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p L Jul 22. 2024

컴퓨터로의 이동

내가 글을 처음 쓰게 된 계기가 책에 메모를 하면서부터 책을 읽으면서 나오는 생각들도 기록하고 남기고 싶어 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런 만큼 나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표시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손글씨가 당연한 일이었다. 책의 여백에 메모를 하든 노트에 생각을 적든 손글씨가 주가 되었고, 나중에 다시 훑어볼 때도 노트의 종이를 넘기는 그 느낌 또한 책을 읽을 때와 비슷한 점이 좋았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큰 한계가 있었다. 책에 메모를 하는 일은 지금도 똑같이 하고 있으니 관계가 없지만 노트에 글을 쓸 때는 큰 문제였다. 글을 어느 정도 쓰다 보면 손이 아픈 것이다. 노트에 쓰는 글은 나중에 다시 읽으려는 목적이 있는 글이기 때문에 공부를 할 때처럼 흘려 쓰거나 마구잡이로 쓸 수가 없었다. 당연히 조금이라도 또박또박 쓰려고 노력했고 한두 번은 글씨체도 바꾸어 보려고 노력했었다. 지금은 명조체스러운 글씨보다는 훈민정음에 쓰여 있는 것처럼 각에 꽉 채운 그런 글씨가 나중에 읽기도 편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보통 책 여백에 메모할 때는 그런 글씨체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글감 노트는 흘려서 재빨리 쓰고 넘어가려고 한다. 글이 길어지면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아파오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글을 쓰는 내용과는 관계가 없지만 점차 가면서 손으로 신경을 쓰다 보면 생각이 멈추어 버리고는 했다. 어떻게 버티며 계속해서 글을 쓴다 해도 나중에는 내가 급하게 마무리를 해버리기도 했다. 생각을 따라간다는 그 행위가 글을 쓰는 즐거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물리적으로 펜을 오래 잡기가 힘들어서라는 별것도 아닌 것 같은 문제로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억울함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다른 도구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핸드폰으로 글쓰기


핸드폰으로 글을 쓰는 일은 상당히 오래된 일이다. 2010년부터 문학동네 카페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딸이 태어나면서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고 글을 읽기만 했었지만, 한참 활동할 때는 아이폰으로 글을 쓰고는 했다. 컴퓨터보다 핸드폰이 글을 쓰거나 읽기에 더 편하다는 생각을 지금은 많이 하지만 그때는 글을 올리고 사람들이 오자 지적을 해줄 감사하다고 하면서 '핸드폰으로 썼더니 실수가 많네요'같은 말을 하면 정말 핸드폰으로 작성한 거냐고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이고는 했다. 아마 천지인 키보드를 사용했다면 긴 글은 쓰지 못했겠지만 아이폰을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쿼티 키보드를 사용했기 때문에 긴 글을 쓰더라도 쉽게 피로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손글씨가 일부 메모를 제외하고는 별로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가장 먼저 관심 있게 본 매체도 핸드폰이었다. 그중에서도 메모장 앱을 가장 먼저 확인해 보았는데, 생각보다 파일 하나당 쓸 수 있는 글자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편 한 편으로는 그리 많지 않지만 내가 쓰려고 했던 것은 손글씨를 단지 종이 대신 다른 것을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기 때문에 파일 하나노트 한 권이 되는, 그렇게 날짜만으로 구분된 매일의 기록이었다. 