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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l 08. 2024

볼펜, 사라지지 않음의 매력

내가 가지고 있는 름답게 금박으로 인쇄한 표지의 '푸른 숲' 출판사 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보면 첫 장인 '예술품으로서의 국가'의 제목 아래에 짤막한 메모가 있다. 샤프로 쓴,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을 문화의 총체라고 하면 그 문화 안에 들어간 것은 모두 예술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동의하지는 못할 부정적인 것들을 걷어내고 나서라도 국가라는 체계가 들어가지 않을 이유는 모르겠다.'라는 식의 글이었다. 그 메모를 시작으로 밑줄 대신 형광펜으로, 위아래 여백에 인터넷을 검색해서 나온 인물 자료와 생각 같은 것들이 깨알 같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이때는 HB 샤프심만 따로 구매해서 사용할 때여서 글는 하나도 번지지 않았고, 단지 형광펜의 색깔이 조금씩 변해서 연두색으로 칠해진 문장은 잘 보이지 않을 뿐인 그런 상태였다. 나중에도 작가들에 대한 부분을 종종 읽기 위해 펼쳐 보면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볼펜이 아닌 샤프로 적은 만큼, 거대한 예술작품에 작은 글씨로 새겨놓은 것처럼 대비가 되었다.

샤프를 사용했던 이유


처음 책에 메모를 할 때는 샤프를 사용했다. 연필 대신 샤프를 사용한 것은 단순히 편리해서였다. 연필은 번지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깎아 주어야 했지만 샤프는 손으로 돌려가면서 쓰기만 해도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책에 메모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첩에 쓰는 것이라면 연필이나 샤프나 크게 다르지 않다. 수첩에 글을 쓸 때 볼펜이 아닌 샤프를 사용한 것은 틀리면 고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볼펜으로 지워지지 않게 쓴다는 것은 지울 일이 없는 것을 새겨 놓는다는 뜻이다. 어차피 내 책이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책을 펼 때마다 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신경 쓰이지 않으려면 차라리 지우고 고칠 수 있는 샤프를 쓰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볼펜으로 넘어간 이유


샤프로 글을 쓰게 되면, 수첩에 샤프만으로 쓴 글을 읽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책에 메모를 했을 경우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책에 인쇄된 글자와 크기나 획의 색깔 면에서  너무 차이가 많이 나면 오히려 읽으려고 해도 잘 읽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글자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글자를 읽기 위해 얼마나 집중해야 하느냐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래서 핑크색으로 메모를 하고 나면 본문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회색이나 흐린 파란색, 샤프 등으로 쓴 것은 본문을 읽으면서 참고하기에는 메모가 눈에 한 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이는 건 똑같이 잘 보이는 상태에서 글자 크기 다르게 조정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책에 샤프로 메모하고 나중에 그 위에 볼펜으로 똑같이 쓴 다음 지우개로 싹 지웠다. 하지만 이것도 한두 번이지, 두세 권을 그렇게 하고 나서는 그냥 처음부터 볼펜으로 쓰기로 했다. 쓰면서 글가 틀리는 때가 없지는 않지만 그런 흔적 또한 남겨서 나쁠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모든 페이지에 메모를 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샤프의 낭만


샤프로 글을 쓰는 것은 학창 시절의 필기의 느낌이 난다. 쓰고 다시 지울 수 있다는 점은 당시 필기할 때는 유용했을지 모르나 메모를 할 때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볼펜으로 쓸 때 틀리면 글자를 *로 덮어서 표시를 하는데, 지우개가 없거나 글씨가 너무 작아서 그 글자만 골라서 지우기 힘들 때는 샤프로 써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등학교 시절 연필, 중학교 이후의 샤프는 그것들을 주 도구로 사용하던 기억과 유물과 같은 흔적 때문에 계속해서 쓰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중학교 때 구입한 샤프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데, 샤프를 손에 쥐면 그 샤프를 구입한, 학교 앞의 문방구가 아직도 기억난다. 한 이삼 주는 고민하다가 구입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내 필기가 연필에서 샤프로 완전히 넘어가던 시기였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은 샤프도 여러 가지 모양과 굵기로 나오지만 예전에는 0.5mm짜리 말고는 구하기 힘들었다. 최근 2mm짜리를 써 보니 연필 같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 여러 가지 종류가 나오지만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해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모양과 굵기 별로 내가 모르는 산업상의 용도가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수요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지금 필기를 연필로 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얇은 연필을 세 자루 가지고 있는데 아직 깎지는 않았지만 손에 쥐어 보면 글씨를 쓰는 재미가 있을 것 같은 모양이다. 심이 가는 연필이 아니라 납작하게 생긴 연필이다. 그런 연필을 쥐고 거친 종이로 된 수첩에 글씨를 쓰면 소리가 사각사각 날 것 같다. 그렇지만 글을 쓰는 것은 글자를 종이에 새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글씨를 쓰는 행위는 단지 그 과정일 뿐이다.
책에 남기는 메모도 한동안 샤프로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첩에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필기를 중학생 시절부터 대학교 다닐 때까지 샤프로 했기 때문에 글씨를 쓸 때 손이 아프지 않은, 익숙한 필기도구였기 때문이다. 지식 대신 내 생각을 써 내려간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건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도구를 통해 이제는 학교에서 주입한 지식이 아닌 내 머리에서 나온 문장들이 쓰인다는 기분 좋은 변화가 약간은 신선했다.

