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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l 15. 2024

만년필로 리듬을 찾다

볼펜이냐 샤프냐, 하는 문제는 단순히 손글씨냐 타자기냐 혹은 손글씨냐 키보드냐 하는 문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떤 방법이 더 낫다는 이야기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각자의 상황에서 가장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고르는 문제일 뿐이다. 게다가 그것은 '모두 맞다'라고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각자에게 맞는 답이 각각 있을 뿐, 모두 맞는 답인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그중 손글씨냐 키보드냐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는 나중에 다시 내용을 찾아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컴퓨터 파일로 된 글이 남아야 기 때문에 키보드를 선호하게 되었는데, 그런 필요성이 없었을 때는 손글씨가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쓸 수 있고, 그 수첩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내용이 모두 사라지는 일 따위는 없으니까. 손글씨의 장점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그중 내가 손글씨를 몇 년이고 고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충 몇 가지로 추릴 수 있다.
우선, 돈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장비에 대한 욕심이 생겨도 비싸야 일이 만 원짜리 볼펜과 샤프면 해결이 되었다. 한 가지 필기구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새로운 필기구를 보면 마치 더 잘 써질 것 같고 더 부드럽게 써질 것 같기도 하고, 분심도 덜 들 것 같은, 말 그대로 내 소유를 자극하는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필기구 욕심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수첩값과 그 필기구 값 정도만 감당하면 컴퓨터를 바꾸거나 기계식 키보드를 새로 사는 것보다는 훨씬 저렴하다. 필기구를 사모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그렇게 모아 가는 것, 그리고 그중 한두 개씩 다 써서 버리게 되는 상황들이 생각보다 심리적으로 제법 큰 만족감을 주는 것 같다.
둘째, 책을 읽는 행위와 굉장히 유사하다. 책을 읽는 것은 종이에 적힌 글자를 눈으로 읽어서 머릿속으로 문장을 다시 구성하고 머릿속에 재구축된 그 문장에서 의미를 뽑아내는 행위이다. 이메일을 작성해서 보내면 받은 사람의 컴퓨터에서 인터넷에 접속해 다시 전자신호를 사람이 읽을 수 있는 형태로 웹페이지에 펼쳐 놓는 그 과정이 신경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메일에서 예를 들었듯이, 글이 적히고 다시 해석되는 그 과정이 책을 읽을 때는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작가가 생각한 무언가가 의미 단위로 분리가 되고 그 의미들이 문장의 형태를 갖춘 후 글자로 책에 기록된다. 우리는 다시 글자를 읽고 문장의 형태로 해석을 한 후 의미를 추측해 낸다. 거울을 갖다 댄 것 같은, 작가가 글을 쓰고 우리가 읽는 행위  에서 우리는 보통 읽는 편에서 있게 된다. 보통 작가가 글을 쓰는 그쪽의 거울 속은 들어가 볼 일이 없다. 그런데 수첩에라도 뭔가를 적는다는 행위는 우리가 가끔 그 거울 반대편에 가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거기서 쓴 글을 우리가 다시 읽으면서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문장을 고치거나 처음에 기록하고 싶었던 이미지가 없어서 고민을 하는 과정이 우리가 글을 읽을 때 똑같이 반영이 되어 그 책을 쓰면서, 혹은 편집하면서 겪었을 고민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 글씨를 잘 쓸 수 있게 된다. 내가 초창기에 작성한 메모들을 보면 그 글들을 썼던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문장들도 제법 있다. 이제까지 쓴 글들을 다시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이후 글씨는 훨씬 나아졌다. 글을 컴퓨터로 쓰건 손으로 쓰건 손글씨로 메모를 남길 일은 반드시 생기게 되어 있다. 그런 경우 아무리 급하게, 짧게 남겨도 다시 읽을 때 지장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은 막연히 적는 것보다 나을 수밖에 없다. '다시 알아보게 적어 보았자 내 인생에는 그게 그거다'라고 생각한다면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겠지만 아무리 사라질 기록이라도 기록 자체의 의미를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알아보기 쉽게 쓰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넷째, 빨리 쓸 수 없다. 이것이 내가 손글씨를 고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나름대로의 결론을 짓고 다시 그 결론에서 시작해서 다른 생을 하고 또 다른 결론을 내는 과정들이 반복된다. 그래서 그 생각들을 따라가며 기록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론만 적어서는 나중에 모아 보면 그냥 평소 생각에 불과할 때가 많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생각이 때로 매우 논리적이지도 않은 점도 있기는 하지만 평소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것들이 튀어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뭔가 색다른 것을 적고 싶다면 그런 생각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손글씨를 쓴다고 손을 놀리다 보면 너무 흘려 쓰면 나중에 읽기 힘들어질 것을 감안하고 적당한 속도에 머물게 되는데 의외로 그게 생각이 흘러가는 속도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키보드를 쓰게 되면 타자로 입력하는 문장이 생각이 도달하기 전에 먼저 끝나서 기다리는 사이에 생각도 하얗게 멈추고 사라져 버리거나 혹은 그렇게 기다리느라 멍한 틈을 타서 혼자서 저 멀리 가버리는 때도 있다. 손도 멈추지 않고 생각도 멈추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기에는 손글씨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선물로 받은 만년필