그래서 구글 킵 사용할 수 없었고 핸드폰에서 일상적인 글을 작성하더라도 컴퓨터에서 나중에 PDF로 변환을 해서 보관할 것이기 때문에, 혹시 구글 문서 기능을 사용할 수 있을까 했지만 그것으로는 글을 쓸 상황이 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페이지 수가 넘어가니 핸드폰에서 아예 파일을 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사 시기와 맞물리면서 글을 컴퓨터로도 쓰고 핸드폰으로도 되는 대로 작성한 후 저녁에 집에서 워드 파일로 복사해서 붙여 넣는 수작업이 이어졌다. 그때까지는 글을 앞으로 많이 쓰고 싶다는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고 단순히 내가 생각만으로 써낸 글들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정도의 막연한 의지로 이것저것 테스트한 것이었다. 십여 년 전 에버노트와 원노트를 사용해 보았지만 둘 다 그다지 좋지 않게 끝났었다. 원노트는 한글로 작성한다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받침이 외국 소프트웨어에서 흔히 나는 오류로 인해 사라지거나 하나 더 생기거나 하면서 저장이 되는 것인데, 실제로 십여 년 전에 아이폰에서 보던 증상이 지금 안드로이드에서 똑같이 생기는 것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잘못 사용한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런 방법을 적용해 보면서까지 사용할 생각은 없기 때문에 어차피 쓰지 않는다는 결정은 똑같다. 에버노트는 어차피 접속할 만한 도구가 핸드폰과 컴퓨터 둘 뿐인데 너무 세 개의 장비까지밖에 동기화할 수 없다는 것만 강조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들었고, 가끔 로그인 시도에 대한 메일이 날아오는 것도 불안해서 오래전에 사용하지 않기로 했었다.
그즈음해서 갤럭시 폴드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블루투스 키보드를 사용하면 핸드폰에서도 컴퓨터처럼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문에 계속해서 핸드폰으로 글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고민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구글 문서에 작성을 하고 집에 와서 그 내용을 워드 파일에 복사한 후 구글 문서에 작성된 내용을 지워버리는 방식(잘라내기 후 붙여 넣기)을 사용해서 핸드폰에서 구글 문서를 열었을 때는 버벅거리지 않게 했다. 그렇게 한달 동안 사용했던 것 같다. 불편하기는 했지만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워드 파일도 구글 드라이브와 동기화되는 폴더에 넣어 두었기 때문에 꼭 읽고 싶으면 핸드폰으로도 읽을 수는 있었고 일주일 정도는 글이 쌓여도 구글 문서가 크게 버벅거리지 않았기 때문에 편하지는 않아도 상태 유지는 가능했다. 그렇지만 곧 파일이 커지면 워드 파일도 열 때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저장하는 최종 파일을 텍스트 파일로 확장자를 변경했다. 용량도 꽤 많이 줄었고 파일을 열 때도 바로바로 열렸다. 그때부터 일 년 동안은 핸드폰에서 구글 문서를 열어 날짜를 쓰고 글을 작성했다. 같은 날이면 'ㅇ(이응)'으로 표시하고 글을 쓴다. 핸드폰에 화상 키보드로 글을 쓸 때도 있고 블루투스 키보드를 놓고 글을 쓸 때도 있었지만 딱히 손이 아프지 않기 때문에 긴 글이나 짧은 글로 구분할 수는 없었다. 집에서 글을 쓰게 되면 해당 텍스트 문서를 직접 열어서 글을 썼다. 일주일에 한 번씩 파일을 복사해서 사본을 만들어 두었다. 완전 수작업으로 된 동기화 및 백업 방법이지만 단순히 문서 파일 하나를 관리하는 것뿐이어서 딱히 문제는 없었다. 그 파일은 늘 구글 드라이브에 백업이 되어 있어 컴퓨터가 고장이 나더라도 파일은 안전했다.