볼펜의 매력


반면 볼펜의 용도는 오히려 내 인생 안에서는 가장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대학 시절에도 리포트를 샤프로 작성한 후 그 위에 볼펜으로 다시 쓰거나 혹은 모두 완성한 다음 볼펜으로 옮겨 적고는 했다. 지금은 컴퓨터로 작성해서 프린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프린트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SK텔레콤에서 이십 대를 공략하기 위해 만든 TTL이라는 브랜드가 있었는데 여기저기에 TTL Zone이라는 곳이 있어서 멤버십 카드를 보여주고 몇 장씩 프린트를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컴퓨터도 도서관에 많이 있어서 USB 드라이버에 파일을 복사해서 TTL zone에 가져가곤 했는데, 후에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가 많아지면서 이메일로 보내기도 했지만 로그인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꺼리는 편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이렇게 복잡하게 프린트를 하느니 그 자리에 앉아서 손으로 작성하는 게 알아보기 힘든 글씨를 조금 조심해서 써야 하는 점만 제외하면 시간을 덜 들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끔은 필기도 볼펜으로 하는 일이 있기는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책을 옮겨 적는 것 외에는 대부분 샤프를 사용했던 것 같다.
그런데 볼펜으로 수첩에 글을 쓰다 보니 느낀 점이, 종이와 관계없이 비슷한 느낌으로 계속 글을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이었다. 아주 가는 심이 아닌 이상은, 종이가 거칠거나 부드럽거나 상관없이 글을 쓰는 감촉은 볼펜 그 자체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한 번은 수첩에 두 페이지에 걸쳐서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는데, 샤프를 썼다면 거친 표면에 계속해서 걸리기 때문에 시도도 해보지 않았을 일이었다. 나는 선을 계속해서 겹치는 형태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는 편인데, 보통 포스트잇 같은 곳에 낙서로만 하고 넘어가지만 볼펜으로 그림을 그려 보게 되면서 좀 더 편안하게 느끼게 된 것 같다.
잉크로 글을 쓰는 것은 뾰족한 끝으로 뭔가를 새긴다는 느낌이 들지만 글씨는 생각보다 많이 흐린 샤프 글씨와 정반대로, 지워지지 않는 뭔가를 남겨놓는 것인데도 칼로 새긴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종이와 운명을 함께하는 글씨인데도 뭔가 부드럽게 덮고 있는 것이, 마치 피와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종이 입장에서 보았을 때 샤프로 쓰는 글씨가 피부에 새기는 문신 같다거나 혹은 커다란 바위에 새긴 글자 같다면, 볼펜으로 글씨를 쓰면 그 글씨가 가진 의미를 그 종이가 온전히 떠맡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액체였던 잉크는 그 '의미를 가진 종이'의 혈관과 피가 되고 종이에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글씨와 그 의미와 종이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샤프로 글씨를 쓴 종이는 글씨를 지우개로 지우고 나면 뾰족하게 눌린 글씨의 흔적은 남지만 다른 의미를 다시 쓸 수 있는 빈 종이로 돌아가지만 볼펜으로 쓴 글은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볼펜으로 글씨를 쓰게 되면서 받은 느낌을 설명하자면, 성경에서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숨을 불어넣어 사람이 되었던 것과 같다. 진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든 것까지는 연필로 글씨를 쓴 것과 같아서 얼마든지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고, 다시 짓이겨서 땅에 버려도 단지 흙을 버린 것뿐이지만 일단 숨을 불어넣고 나면 볼펜으로 종이와 잉크와 의미가 하나가 된 것과 같아서 그 페이지의 의미를 없애기 위해서는 종이를 찢어버려야 하듯이 그 사람의 형체를 짓이겨 땅에 버리면 '살인'이 되는 것과 같다. 다른 예를 들어 보면 연필로 쓴 글은 문서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글과 같지만 볼펜으로 쓴 글은 이미지에 들어 있는 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습작의 단계와 완성의 단계의 차이와 같은 느낌. 연필로 썼다고 해서 언제나 습작인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최종본이라는 것을 아무리 머리로 잘 알고 있어도 종이를 언제든 다시 쓸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은 글이 언제든 고칠 수 있는 취약한 상태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강조한다. 고쳐서는 안 되는 글도, 고칠 만한 이유가 있을 글도 나는 쓰지 않지만 똑같이 컴퓨터 파일로 옮겨야 한다고 해도 연필로, 샤프로 쓴 글보다는 볼펜으로 쓴 글을 먼저 옮기게 될 것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연필과 샤프로 쓴 글과 볼펜으로 쓴 글이 섞여 있는 검정 수첩을 읽지 않고 가볍게 훑어보다 보면 왠지 샤프로 쓴 부분은 뒤쪽에 볼펜으로 다시 쓰여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둘이 나란히 있으니 습작과 완성이라는 대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당연히 그때그때 생각을 적은 것이니 나중에 앞부분을 보고 다시 적거나 한 부분은 전혀 없고 내가 쓴 글이므로 나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그렇게 느낀다면 객관적으로 보아도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사실과 생각


