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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엘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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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Aug 11. 2024

지영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거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내가 글을 쓰는 곳과는 달리 습기가 많지 않아 조금 걷다가 사무실에 가기로 했다. 지금 시간까지 엠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보통은 내가 적당한 시간에 맞추어 사무실에 들어가지만 나도 돈을 벌기 위해 가는 것도 아니고 엠 역시 반드시 나와야 하는 입장이 아니다. 어쩌면 엠은 내가 그를 필요로 할 때만 있는 건지도 모른다. 거리의 돌은 그런 돌을 골라다 깔았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하도 걸어 다녀서 울퉁불퉁하던 게 닳아서 부드러워진 건지 모르겠지만 젖거나 얼면 미끄러져 넘어질 것처럼 반들반들하다. 검은 돌 사이로 시멘트가 물이 흐르듯이 꼬불꼬불 보인다. 사실 거리를 걸어 다녀도 그 공기에서 호흡하면서 여유를 가지려는 것일 뿐, 사람들을 관찰하거나 하는 것은 내 취미가 아니다. 우리 사무실이 있는 블록 중간쯤에 위치한 빵집도 지나갈 때마다 빵냄새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지만 굳이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일부러 들여다본 적은 없어도 길을 걷다 보면 보일 수밖에 없는데, 사람이 항상 두세 명은 있는 게 왠지 언젠가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엠이 배가 고플 시간에 사무실에 가게 되면 한 입 먹어보라고 사다 줄 수는 있을 것 같다. 보통 빵집처럼 일부러 빵을 맛있게 보이려고 노란 등을 단 것도 아니고 그냥 일반적인 형광등일 뿐이지만 빵냄새 하나로 거리에서 시선을 집중시키는 모습이 조금은 기특하기도 하다. 물론 자영업 뿐만 아니라 경제가 모두 어려운 시기라고는 하나 이 도시는 현실 경제와 접점이 없으니 내가 기특해하거나 대단하다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사무실 건너편 카페만 해도 커피맛이 맛이 없어서 네스프레소를 사다 놓았으니 말 다했다. 그렇게 장사해도 망하지 않는 경제이니까.

얼굴은 앞을 향하고 있지만 눈은 아래로 내리깔아서 바닥을 보며 걷다가 손목시계를 보니 어느덧 여덟 시다. 이곳의 사람들은 어디론가 바쁘게 걷고는 있지만 사실 목적지가 없다는 것을 안다. 게임의 NPC 같은 존재들이다. 따라가 보면 뭔가 하겠지만 내가 따라가지 않으면 어디선가 사라질 것이다. 천천히 걸어가다가 평범한 인상에 가슴이 반쯤 드러나는 옷을 입은 아가씨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로 옆에서 앞질러 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뒤에서 얼마 걷지 않았는데 왠지 나를 신경 쓰는 것 같다. 괜히 따라가는 것 같이 보이나 싶어서 눈에 띄는 맥주집으로 들어갔다. 제법 넓은데 바에 빈자리가 많이 있어서 바에 앉아서 맥주 한 잔과 프렌치프라이를 시켰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바텐더 뒤에 있는 벽에 가득한 술병들을 보고 있다가 문득 오른쪽을 돌아보니 아까 그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친구와 왔나 보다 하고 흘깃 보았지만 그녀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새 자리가 없어서 여기 앉은 건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는데 빈 테이블은 적지 않게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맥주 한 잔만 마시고 가려고 들렀기에 빈 테이블이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었다. 빈 테이블도 있는데 왜 친구와 굳이 바에 앉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아가씨를 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저 혼자 왔어요."
"네?"
내가 깜짝 놀라 반문하자 아가씨가 살짝 이를 보이며 웃었다.
"왜 테이블에 앉지 않았는지 이상해서 그렇게 보신 거 아니에요?"

입을 비쭉거리면서 둘러보아서 표정에서 드러났나 보다.
"아니에요. 저는 그냥 평소보다 시끄러워서 자리가 다 찬 줄 알고 봤어요."
"제 옆에 누가 있나 보는 거 봤어요."
"아 네..."