동기화


글을 어디서나 쓸 수 있으면서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결국 메인 저장소가 있어야 했다. 메인 저장소가 없다면 클라우드 저장소라도 있어야 했다. 처음 생각났던 것은 깃허브였다. 그렇지만 소스 파일 같은 것도 아닌 단순한 문서 파일을 거기에 저장한다는 게 조금 이상했다. 그래서 구글 드라이브와 원드라이브에 동시에 같은 폴더를 지정해서 양쪽으로 백업을 했다. 그러면 백업의 기능도 하면서 밖에서도 얼마든지 작성하거나 읽을 수 있게 된다. 기술적인 고민이어서 앞으로도 그다지 신경을 많이 쓰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실제로 글을 쓰기에 불편해지는 것도 싫고 복잡한 절차가 생기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글이 날아가는 것도 싫고 나중에 계속해서 글을 옮겨야 하는 것도 싫으니 움짝달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컴퓨터에 있는 파일을 수정하려고 하는 것이니 온라인에 글을 쓰면 다 해결되는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생각을 했다고 바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메인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해진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글쓰기 프로그램


키보드로 글을 쓴다는 것은 소프트웨어에 글자를 입력해 준다는 뜻이다. 쿼티 온스크린 키보드든 하드웨어 키보드든 마찬가지이다. 글을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다면 키보드 입력을 하더라도 컴퓨터 입장에서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닌, 명령어 혹은 검색어가 들어오는 것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 만큼 키보드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를 나에게 맞는 것으로 잘 선택해야 한다.
처음에 메모장이나 구글 문서 앱을 사용했지만 나는 체크박스나 꾸미기 기능이 필요한 게 아니라 단순히 글 작성할 것이기 때문에 전혀 필요가 없는 기능으로 가득한 셈이었다. 또 컴퓨터를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혹은 집에서 글을 쓴다면 컴퓨터로 글을 쓰기 때문에 반드시 핸드폰에서만 읽을 수 있는 소프트웨어여 안 되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Pure Writer'였다. 아이폰 용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안드로이드용은 꽤 사용하기 괜찮았다. 집에서 ip 주소 등을 넣어야 하는 절차가 있기는 했어도 동기화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컴퓨터가 메인이고, 대신 파일이 저장된 폴더를 구글 드라이브로 연결을 했다. 밖에서는 핸드폰에서 해당 앱을 열어서 책과 노트를 선택해 글을 쓴다. 여기까지는 에버노트와 비슷하다. 자체적인 백업 기능이 있기는 한데, 전용 확장자가 있어서 그 확장자 안에 모든 노트들이 들어 있는 방식이라 반드시 Pure Writer' 앱에서만 열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기능이 핸드폰 중심이었다. 그래서 컴퓨터에서 문서를 작성할 때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로 'FocusWriter'를 설치했다. 그러니까, 핸드폰용 'Pure Writer'와 컴퓨터용 'FocusWriter'를 함께 사용한 것이었다. 핸드폰으로도 얼마든지 글을 쓰고 한 번씩 동기화해서 해당 내용을 복사해서 'FocusWriter'에 옮겼다. 'FocusWriter'의 장점은 메인 파일의 확장자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것이어서 그대로 텍스트 파일로 저장하도록 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점은 화면의 일부만 글쓰기에 사용할 수 있도록 글쓰기 창의 폭과 높이를 정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었다. 글을 쓰는 물리적인 화면의 폭이 좁아지면 글쓰기에 더 집중이 되는 효과가 있다. 글자 크기를 줄이지 않고도 화면을 가운데만 좁게 사용할 수 있게 되니 글을 쓸 때는 내 생각에만 빠져들 수 있었다. 핸드폰으로 쓸 때는 화면이 세로로 된 상태에서 글을 쓰기 때문에 느끼지 못했던 차이였다. 아마 가로로 변경하고 글을 썼다면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키보드로 글을 쓴다는 것의 한계


