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들어가니 엠이 신문을 읽고 있었다. 네스프레소 머신과 정수기가 있지만 인터넷과 심지어 텔레비전과 전화조차 없는 공간이 참 언밸런스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궁금해서 물었다.
"엠, 우리 네스프레소 캡슐은 어떻게 주문하나?"
엠이 신문에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성의 없이 대답한다.
"그야 주문 엽서를 보내지. 캡슐 주문 엽서는 기계를 구입할 때도 서너 장 들어 있었고, 캡슐이 오는 소포에도 두어 장 들어 있네. 거기에 있는 캡슐에 체크 표시를 하고 해당 금액을 서울로 송금하면 이주일쯤 있다가 캡슐이 도착하지. 왜, 캡슐을 채운 적이 없는데 항상 든든하게 채워져 있으니 좋은가?"
나는 말을 꺼낸 김에 캡슐을 머신에 넣고 스위치를 켰다.
"아니, 뭐 어차피 정수기 관리도 그렇고 자네가 다 알아서 하니까 어련히 잘 돌아갈까 싶지만 너무 신경을 안 쓰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말이야."
"자네는 글만 쓰면 되네. 할 일이 뭐가 더 있나?"
"인터넷이 없는 공간이라니."
"나도 인터넷이 뭔지는 알지만 여기는 인터넷이 없네. 컴퓨터도 없고. 전화는 있지. 하나 설치해 주겠나?"
"우리 사무실에? 전화올 데가 어디 있다고?"
"그냥 배경이지. 나한테 전화해도 되고. 팩스도 있으면 재미있겠군. 타자기로 쓴 글을 복사도 할 수 있고."
"팩스는 있어? 배경이 아주 오락가락하는구먼."
"팩스는 못 들은 걸로 하게. 그러고 보니 배경은 자네 세상 기준으로 40년대에서 60년대 같군. 과학기술이고 뭐고 깡그리 무시하고 말이야. 일일이 따지면 국적불명의 지명이 나올 테니."
"정수기도 사실은 그냥 필터 기계 아닌가? 필터가 제대로 돼있지 않으면 수돗물을 그냥 마시는 셈이 될 텐데 필터는 어떻게 교체하지?"
"3개월에 한 번씩 사람이 오지. 영업사원이 와서 정수기를 바꾸라고 사정사정을 하지만 우리도 어쩔 수가 있나, 필터만 갈아야지. 그러다가 건방지게 필터를 단종시키면 다른 회사 정수기를 새로 사는 거고."
"합리적이군."
"그러니 이 세상을 가지고 머리 좀 잘 짜내 봐."
"그런데 신문이 있는 줄도 몰랐군."
엠이 읽던 신문을 가리키며 내가 말했다.
"이거?"
엠이 손가락으로 신문지를 툭 쳤다.
"신문이야 몇 세기 전부터 나온 것이니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사라지지 않는 한은 없어지지 않을 것 같네."
"그런데 사무실에 신문을 들고 온 적이 없잖아. 무슨 소식이 있나? 내가 들어왔을 때도 집중해서 읽는 것 같더니."
순간 엠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엘, 이거 가지고 글 한 번 써봐."
"뭔데?"
"대형사고야."
"사고? 나는 사고 가지고 글을 쓰는 건 질색인데. 감정이입이 되고 나서 헤어 나오지를 못해."
"그런 사고는 아니야. 들어봐. 혹시 작년에 프랑스에서 테러로 다쳐서 우리나라 실려온 사람 기억나?"
"작년에? 모르겠네."
"하긴, 그때는 나도 먼 나라 얘기여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 그런데 그때 몇 명이 죽고 생존자 서너 명이 있어서 그중 한국인이 우리나라로 이송돼서 치료받다가 실종됐거든."
"실종이라니? 치료를 받다가? 그럼 병원에서 실종됐다는 말인가?"
"맞아. 지키던 형사도 사망해서 그건 제법 큰 뉴스여야 하는데 그냥 병원에서 난동이 있었다는 정도로 넘어갔었나 봐.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게 오늘 신문에 나왔다는 말이야?"
"맞아. 장황하게 시간 순서대로 설명해 놓긴 했지만 핵심을 얘기하면, 이 한국인은 특수부대 출신 용병인데, 테러에 가담을 했다가 배신을 당한 거야. 그냥 뭔가를 설치하고 나오면 되는 것으로 알았지만 폭탄인 줄은 몰랐다는군. 도청장치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나 봐. 그리고 폭탄이라는 건 폭약설정을 하려고 뚜껑을 열었을 때 비로소 알았던 거지. 그래서 계약 조건 가지고 싸우다가 폭탄이 폭발했고 눈치 빠른 그만 간신히 몸을 피해서 목숨은 건졌어."
"다쳐서 한국으로 이송됐고, 테러에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가담했었다는 건 모르는 상태였다는 거야? 그런 거 설치하러 가면서 군복 같은 건 안 입었었나 보지?"
"그런 흔적이 있었으면 프랑스에서 풀어주었을 리가 없지. 게다가 그는 폭발이 일어나면서 왼쪽 다리를 잃었네."
"흠... 몸도 성치 않은데 병원에서 사라졌다면 납치를 의심해 봐야 하나..."
"경찰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조사를 했는데, 오늘 신문에 따르면 그 테러조직을 소탕했다는군."
"그래?"
"어때?"
"뭐가?"
"솔깃하지 않아?"
엠이 나를 보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글 쓰면 한 편 뚝딱이겠다. 눈을 떴는데 병원이고 화장실에 가려고 보니 다리가 한 짝이 없어. 호랑이 사냥이나 정글에 길을 내는 작전에만 참여하다가 처음으로 도시에서 하는 작전에 참가하기로 했는데 거기서 폭탄을 발견하고 나서 기억이 없는 거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면서 뭔가 떨어뜨리는 바람에 큰 소리를 내서 경찰이 들어와서 깼냐고 우월한 미소를 짓고는 앞으로 질문할 게 많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나을 거라고 경고하고 나갔는데 다른 병실들을 지나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에 간 사이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병실로 돌아와 보니 문 앞에 있던 경찰들도 없고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창고 같은 곳이 있어서 들여다보니 그곳이 병실 내 화장실이었고 침대는 칼자국이 마구 나 있는 거야. 어때?"
"그래서 누군가 자기를 죽이려는 걸 알고 한쪽 다리가 없는 채로 달아난다고?"
"맞아. 그러다가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놈을 하나씩 죽이다 보니 보스를 잡는 거지.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해서 잘 신고가 돼서 일망타진!"
"그럴듯하네. 근데 그거 그냥 기사 내용 아니야?"
"기사 내용은 더 소설 같아서 비현실적이야."
"끝내주는 사람이군."
"영화 주인공 같은 사람이겠지. 자네는 글이나 쓰는 사람이고."
"난 얌전한 게 좋아."
"알았어. 어때? 써 볼 텐가?"
"이렇게 머릿속에 묻어 두면 언젠가는 쓰겠지 뭐."
"그래, 편하게 생각하게. 여기선 시간이 많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