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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07. 2024

훨훨 날아가서 태워져 버림

글을 쓰려고 했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무언가가 머릿속을 지나갔는데 마침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중이어서 따로 메모할 것 없이 바로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금요일이고 해서 딸아이가 편의점에 가자고 한다. 아내가 편의점에 가게 되면 나간 김에 이것저것 사 오라고 주문을 한다. 낮에 비가 조금만 내려서 습기가 많았는데 저녁이 되어 기온이 내려가니 많이 괜찮아졌다. 집안도 그러니 바깥의 밤공기는 꽤나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외출을 하기로 했다.
이마트 24에 가서 과자와 이것저것 고른 후 맥주도 살까 하는 고민을 살짝 했지만 처음 계획했던 것들만 얼른 장바구니에 았다. 계산대에 가서 신용카드 리더기에 체크카드를 꽂고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수고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그때까지도 간신히 글을 쓸 주제를 붙들고 있었다.
한순간이었다. 정말, 순간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와서 등 뒤로 대문이 닫는 소리를 들은 그 순간, 무엇에 대해 쓰려고 한 것인지가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건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 아니다. 연기가 그렇게 오랫동안 남아 있다가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를 놀리듯 인격체인 생각이 따라오는 척하다가 도망가 버린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뭘까. 한 손에 물건을 들고 다른 손으로 대문을 열었는데 사실 생각은 내가 손으로 들고 있었던 걸까? 그렇기에는 한 손에는 계속 장바구니가 있었으니 집에서 나서는 순간부터 한 손은 없었고 다른 한 손으로 대문을 열고 편의점 문을 열고 물건을 집었으니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생각은 야생동물이어서 무언가 쓸 생각을 하고 나서 바로 글을 쓸 것이 아니라면 글자라는 미로 속에 봉인하는 부적처럼 메모에 가두어 두었어야 할까? 정식으로 글을 쓰거나 메모를 남기거나 어쨌든 글자 안에 의미의 형태로 가두는 것이니까. 단, 메모를 잃어버리면 다시 찾을 길도 요원하다.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메모에 생각을 가두어 놓았다면, 그 메모를 다시는 읽어 볼 기회가 없다면 그 생각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데이터의 형태라서 상관이 없는 것일까? 어차피 살아나는 것은 내가 읽을 때뿐이 아닌가? 비디오 파일은 비디오 코덱을 이용해서 플레이를 할 때에만 그 분자의 배열이 의미하는 영상이 재생된다. 하지만 비디오 파일 자체가 재생되는 영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굳이 재생을 하지 않다고 해서 파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파일의 존재가 영상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파일을 지우지 않는 이상은 언제든지 비디오를 재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파일을 USB 저장공간에 복사해 두었는데 그 저장공간이 잘못해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고, 다음 날 인천 쓰레기 매립지에 버려졌다면 비디오 파일은 존재하는 것일까? 혹은 소각장에 버려져 태워져 버렸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은 집안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 파일은 재생되지 않는 상태이지 사라진 것은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그 파일은 존재는 하는 것일까? 저장공간 속의 파일은 머릿속의 생각과 비슷한 면이 있다. 머릿속의 생각은 나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다. 저장공간 속의 파일 역시 컴퓨터에 꽂아서 재생하기 전에는 그저 반도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 메모로 남긴 아이디어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용을 해석하고 그것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게 한다. 길지 않은 시간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에 달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목만 남아 있다는 저서의 내용이라면 철학과 교수의 머리에는 마치 몸을 휘감는 채찍처럼 고통스럽게 새겨지겠지만 초등학생이 읽는다면 포맷해서 다시 쓸 수 있는 외장 메모리에 불과할 것이다.
잃어버린 아이디어는 이미 소각장에 가서 타 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서로에게 좋다. 그 아이디어에게도, 그렇지 않으면 기억해 내려 계속해서 애를 쓸 나 자신에게도. 지나간 것은 보내 줄 줄 알아야 한다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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