글씨를 흘려 쓰지 않는 것은 단순히 나중에 다시 읽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글씨를 흘려 쓴다는 것은 문장을 빨리 끝내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글씨를 아예 못쓰는 사람이라면 굳이 빨리 쓰지 않아도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내 글씨는 그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또박또박 쓰면 글씨를 쓰는 속도가 느려진다. 생각의 속도에 맞추어 생각이 다음 생각으로 넘어가는 그 시점에 맞추어 문장이 나아가면 문장의 속도에 생각의 속도가 동기화되는 효과처럼 보이면서도 다시 생각의 속도에 맞추어 글을 쓰는 속도도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는 변화도 분명 있다. 무엇이 먼저냐 하는 것이 수수께끼인 상황은 우리 인생에 너무나 많아서 지금 와서 답을 찾으려 하는 것이 의미가 없듯이 생각이 먼저인지 문장이 먼저인지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없다. 내 생각의 흐름에 글의 문장이 속도를 맞추어야 하는 거냐, 문장의 속도가 적당하다면 생각이 수세미 덩굴이 줄을 잡고 담을 오르듯이 생각도 문장을 붙들고 할 수 있는 만큼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냐는 알 수 없지만, 글을 쓰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거나 느리면 생각이 미끄러져버리고 그 자리에서 놓치거나 생각이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키보드로 글을 쓸 때도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너무 느려서, 혹은 생각하는 속도를 맞추지 않아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문장을 쓰는 속도가 빨라서 생각이 끊겼다. 그래서 그때 작성한 글들을 보면 많아야 대여섯 줄을 넘기지 못한다. 손글씨를 쓸 때도 흘려 쓰면서 글씨를 쓰는 속도가 빨라져서 글을 더 이상 쓰지 못한 경우들이 있기는 했지만 키보드를 주력으로 사용하게 되면서처럼 수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것도 핸드폰에서 화상 키보드를 사용할 때는 그래도 덜했지만 하드웨어 키보드로 회사에서 문서 작성할 때처럼 쓰면 바로 머릿속이 검게 변하면서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 하도 반복되어 이제는 친근하게 느껴질 지경이 되었다. 그렇지만 키보드로는 그렇게밖에 써 보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키보드라는 것이 글을 편하게 쓰려고 개발된 것이니 편하고 빠르게 쓴다고 문제가 생기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렇지만 내 머리가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일 아니니 신경 써서 천천히 글을 써 보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볼펜에서 만년필로, 만년필에서 컴퓨터로 주로 글을 쓰는 도구가 이동하면서부터는 글을 쓰는 내용에 대한 고민은 확실히 덜해졌다. 아마 글을 쓴다는 사실에 나에게 특별한 쾌감을 주거나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은, 혹은 어려운 일을 하는 것 같은 의미를 부여할 일이 없어질 만큼 익숙하게 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생기면 단순히 있는 그대로 써 내려가기만 할 뿐, 이것도 글로 쓸 만한 것인지 같은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사실 이것이 모든 글쓰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아닌데 불구하고 내가 지금 글로 쓰려는 것이 정말 써도 되는 주제인지 같은 것을 고민하면 결국 쓸 수 있는 문장은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면 내 문장의 특징을 세우는 일 같은 것은 저 멀리서 끝없이 기다리기만 하게 될 뿐이다. 내 문장의 눈에 내가 고도로 보일만큼. 하릴없이.
그리고 도구가 변하는 만큼 글쓰기에 투자하는 시간도 확실히 많아졌다. 누구나 변화를 꾀할 수는 있지만 오직 자연스러운 변화만이 가장 최적의 변화일 것이다. 특히 습관의 문제에서는 요요라는 단어도 존재하듯이, 눈에 보이는 반작용이 생기지 않을 만큼의 부드러운 움직임이 필수이다. 그렇지만 할 수 있다면, 청각이든 촉각이든 우리의 감각을 간질여줄 수 있는 굵은 펜이나 만년필이 부드럽기만 한 볼펜보다 좋고, 굵은 펜이나 만년필보다 컴퓨터나 핸드폰에 키보드로 치는 것이 낫다. 감각을 어떤 식으로 자극하느냐에 따라 생각을 억누를 수도 있고 증폭할 수도 있다는 것은 글을 쓰면서 처음 배운 사실이다. 생각을 억누른다는 것은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거나 심지어 그 생각을 도중에 끊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생각을 증폭한다는 것은, 그 문장을 글로 옮길 때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각이 증폭되는 가장 큰 예는 고민이 있어 거기에 대한 생각만 계속 반복하게 되는 때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생각들을 가만히 들여다볼 여유가 있다면 굳이 그렇게 생각을 반복하지 않아도 그 생각이 이미 감정적으로 굵직하기 때문에 반복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 증폭되면 부담 없이 써 내려갈 수 있다. 머릿속에 형태는 없지만 생생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만년필이 최의 자리를 놓지 않았다.