고등학교 졸업 선물로 만년필을 받았다. 벌써 이십 년 전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사용하지 않고) 보관을 잘해서인지 그 검은색 파이롯트 만년필은 오랜만에 다시 더운물에 담그고 씻어서 사용하는데도 잘 나왔다. 중간에 고무로 된 부분이 있어서 걱정했지만 잉크가 새지도 않았다. 만년필을 다시 꺼낸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손글씨를 많이 쓰다 보면 필기구 욕심이 생긴다고 했는데, 그 말대로 그냥 써보고 싶어진 것이었다. 가는 심, 굵은 심 볼펜을 자꾸 하나씩 구입했는데, 그래도 다 써서 버리는 것이 나오지 않으면 사지 않으려고 했기에 열 자루 정도의 수량에 머무르긴 했지만, 그러다가 문득 '새로운 펜을 자꾸 사는데 가지고 있는 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 캐나다에 다녀와서 몇 개월 간 펜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때 펜글씨용 펠리컨 잉크를 구입하면서 만년필용 잉크도 한 병 사다 놓았는데 만년필도, 잉크도 사용하지 않고 처박아 둔 셈이라 이번 기회에 꺼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건 아니고, 외부 업체와 회의를 하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외부 업체 부장님이 수첩에 만년필로 메모를 할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가 자꾸 거슬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거슬리는 소리였지만 그것이 수첩의 종이와 만년필이 내는 소리라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글씨를 쓰는 데 일정한 리듬이 있어서 나도 그렇게 쓸 수 있으면 글이 조금 더 잘 써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주 주말에 책상 서랍을 뒤져서 만년필과 잉크를, 박스에 포장이 잘 되어 있는 채로 찾아내었다. 우선 세 시간 동안 만년필을 더운물에 담갔다 빼는 서 말리는 것을 반복했고, 일요일에 완전히 마른 만년필에 잉크를 채웠다. 그러고 나서 글씨를 써 보니 수첩의 종이가 얇아서 잉크가 번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또다시 마트에 가서 종이가 두툼해 보이는 수첩을 구입했다. 만년필을 사용한 계기는 이렇게 단순했다.

삼위일체
만년필로 글씨를 쓰면서 참으로 다양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생각의 속도에 맞추어 글을 쓰는 과정은 똑같았지만 서걱서걱 소리가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아마 시각적인 글자들은 생각을 하느라 어렴풋이 의식의 차원에만 남겨 두었던 듯 속도를 맞추는 것이 어려웠는데, 서걱서걱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서 생각의 속도도 어느 정도 글씨를 쓰는 속도와 비슷하게 맞추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단한 생각들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런 재미를 느끼려고 을 쓰게 되었구나'라는 생각 들 정도는 되었다. 글을 쓰는 일이 글을 발표해서 뭔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내가 스트레스를 푸는 일처럼 된 것이다. 어떤 취미든 프로의 수준으로 갈 수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행위가 만드는 모양과 내가 만드는 모양이 살짝 어긋난 차원을 넘어 일치되는 순간순간이 있어야 하는데, 보통 음악 연주에서 느끼게 된다는 그런 감각을 글을 쓰면서 느끼게 된 것이었다. 아마도 음악이라는 것이 있고 우리가 연주하는 음악은 그 음악이라는 개념에 최대한 일치시키려는, 그래서 우주선을 발사하듯 음악이라는 것과 최대한 가까이 올리려는 행위일 수 있다는 이미지와 유사하게 나 역시 내 글의 본체라는 것이 있어서 나는 글을 써서 내가 쓴 글이 '내 글'이라는 것과 최대한 가깝게 붙을 수 있기 위해 속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하게 되었다. '이상적인 내 글의 본체'라는 것이 세상의 속물적인 글보다도 못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상적인 내 글의 본체만큼은 잘 쓸 수 없고, 인생을 바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글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쉬지 않고 쓰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많이 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그렇게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쓰는 것인데, 글자의 모양과 생각과 소리의 세 가지가 그런 환경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만년필로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만년필의 조건
만년필을 쓰면서 잉크를 채우는 것이 저녁 일과의 마지막을 장식한다는 것은 정말 마음에 들었지만 그 밖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당연히 많이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그뿐, 그것 때문에 만년필을 쓰지 않기로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크게 의미가 있는 불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불만조차 없었다면 지금도 만년필을 사용하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기 때문에 되새겨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만년필을 쓰면서 가장 큰 불만은 잉크를 꼬박꼬박 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1회용 잉크도 물론 판매를 하고 있어서 가지고 다닐 만 하기는 하지만, 전날 잉크를 채우는 것은 꽤나 운치 있고 매력적인 일이다. 1회용 카트리지가 있다고 해서 잉크 채우는 일을 그만 두기에는 잉크를 채우는 행위 자체에 뭔가 다음날도 글을 쓰겠다는 각오 같은 것이 있어서인지 아쉬움이 컸다. 1회용 제품을 사용한다면 볼펜을 사용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볼펜을 사용하면 잉크를 채우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고 잉크가 마르지 않아 생기는 문제도 없기 때문에 굳이 만년필을 1회용 카트리지를 소비하면서 사용하는 것은 사서 고생하는 것과 같다는 론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1회용 카트리지를 두어 개 사서 가지고 다니기는 하지만 급할 때만 사용하고 웬만하면 잉크를 채워서 다니기로 했다.
