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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11. 2024

에너지가 바닥나면

한때는 퇴근하고 맥주 한 캔 따면서 "오늘도 보람 있는 하루였다"라고 외쳤을 만한, 회사에서 진이 빠지도록 열심히 일을 한 날은 더 이상 뿌듯하지 않다. 요즘 유행하는 "너무 열심히 살았다"는 걸 반복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럴 때면 뭔가 삶 전체가 일에 집중된 느낌, 무엇보다 톱니바퀴가 된 느낌이 들어서이다. 열심히 일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나 자신을 잃어버릴 만큼, 온 에너지를 쏟아붓고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라고 해 보았자 그저 회사 입장에서는 그날그날 일어나는 일에 물 한 방울 정도 떨어뜨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획기적인 뭔가를 할 수 없는 내 능력의 한계가 문제라고 지적한다면 그것도 받아들이겠다.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날아다니라고 받는 연봉도 아니고 바로 전에 말했듯이 진이 빠졌는데도 회사에는 그다지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도 않은 느낌이라면 허무함도 약간은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어렸을 때는 진이 빠지면 쉬면 되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공원을 걷거나 공연 동영상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어디든 몰입을 하고 나면 모두 회복이 되는 느낌이었다. 회사에서 뿌듯하게 일하고 집에 와서도 보람 있게 휴식을 취하는 느낌. 그때는 그것이 쳇바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는 나름 쌓여 간 기술도 있고 경력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뭔가 일이 있으면 나를 찾는 곳도 여기저기 있기 때문에 회사 일을 잘못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럼에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지금 이 정도 경력은 쌓을 수 있지 않았을까, 왜 진이 빠진다는 느낌이 들어도 당연하게 생각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회사에서 에너지를 바닥까지 끌어다 썼다는 느낌은, 예전는 단지 느낌에 불과한 것이었다. 책을 읽는데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거나 음악을 들어도 귀가 즐겁다는 것을 딱히 모르겠다, 또는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특별히 호기심이 생기는 분야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음악만 틀어 놓고 바닥에 누워 있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을 생각이 드는 신호였다.
그런 점에서 수동적인 활동보다 적극적인 활동이 나 자신에게 좋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는 것도 이 지점이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것으로 만족할 때는 배가 고프거나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관심이 분산되는 것과 몸이 집중을 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 하기 싫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 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직도 한참 소극적인 활동이라도 에게는 지극히 능동적인 그 일에 착수하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해낼 힘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갈 수 있는 거리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오늘처럼 있는 대로 신경을 쓰고 돌아다닌 날은 집에 와서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그저 의무감에 머물고 회사에서도 글을 써야겠다는 메모 하나 남기기 힘들다. 글로 연결될 만한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은 건 아닐 거다. 그런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이 1초도 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메모를 하지 않은 건 글과 관련된 생각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나를 집어넣고 그 틈새에 순간적으로 나를 담갔다 꺼내고 나면 한동안 나는 그 틈의 모양을 그대로 가지고 있게 된다. 나 자신이 아닌 내가 나 자신이 써야 하는 글에 대해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퇴근하고 나면 지친 상태라는 것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지쳤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하는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 직접 그 시기를 지나온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당시는 삭막한 줄을 모른다. 지나고 나면 그때 뭔가를 더 할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선배들은 술 마시고 노래방 가서 노는 걸 나이 들면 왜 안 했지, 싶을 거라고 했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다. 나는 밖에서 돌아다니기만 하면 괜찮지만 사람들과 마주치면 에너지가 마구 떨어지는 사람이니까.
오늘도 집에 와서 고무줄처럼 늘어져 있다가 잠시 페소아의 책을 위로받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다섯 페이지 정도 읽었다. 그의 글을 읽으면 마취가 되는 느낌이다. 어딘가 통증을 잊게 만드는 그런 마취가 아니라 잠시 잠에 들었던 것 같은, 그런 전신 마취의 느낌이다. 꿈이든 어디든 다녀온 듯한, 회사에서의 피로가 갑자기 10% 정도라도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주섬주섬 일어나니 이런 느낌조차, 아주 힘없는 글이 되겠지만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를 찾아서 글을 쓰고 글을 통해 내 안에 있는 내가 조금이라도 밖을 내다보고 스스로를 내보이기를 바라지만 내 안의 내가 지친 나를 보고 오히려 세상에 겁을 내게 되더라도, 그것 역시 일종의 세상의 민낯이기에 나름대로 필요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경제건 법이건 결국은 사람들이 얽힌 것들이다. 내가 하는 일 역시 컴퓨터를 가지고 하는 일이지만 회사라는, 사람들의 조직이 필로 하는 일이다.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면 지치는 내가 사람이 만든 조직에 하루 종일 있으면서 전혀 지치지 않는 건 그냥 그날이 운 좋은 날이었다는 뜻일 뿐이다. 그러니 그냥 내 삶의 배경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계속해서 나의 글을 써 나갈 길만 궁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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