사실, 만년필도 너무 빠르게 쓰거나 흥분해서 눌러서 쓰게 되면 고장 나기 십상이다. 아니, 생각보다 고장이 잘 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마치 글을 쓰다가 고장을 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조심하게 된다. 유튜브에 보면 만년필도 촉을 꼭꼭 눌러가면서 쓰는 영상을 볼 수 있다. 내 만년필도 글을 쓰다가 흥분해서 신나게 눌러쓴다고 해서 곧바로 고장이 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나는 만년필이나 만년필 촉을 몇 개씩 사다 놓고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볼펜으로  글을 나중에 읽을 때면 글의 굵기가 중간에 바뀌는 것을 항상 불편하게 생각했는데 심지어 만년필로 쓰다가 촉이 고장 나서 갑자기 일반 볼펜으로 쓰게 되어 글씨가 확 바뀌는 것은 정말 보기 싫었다. 그러다 보니 만년필로 주의를 기울여 글을 쓰면 생각의 속도와 보조를 잘 맞추게 된 것 같다.
키보드를 용하게 되면서 문장 하나를 드르르륵하듯이 써버리고 나면 멍하게 다음 문장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종종 생긴다. 하지만 저절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을 받아 적는 것과 내가 머리를 짜내어 스토리를 만들듯이 글을 는 것은 나중에 다시 읽어 보아도 차이가 크다. 뭔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흙밭을 걸어가는 것처럼 힘들게 읽히면 십중팔구 그런 지점이다. 아무리 어려운 내용도 생각의 흐름대로 쓴 글은 자연스럽고, 읽기에도 편안하다. 그래서 키보드로 글을 쓸 때는 일부러라도 천천히 글을 써서 생각의 흐름을 맞추려고 해야 한다. 지금도 핸드폰에 글을 쓸 때는, 그리고 컴퓨터로 글을 쓰더라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손글씨 쓰는 그런 속도는 아니다. 키보드로 글을 쓸 때는 키보드만의 그런 속도가 있다. 그런 속도로 글을 쓰다 보면 왠지 너무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속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소리별로 속도를 정해놓은 것만 같다. 옛날에 사놓았던 엘지의 롤리키보드는 키보드의 각 키와 전체적인 크기가 상당히 작고, 그에 반에 키와 키 사이의 간격은 그다지 좁지 않은 느낌이다. 그래서 보통 키보드를 치듯이 두드리면 오타가 수시로 나오기 때문에 키를 하나하나 누를 때마다 주의 깊게 확인하고 눌러야 한다. 의외로 이렇게 살짝 느린 속도로 치는 것이 꽤 도움이 되었다. 너무 느리지도 않으면서 너무 빠르지도 않은 속도라는 그 속도가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컴퓨터로 글을 쓸 때도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면 롤리 키보드를 꺼내곤 했다. 지금은 그럴 일이 거의 없기는 하지만 한동안 롤리키보드와 핸드폰의 조화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렇지만 기계 자체가 내가 키보드로 친 것을 받아들이는데 시간 지연이 있다면 어떨까? 키보드를 치는 대로 글자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글자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키보드를 치는 속도 자체가 느려질 것이다. 이 지점이 내가 글쓰기에만 온전히 집중하게 된, 더 이상 도구에 집착하지 않게 된 포인트이다.

이전 07화 만년필로 리듬을 찾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