그렇지만 사람 일이, 내가 글만 쓰는 사람이 아닌 이상은 술을 마시고 집에 늦게 들어와서 잉크를 채우지 못할 때도 있고, 평소 쓰던 분량보다 많이 쓰는 날도 있을 수밖에 없는데 '잉크가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십중팔구 잉크가 다 되어 쓰지 못한 나머지 글은 볼으로 우곤 했다. 그렇게 글씨 굵기 차이가 확 벌어지면 나중에 읽을 때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겠지만 쓸 때도 글로 쓰려던 것들이 상당 부분 다른 이야기로 바뀌어 버린다. 마치 만년필로 쓸 때와 볼펜으로 쓸 때 손의 감각에 따라 머릿속에서 생각이 흐르는 경로도 바뀌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 그때부터는 잉크가 다 되지 않아도 볼펜으로 쓰게 되었다.
1회용 카트리지가 있으니 급할 때 사용하면 좋겠지만, 그걸 바꾸어 끼운다고 기존에 사용하던 카트리지를 분리했다가 잉크가 여기저기 묻어서 고생을 한 번 하고 나서는 그냥 카트리지 두 개를 다 사용해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회사에서는 짬이 나면 그때그때 기록을 하곤 했는데 그날은 잠깐 글을 쓰려고 시간을 냈다가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며 카트리지를 씻는 데 시간을 다 써버렸다. 잉크를 하나 더 사서 회사에 놔두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때는 구세대의, 매너 없는 사람들이 많았을 때라, 책을 읽고 있어도 읽고 있는 책을 휙 뒤집어서 책 제목을 보겠다던 사람들 가운데에 있으면서 글 잠깐잠깐 쓰는 것만 재빨리 했는데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고 있었다면 무슨 말이 나왔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아마 지금은 시간도 많이 지났고 상식적으로 그런 정도까지는 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 손글씨를 썼다면 그런 방법을 사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잉크가 빨리 마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인터넷에서 본 대로 몰스킨 같은 형태의 얇지 않은 종이로 된 수첩을 사서 써 보니 많이 번지지도 않으면서 충분히 스며들어 제법 빨리 마른 것이었다. 글을 끝가지 쓰고 나서 바로 페이지를 넘겨 이어서 쓰더라도 몇 개 글자의 획 끝만 반대쪽에 찍힐 뿐이었다. 그 정도는 젤 볼펜을 사용할 때도 똑같았기 때문에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만년필을 계속 사용할 거라면 마음에 드는 수첩을 몇 개 미리 구입을 하고 모두 애국가 정도 되는 분량을 써 본 후 하나를 골라서 그다음부터는 그 제품만 반복해서 구매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서 쓸 때와 읽을 때 모두 불만이 없게 되면 나머지 수첩들도 초기 투자라고 생각하면 제법 만족스러운 결과가 될 것이다. 글을 쓸 때 만년필을 쓴다고 해도 간단한 메모를 남기는 글감 노트 정도의 용도라면 볼펜을 사용해도 충분하니 미리 사 본 수첩들을 소비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마지막은 글씨체가 너무 두꺼운 것이었다. 보통 만년필을 사면 F촉이 들어 있게 마련이다. 파이롯트 만년필도, 워터맨 만년필도 모두 글씨가 굵어서 문제가 많았다. 솔직히 잉크를 빨리 쓴 것도 글씨가 굵어서 같은 양을 쓰더라도 잉크를 한 번에 많이 사용하게 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잉크는 3차원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단순히 글씨가 굵은 건 2차원 평면상에서 글자를 이루는 검은 면이 넓은 것뿐이지만 실제로 잉크는 그 면적만큼 일정한 두께만큼 그 위로 고이게 되는데 다 마르고 나면 모르겠지만 막 획을 긋고 나서 들여다보면 눈으로도 잉크의 높이가 보인다. 그런데 같은 두께로 나온다고 해도 글씨를 가늘게 쓴다면 잉크의 양은 확 줄어들게 되어 있다. 만년필에 대해 잘 모를 때에는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사용했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쓴다면 오래 못 가겠다 싶어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EF촉이 조금 더 가늘다는 글이 있었다.