"신경 쓰지 마세요. 왜 테이블에 안 앉고 여기 앉냐는 질문을 여기 올 때마다 들어요."
"전 다음에 보면 안 물어볼게요. 그러면 올 때마다 듣는 게 아니게 되겠네요."
"됐어요. 아저씨 아니라도 다른 누가 물어볼 거예요."
이야기를 마치고 웃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제가 한 잔은 솔게요. 제가 술 마시면서 얘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아가씨 얘기는 재미있게 들었으니 이걸로 퉁 치시죠."
"좋아요. 저야 그럼 감사하죠."
어차피 여기선 돈도 들지 않으니까. 어차피 상상의 공간이라고 해도 찝찝한 구석을 남겨 놓아서 좋을 건 없다. 스물여덟은 되어 보이는 얼굴에 목소리는 고우면서도 시원시원하다. 약속도 없는데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옷을 입은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 클럽에 가려다가 초저녁이라 예열하러 왔으려나.
문득 홍대 앞이 생각나서 바텐더에게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네, 주문하시겠어요?"
"아니요, 주문은 아니고요, 혹시 위스키 있어요?"
"조니워커 있는데요, 한 종류예요. 저희가 원래 맥주 파는 집이라서."
"스트레이트로 한잔 주세요."
"알겠습니다."
주문을 하자 옆에서 아까 그 아가씨가 쳐다보았다. 나는 이곳이 참 좋다. 휴대폰이 아직 없는 세상. 하긴, 책상 위에 글을 쓴다고 타자기를 갖다 놓았는데 엠이 컴퓨터를 쓰라느니 하는 말도 꺼내지 않는 걸 보면 참 알다가도 모르겠는 공간이다.
"위스키면 양주죠?"
갑자기 아가씨가 물었다.
"그렇죠."
"혹시 저도 한 잔 마셔봐도 돼요?"
아가씨가 웃으면서 물었다.
"사는 김에 뭐, 한 잔 더 살 수도 있죠. 근데 우리 이름도 모르는 거 알아요?"
"저는 지영이에요. 한지영. 아저씨는요?"
"저는 루펠이라고 해요. 글 쓰는 연습하고 있는데 필명이니까 나중에 혹시 이름 보면 기억해 주세요."
"오, 멋져요. 글 쓰시면 지금은 뭐 하세요?"
"지금은 백수죠 뭐. 사실 글을 쓰더라도 지영 씨가 읽을 일은 없을 것 같기도 해요."
"왜요? 저 책 안 읽게 생겼어요?"
지영은 혼자 이야기하고 혼자 웃었다. 너무 잘 웃으니 꽃뱀인가 싶지만 일단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건 아니고, 읽을 대상이 좀 일반적이지 않아서요."
내게는 현실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여기서 누가 뭘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꿈에서조차 특권이 있다는 얘기는 말로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아마 왕실에서 태어났다면 괴짜소리는 혼자 다 듣고 돌아다녔을 것 같다. 그래도 괴짜가 양아치 왕손이나 망나니 왕손보다 듣기는 낫지만.
지영이 조용한 가운데 내 위스키가 왔다.
"저 이거 온더락으로 한 잔 더 주세요."
"알겠습니다."
지영이 나를 쳐다봤다. 아마 온더락이 뭐냐고 물어볼 것 같았지만 대답 대신 내가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지금 술 마시는 게 예열이시면 위스키까지 마시는 건 좀 세지 않아요?"
"네?"
지영이 못 알아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녀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고 시끄러워서 말을 못 알아들은 건지 말은 들었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건지 파악하려고 애썼다.
"혹시 클럽 가시는 거 아니에요? 저는 목적지가 따로 있는데 너무 일찍 와서 미리 술 좀 마셔 두려고 여기 오신 줄 알았어요."
그제야 지영이 안심했다는 듯 웃었다. 웃는 모습이 예쁘다. 그렇지만 이미 나는 맥주 두 모금을 마신 상태라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옷차림 때문에요?"
"그것도 있죠."
"요즘 세상에 옷차림으로 그런 거 판단하시면 안 돼요. 출근복장이에요. 어차피 출근해서 갈아입으니까요."