보안에 대한 책을 읽다가 보니 볼펜을 사용하지 말고 웬만하면 플러스펜을 사용하라는 구절이 있었다. 플러스펜은 끝이 조금 딱딱한 붓 모양으로 생겨서 부드럽게 나오지만 힘을 주어 누르면 구부러져 버린다. 볼펜과 샤프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플러스펜은 사용한 지 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제대로 사용하기 어려운 필기도구이다. 회사에서 사인을 할 때 정도만 쓰게 되는데, 플러스펜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로는 뒷면의 종이에 뭔가가 남으면 나중에 해당 페이지가 문제가 되어 찢어버려도 유추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웬만한 메모는 휴대폰으로 하는 요즘은 조금 다를 것 같지만 아직도 회의에서는 손으로 메모하는 것을 더 좋게 보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꼭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서 플러스 펜은 앞페이지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사용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건 샤프로 쓰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뜻이다. 뾰족해서 샤프라고 부르는 것일 텐데 이건 수첩에서 거의 두세 페이지를 꾹꾹 눌러서 글자를 새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일반 볼펜으로 뒷페이지에 남는 흔적이 100이라고 하면 샤프를 사용하면 아마 300이나 400 정도가 될 것이다. 정보로서의 가치가 있을 수 있는 사실을 적을 때는 없애려고 하면 확실히 없어질 수 있는 플러스펜이 보안에 뛰어나다. 그런데 없앤다는 건 무슨 뜻일까? 말 그대로 그 페이지를 찢어 버린다는 뜻이다. 그 페이지가 그 의미 자체가 되는 것이고, 플러스펜을 사용해서 뒷페이지에 흔적이 남지 않으면 그 의미를 가진 유일한 종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의미, 그 사실의 기록 자체를 없앤다는 것은 물리적인 종이를 없앤다는 것과 동의어가 된다. 플러스펜이야말로 종이와 글씨와 의미가 하나가 되는 완벽한 예인 것이다. 한 가지, 습기에 쉽게 번지지만 않으면 완벽할 텐데. 요즘은 유성 사인펜도 끝이 플러스펜처럼 가느다란 제품이 나오는 것으로 안다. 네임펜이던가. 내가 만약 샤프에서 볼펜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플러스펜을 알았더라면, 아니 가느다란 유성 사인펜을 알았더라면, 지금쯤 사인펜으로 글을 쓰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볼펜으로 남기는 기록


나는 볼펜은 0.5mm짜리를 사용한다. 가장 구하기 쉬운 모나미 153 볼펜은 획의 잉크가 고르지 않아서 몇 번 사용해 보고는 사용하지 않는다. 153 볼펜은 회사에는 많기 때문에 회사일을 할 때는 많이 사용하지만 단지 회사 일이니까 사용할 뿐 익숙해진다고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결국 글감노트 등에 기록을 할 때 사용하는 볼펜은 샤오미의 0.5mm짜리 볼펜이다. 한꺼번에 열 자루씩 주문해서 사용하고 있다. 플러스펜처럼 힘을 별로 주지 않아도 잘 나오고 생각보다 잉크도 일찍 말라서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 펜텔에서 나오는 0.5mm짜리도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너무 비싸서 샤오미로 갈아탔다. 샤오미 볼펜은 부드러워서 힘을 주지 않고 쓰기 때문에 글씨가 흘려 써지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메모'일뿐이어서 크게 상관은 없다.
책에 기록을 할 때는 작은 글씨로 깨알같이 써야 하기 때문에 0.28mm짜리 심을 사용한다. 더 가느다란 심을 구할 수 있게 되면 더 작게 글씨를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0.28mm짜리도 지금은 여러 군데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지만 나는 뭔가 깃털펜을 잡고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유니스타일핏 제품을 선호하는 편이다. 몇 개를 들고 다니다가 잡히는 것으로 글씨를 썼는데 요즘은 필통에 저 제품 한 개만 들어 있다.