이미 만년필이 있는 상태라 새로운 촉을 위해 새로 사는 만년필을 비싼 것으로 고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시험 삼아하는 일이라 기존 만년필에 새로운 촉으로 교체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능할 것 같지만 알아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라미' 만년필을 EF촉으로 골라서 구입해 보았다. 요즘은 라미 만년필이 여기저기서 많이 눈에 띄는데 EF촉의 수요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사용해 본 결과, EF촉을 사용하면 확실히 잉크도 오래 쓰는 것 같고 무엇보다 글씨가 가늘어서 상당히 쓸데가 많다. 노트를 쓸 때 서걱거리는 느낌은 그대로이지만 글씨가 작아 조금 볼펜에 가깝게, 그러니까 원래 내 글씨대로 쓸 수 있어서 집중이 잘 되었고, 한두 권에 그치기는 했지만 조금만 신경을 쓰면 책에도 메모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만년필과 함께한 시간의 끝
사실, 이런저런 불편으로 인해 만년필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기는 했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이어서 모든 것은 선택과 습관의 문제일 뿐이다. 내가 만년필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만년필을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적도 없지만 앞으로도 만년필은 사용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은 이미 만년필 없는 글생활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년필은 몇 년 동안 더 사용했다.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리듬이 내가 생각을 할 때의 리듬과 굉장히 잘 맞았고, 한동안 그 리듬을 유지하면서 글을 쓰는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시도들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만년필을 사용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글을 쓰고 책과 글을 읽는 시간을 쪼개어 만년필로 쓴 글을 컴퓨터로 옮기는 시간을 따로 가졌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만년필을 포기하는 것도 일종의 시도였고 그것이 성공했기에 지금도 글을 쓸 수 있는 셈이다. 성공적으로 다른 매체로 이동하지 못했다면 여전히 만년필을 가지고 글을 썼거나, 혹은 지금은 글을 쓰지 않기로 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책에는 메모의 양을 늘리고 본문과의 차별성을 두어서 인쇄된 글씨체와 손글씨로 쓴 글씨체가 같을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해 0.28mm짜리 가느다란 볼펜을 사서 글씨를 쓰게 되면서 만년필은 오로지 노트에 글을 쓸 때에만 사용하게 되었다. 책에 메모를 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노트 또한 가느다란 촉을 쓰게 되면서 잉크도 한 번 채우면 이틀은 쓸 수 있었다. 그렇지만 노트에 만년필을 꽂아두고 만년필에서 잉크가 새지 않도록 노트를 반드시 세워서 가방에 보관해야 했기에 아무 데나 놓고 쓸 만한 글감노트도 다시 필요하게 되었다. 글감노트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어쩌다 보니 핸드폰 메모장이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건 과도기적으로 생각날 때마다 한두 개씩 임시로 입력하다 보니 습관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노트만이 만년필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고, 서걱서걱하는 소리와 그 소리를 내면서 만들어내는 만년필의 떨림 글을 쓰는 나에게 주는 상징 같은 선물이 되었다.
이렇게 노트만이 남은 상태에서 옛날에 쓴 글을 읽는 불편함이 문제가 되었다. 한때는 날짜를 쓰고 일기처럼 기록했다가, 어떤 때는 날짜 없이 기록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필기구가 바뀌면서 글씨체도 굵어졌다가 가늘어졌다를 반복했다. 그런 노트에서 어떤 내용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책을 읽듯이 처음부터 읽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이었지만 다시 읽어 보면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인 경우도 있을 만큼 기억에 없는 내용 많았다.
딱 이 지점이었다. 이사를 하면서 환경이 바뀌던 2022년 1월,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엘지에서 나온 휴대용 롤리 키보드를 사용해서 휴대폰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휴대폰에 글을 쓰고 집에 와서는 컴퓨터로 복사해서 워드 파일에 복사해서 붙여 넣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컴퓨터 파일로 글이 하나 둘 쌓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잠시 보관하려던 만년필은 다시 잠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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