"그렇게 입고 회사에 갔다가 퇴근하신 거라고요?"
"네."
"어디 다니는데요?"
"은행이요."
"그래도 돼요?"
"뭐... 어차피 가서 갈아입으니까요"
"아니, 유니폼이 있어도 사람들 눈이 있는데..."
그 순간 지영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유치원 선생이 아이들 가르치는 듯한 말투로 설명을 했다.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대할 때는 회사의 이름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유니폼 뒤에 숨어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 만큼, 고객을 대하는 게 아닐 때는 회사에 책임을 제가 전가할 게 없어요. 그렇다면 회사에서도 저에게 의무를 부과할 수 없지 않을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니, 우리 둘 사이에만 침묵이고 가게에는 아직 디스코가 한창이었다. 분위기를 푼 건 다시 지영이었다. 나는 솔직히 현실에서도 빡빡한데 여기서의 규칙 따위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 사무실 안에서 글을 쓰기에 좋은 소재나 건질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글감노트의 생생한 버전이라고나 할까. 너무 깊게 들어가는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사과했다.
"미안해요. 뭔가, 편견을 강요하고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저는 화난 건 아닌데, 이해가 안 가신다는 표정이라서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설명할 말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그때 온더락 위스키가 나왔다. 잔을 보자마자 지영이 말했다.
"왜 제 잔은 뚱뚱해요?"
"그 안에 돌 보이죠?"
"네"
"그 돌이 있어서 온더락이에요. 그 돌을 차갑게 해서 얼음 대신 넣은 거거든요. 술이 시원해져서 목으로 넘길 때 조금 더 부드러울 거예요. 따뜻하면 알코올이 들어가는데 숨 쉬다가 기침을 할 수도 있거든요."
"근데 루펠 님은 왜 그냥 그 날씬한 잔으로 드세요?"
"저는 이 맥주 다 마시면 원샷할 거거든요."
"그럼 저는 이건 원샷하는 거 아니에요?"
"네, 홀짝홀짝 맛을 음미하면서 드세요."
지영이 맛을 보더니,
"이거 음미할 만한 게 아닌데요?"
라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그게, 맛을 못 봐서 그래요. 그럴수록 음미하면서 마시면 언젠가 맛을 느끼게 될 거예요. 그땐 스트레이트 드셔도 돼요."
"스트레이트가 그 날씬한 잔이에요?"
"네, 스트레이트로 원샷하는 거니까요."
"네..."
"그럼 여기서 맥주 먹고 바로 집으로 가요?"
"그렇죠. 스트레스 쌓인 날은 맥주 한 잔 마시고 가거든요. 안주 없이 맥주만 한 잔 하고 집에 가서 저녁을 먹죠."
"저녁 뭐 먹어요? 메뉴 정해 놨어요?"
"아, 아저씨, 저 가슴 보고 지금 꼬시는 거죠?"
이번에는 지영이 웃지 않고 말투만 능글스럽게 바꿔서 물어보았다. 그런 말투를 웃지 않고 구사하니 살짝 무섭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엠과 대화할 내용을 살짝 생각은 해 왔는데 그게 내 글과 상관이 있을까 싶어서 이야기를 해볼까, 말까 하는 고민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바로 사무실에 들어가지도 않고 술까지 한 잔 하는 게 아닌가.
그때 지영이 이어서 말했다.
"솔직히 아까 술집 앞에서 아저씨가 제 가슴 쳐다보는 거 봤어요. 나쁘지 않아 보이긴 하는데, 저는 남자 만날 생각이 없어요. 죄송해요."
아니, 내가 자기를 꼬신다고 생각을 했다면서 오히려 자기가 사과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다 있나?
"죄송하다니요? 사실 저도 지금 글 구상 때문에 여자 만나고 가슴 보고 그럴 시간이 없는데, 그건 말을 해야 아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걸 제가 말을 했다고 해도 결국 스스로 변호하는 거라서 지영 씨가 못 믿으면 설명을 해서 뒷받침을 하고 그렇게 이해를 서로 해야 하는 건데, 저는 아직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지영 씨가 먼저 죄송하다고 하면 안 되죠."