볼펜을 쓰려는데 심이 떨어지면


볼펜으로 글씨를 쓰다가 잉크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한 번은 샤프로 메모를 하고 집에 와서 다시 이어서 쓴 적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는 대책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볼펜을 한 자루씩 더 사서 들고 다녔는데, 어쩌다 보니  필통 안에서 새 볼펜이 손에 잡혔는데 쓰던 볼펜을  다시 찾기 귀찮아서 펜촉에 씌워 놓은 고무를 벗기고 그냥 새 볼펜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사용하다 보면 둘이 비슷한 속도로 잉크가 소진되어 잉크가 떨어져 글씨를 쓸 수 없어서 다른 볼펜을 다시 집어 들고 글씨를 쓰는데 얼마 가지 않아 잉크가 또 다 떨어질 수가 있다. 두 자루의 볼펜을 쓰는 것보다 한 자루의 볼펜을 쓰고 새 볼펜을 별도로 가지고 다니는 것이 확실히 중요한 이유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새 볼펜을 급한 마음에 쓰게 되는 경우를 막을 수 없으니 뭔가 기계적인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책이라고 생각한 것이 새 볼펜을 하나씩 더 가지고 다니되, 볼펜 두 자루가 아니라, 예비용 볼펜에서는 심만 꺼내서 필통에 넣어 다니는 것이다. 촉 부분만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서 잉크가 다른 곳에 묻지 않게 해서 필통에 넣어 두면, 쓰던 볼펜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 심만 갈아 끼우면 되는 것이다. 샤오미 볼펜은 열 자루짜리가 한 번에 왔지만 지금 세 번째 볼펜을 쓰고 있음에도 심만 꺼내서 쓰고 두 자루의 껍데기는 그냥 버려졌다.
특히 두 종류의 심을 반드시 가지고 다녀야 하니 볼펜을 통째로 두 배로 필통에 넣는 일은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잔꾀를 쓰면 물리적인 이유로 메모를 해야 할 때 메모를 하지 못하는 일을 최소화할 수 있다.

볼펜에서 다시 샤프로


요즘도 샤프를 들고 다니기는 한다. 하지만 쓸 일이 없다. 볼펜을 쓰는데 갑자기 심이 다 되어 나오지 않을 때나 가끔 쓰지만 그것도 가는 심이 다 되고 나면 책에 해야 하는 메모를 하지 못하는 것인데 샤프로는 책에 메모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때는 글감수첩이나 휴대폰에 메모를 하게 된다. 글감수첩에는 샤오미 볼펜을 꽂아 두었기 때문에 굳이 샤프를 쓸 일이 너무 없어서 그럴 때나 샤프를 사용하는 것뿐이다. 글을 쓰면서 되돌아보니 샤프는 추억이 담긴 물건이고 한동안 실제 글도 썼기 때문에 의리로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필요 없는데 들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쇳덩이가 들어 있어서 볼펜에 비해 무거운 편이라서 조만간 곰곰이 생각해 보고 필통에서 빼야 한다면 빼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앞으로 노트와 수첩의 기록이 샤프나 연필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볼펜은 영구적인 기록을 종이 위에 남긴다. 지우고 다른 글을 쓸 수 있지만 수정의 흔적이 온전히 남는다. 그것이 기록이라는 것의 의미에 적합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볼펜은 너무 현대 문명의 일회용품의 냄새가 난다. 샤프 역시 심만 갈아 끼우면 계속 사용할 수 있고, 그 심은 글씨로 온전히 담긴다. 하지만 볼펜은 심을 갈아 끼우더라도 그 심은 잉크의 그릇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어서 결국 잉크에 비해 많은 부분이 쓰레기로 버려진다. 그런 심리적인 문제 때문에 볼펜을 꺼려한 적이 있었다. 그 대책은 펜을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잉크를 들고 다니면서 펜촉을 담가 가며 쓰는 글씨는 차라리 붓을 들고 다니는 편이 나을 정도로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만년필은 다르다. 잉크를 넣는 일도 손만 씻으면 그다지 번거로운 편은 아니고 글씨도 펜촉만 잘 선택하면 내 마음에 드는 굵기로 쓸 수 있다. 그래서 한때는 만년필을 가지고 다니면서 글씨를 썼다. 그 기간은 한 2년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 추억 역시 지금도 상황만 허락된다면 만년필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다. 현실적으로 그 정도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만년필은 잘 모셔져 있기는 하다. 그러나 볼펜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대안은 샤프가 아닌 만년필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내 기록에는 딱 맞는 선택이다. 0.5mm의 기록 역시 만년필로 글씨를 쓸 때의 그 느낌 때문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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