은 책은 무한대의 기간을 기다림의 시간으로 차지하게 될 것이다. 역사상 가장 많이 인쇄되고 가장 많이 읽혔다는 성경은 읽힌 기간에 비해 몇 배의 시간을 더 세상을 바라보고 있게 될까? 그런 점에서 읽히지 않을 글을 쓰더라도 전혀 글에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영원의 시간을 선물로 주는 것뿐이다. 읽힘으로써 생명을 가질지 읽히지 않음으로써 영원을 가질지, 두 가지 모두를 가질 수 있는 책은 없을 것이다. 한 번쯤 읽히고 영원히 꿈꾸는 책은 어떨까? 그러나 한 번쯤 읽히는 것은 책이 만들어지면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영원을 꿈꾸며 글자를 들여다보고 종이를 들여다보다. 책이라는 물질적인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그 물체를 펼쳐 해석해야 할 수많은 의미들에게 나만의 의미를 덧붙일 수 있었다. 나의 책에도 그렇게 해 줄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글을 쓰는 자보다는 읽는 자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리고 이럴 때마다 드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 '영원의 관점에서' 나는 글을 써도 되는 사람일까? 아니라는 결론이 나더라도 계속 써 나가겠지만. 그러니까, 이런 고민은 어차피 책은 문장을 읽고 의미만 빼먹는 행위이지만 그럼에도 한 번 글자 하나하나를 물리적으로 들여다보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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