그러자 지영이 내 눈을 게슴츠레 쳐다보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술잔을 보자 온더락이 비어 있다. 틀림없이 액체는 없고 돌멩이만 덩그러니 들어 있다.
"위스키 마셨네요?"
"네. 위스키를 마시니까 아저씨가 잘생겨 보여요."
"오, 잘 아네요. 위스키를 마셔서 그런 거예요. 맥주도 마실 거예요?"
"그래야죠. 원래 여기서 맥주를 다섯 잔 정도 마시고 가는데, 오늘은 한 잔만 마실래요."
"그러세요. 그런데 저는 맥주 두 잔만 마시고 갈 거예요. 지금 잔 다 마시고 위스키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나면 맥주 한 잔만 더 마시고 바로 갈 거예요."
"그러세요. 다음에 또 볼 수 있죠?"
"뭐, 우연히 그럴 수도 있죠. 그렇다고 매일 여기서 술 마시지는 마요. 저는 여기선 가끔 마셔요. 다른 데서 마시는 데가 있어서."
"제가 근처 술집은 다 알아요."
"그런 건 아니고, 집에서 마시는 걸 좋아하거든요."
지영은 확실히 취했다. 나는 현실에서도 거의 집에서만 마시는 편이니 거짓말할 일은 없어서 좋다.
"나중에 카페나 그런데 글 쓰시는 데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왜요?"
"아저씨 보면 힘이 날 것 같아요. 뭔가 열심히 하는 거 보면 옆에서 기운 받는 거 있잖아요? 아저씨는 글은 열심히 쓸 것 같아요."
"오해이긴 한데, 감사하게 들을게요. 근데 다음에 만나는 건 확실해요. 제가 보장해요."
그러자 지영은 그냥 웃었다. 믿기지 않겠지.
나는 같은 생맥주를 500cc 더 달라고 한 후 스트레이트 잔을 입 속에 털어 넣었다. 옆에서 지영이 박수를 쳐 주었다. 역시, 술을 마실 때는 고민 따위 날아가야지. 맥주는 네 모금만에 사라졌다. 지영에게 문장만 마무리해야 하는 게 있는데 고민하다가 지영을 보니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돼서 지금 쓰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그런 건 없다. 단지 사무실에 혼자라도 멍하게 창밖을 보면서 앉아있고 싶었다. 지영이 내 손을 가져가더니 손등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더니 내 뺨에도 키스를 하려고 했지만 내가 피하자 고개만 푹 숙였다.
"오늘은 갈게요. 근데 다음에도 그냥 술친구만 해요."
"아저씨... 하나만 대답해 주세요."
다행히 목소리가 우는 목소리는 아니어서 안심하고 물었다.
"뭔데요?"
"제가 키스하려고 해서 가시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원래 마음껏 마시다가 이 정도 취했으면 글을 쓴다는 그 정도가 있어요. 너무 더우면 더 빨리 취하니까 더 일찍 나갈 때도 있어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지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래요. 다음에 보게 되면 인사나 해요."
"네."
내가 창조한 곳은 이런 것이 좋다. 아니, 이런 것이라고 했다고 오해하지 말라. 스캔들이 자유롭게 생기고 누군가 나를 좋아하고 그런 상황이 아니라, 나는 뭘 하더라도 누가 나타나서 돈 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게 좋다는 소리다. 술을 마시면서 글을 쓰고 그 글 안에서 똑같이 취하면, 나는 내가 돈을 주고 사 온 술을 마시는 것이니 사실은 집에서 사 온 술로 가게에서 마시는 기분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글쓰기의 특권이 아닌가!
지영은 그 전과 마찬가지로 그날도 적당히 취해서 기분이 좋은 상태로 집에 갔다. 그녀는 80세가 되어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범죄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30대까지는 가슴이 드러나는 옷을 즐겨 입었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의 간청으로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만 풀고 모두 채워서 다녔다. 나를 만날 때는 가끔 브라가 보일 정도까지 풀 때가 있었지만 그건 시험이었다. 가슴에 내 눈이 가는 걸 들킬 때마다
"역시, 아저씨는 가슴 보는 걸 밝히는 사람이었어."
라고 반드시 짚어 주었으니까.
이 세계를 만든 장본인으로서 이 정도 썼으면 그녀는 충분히 복을 받은 것이니 다시 그날로 돌아가서, 나는 술집에서 나와서 다시 오던 길을 돌아 사무실로 갔다. 어두침침한 계단을 올라 계단 꼭대기에서 사무실 문을 여는 대신 계단 위에 앉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엠은 아직 사무실에 있다. 문을 열어보지 않아도 된다. 걸어오면서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본 것도 아니다. 그럴 정신이 없었으니까. 엠이 아직 사무실에 있는 건 정해져 있는 사실이다. 느낌이 온다. 하지만 나는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왜일까? 지금은 술을 마셔서라고 치고, 어째서 거리를 돌아다니게 된 걸까?
그렇게 십오 분쯤 있다가, 나는 열쇠를 꺼내 유리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무문을 밀었다. 엠은 평소와 달리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었다. 나는 들어가서 유리문이 닫히자마자 잠갔다. 그리고 나무문을 닫았다.
"무슨 생각인 건가?"
엠이 평소답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이야?"
내가 생각했던 질문이 아니어서 깜짝 놀랐다. 이 세계는 내가 다 들여다보고 있던 게 아닌가? 내가 만들었는데 지영도 그러더니 이번에는 엠이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을 한다.
엠이 대답했다.
"나는 이곳이 자네 손에 달린 아주 안정된 세계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손을 떼었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손을 떼었다니?
"손을 떼었다는 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무슨 말이야. 사람들이 자기 삶을 찾기 시작했다는 거지. 뭐, 내 삶도 생생해져서 좋긴 해."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니야, 자네는 이곳 전체를 컨트롤하고 나와의 대화에서만 살짝 내가 아무 말이나 할 수 있게 풀어주었었는데 이제는 누구나 아무 말이나 할 수 있게 했어. 아마 두 시간 전부터인 것 같은데. 딱히 특별한 건 아니야. 원래 여기서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라고, 혹은 어떤 행동을 하라고 직접 지정하지 않아도 모두가 이 세계의 일부인 이상 서로에게 맞춰서 살게 돼 있어. 그리고 나만, 특별히 여기서는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장소가 다른 데서 풀렸다는 말이야."
누가 들어도 지영 얘기다. 그런 식으로 설명하니까 마치 내가 코드만 짜지 않았을 뿐인 게임 세상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그럼, 안되나?"
"아니야, 어차피 내가 할 말은 없어. 자네가 만든 세상이고 나도 그 세상의 일부니까. 그냥, 자네가 이 세상의 자유도를 올려놓았다는 것뿐이야. 물론 뭐, 그럴 필요성이 있기는 했지. 변수가 많을수록 사무실 안에 머무를 필요성도 높아지지. 그전에는 굳이 이런 사무실까지 만들 필요가 없어 보이긴 했어."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은 말투로 이야기를 하니까. 그래서 물었다.
"자네 지영에 대해 아나?"
"알지."
"자네, 내 위치에 올라온 건 아니지?"
처음으로 엠이 황당해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황당해하면서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가 게임 개발자야? 코드 도둑맞았어? 그런 거 아니잖아, 이 세계는. 무슨 권한 이런 거 없네. 나는 단지 자네의 복제이기 때문에 자네가 아는 건 똑같이 알고 있을 뿐이야. 얼마나 얘기해야 하나? 현실에는 손톱가루만큼도 영향 끼치지 못하는 이곳 때문에 이상한 생각 하지 말게. 여기를 만든 것 자체가 마음속으로 글을 쓸 장소를 찾기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말라고. 글을 쓰는 것 그 외에는 없지 않은가?"
"그래, 고맙니."
"그런데 자네도 어느 정도 감각은 가지고 글을 쓰는 모양이야."
"뭐가?"
"남자가 작가라는 매력을 내세워서 고백하는 시나리오도 가능했을 텐데, 그건 신념에 어긋난 거였나 보지?"
나는 엠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오늘 글은 여기서 마치기로 했다.
"왜? 왜 글이 갑자기 끝나?"
엠이 항의했지만, 그냥 끝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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