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오늘은 하늘이 맑군. 어제까진 저녁만 되면 구름이 잔뜩 몰려오더니."
엠이 내 책상 옆으로 의자를 가지고 와서 걸터앉더니 창밖을 내다보며 한 마디 했다. 나는 타자기 앞에 앉아 있는 채였다.
"지난번에는 신문을 보고 있더니 오늘은 읽을거리가 없나 보지?"
"없기는, 그냥 추리소설 이것저것 읽어 보고 있지. 날씨가 오락가락할 때는 마음을 잡는 데 스릴러물 만한 게 없으니까."
"날씨가 오락가락한다기보다는 자네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 같은데? 가을 타나?"
"가을이든 봄이든 타기는 타지. 봄이 되면 연애를 하고 싶고 가을이 되면 혼자 훌쩍 떠나고 싶은 게 마음 아니겠나."
"여름에 만나서 연애하던 처자와 가을이 되면 헤어지는 클리셰가 탄생하는 건가?"
"클리셰는 무슨. 나는 여기에 꼼짝없이 갇힌 몸인데."
"혹시 여기에 나올 필요가 없다면 가고 싶은 데가 있나?"
"눈이 잔뜩 오는 날 내 무릎보다 높이 쌓여가는 눈을 보며 암자 방 안에 처박혀 있는 거네."
"처박혀서 뭘 하는데?"
"눈을 본다고 하지 않았나?"
"그냥 눈을 본다고?"
"얼마나 적적하고 아름답겠나."
"자네는 여기에 있어도 하나도 불쌍하지 않군. 여기가 아주 호화로운 사무실이겠어."
"도심에 있기만 하면 암자까지 가지 않더라도 산에 있는 것보다도 좋지. 나는 사람들 많은 곳에 있어야 돼."
"그래도, 방금 암자에서 눈을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 그렇게 눈을 보다가 얼어 죽는 거지. 사람들 없는 곳에 혼자 처박혀서는 나는 못 살아."
"그럼 암자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은,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한다는 건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사실 여기를 떠나서 내가 어딜 가겠나? 가장 현실적인 행복은 저 구석에서 자네 타자기 치는 소리를 배경으로 삼아 책을 읽는 것이네."
"내가 그렇게 소리를 내며 쓴 글을 읽는 건 어떤가?"
"그건 싫고.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전부 원단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식당에서 신선이 내려준 것 같은 요리를 해서 내놓는 요리사라도 부엌을 벗어나고 나면 수돗물 근처에도 가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야. 하루 종일 자네 타자기 소리를 듣고 나서 그 타자기 소리를 내면서 쓴 글을 읽지 않겠냐고? 그건 너무 가혹한 근무 조건이구만."
"아니, 같이 일하는 사람의 글을 읽어줄 수도 있지 뭘 그래?"
"같이 일하는 사람의 글이라는 건 말이야, 특히 내가 글을 쓰지 않는 입장에서는 혹평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네."
"그러면 나야 좋지."
"아니야, 글을 보여준 다는 건 개인적인 울타리 안으로 한 발짝 더 들여보내 준다는 뜻이네. 세상에 나가서 활자로 된 책을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한 권 손에 쥐고 읽는 것과는 다르다는 뜻이야. 개인적으로 보여주는 글은 그래서 함부로 좋다 싫다 말할 수 없어. 특히 좋다는 말도 안 되네."
"싫다는 말은 싸우지 않기 위해서 그렇다 치고, 좋다는 말은 왜 안 된다는 건가?"
"내가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나?"
"물어보게."
"내가 자네 글을 읽고 갑자기 극찬을 한다고 해 봐."
"그럴 리는 없지만 상상을 하면 즐겁기는 하군."
"그럼 자네는 나에게 뭐가 그렇게 좋아 보이는 건지 물어보지 않을 자신이 있나?"
"흠..."
생각해 보니 그렇기는 하다. 좋았다면 좋았던 걸 말해 달라, 싫었다면 어디를 고치면 좋을지 설명해 달라,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 친구가 좋았다는 점이 내 글에는 독이 될 수도 있고, 그 친구가 어디를 고치면 좋겠다고 한 곳이 나에게는 자존심 같은 문장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읽게 해 주는 건 거기서 끝내고 의견을 구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글을 읽고 아무 말하지 않아도 좋네."
"뭐?"
엠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자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계속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 글을 읽고 아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네. 읽고 나서 내가 아무 의견도 강요하지 않겠네."
"자네 내 말을 제대로 들은 것 맞나?"
엠은 화가 난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묻는 것이었다.
"왜? 싫다는 말을 하기도, 좋다는 말을 하기도 곤란하다는 말 아닌가?"
"그래서 아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네."
엠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나에게 뭔가를 설명하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엠..."
"왜 그러나?"
"정말 이해가 안 가서 그러니 왜 그러는지 설명을 해 주게."
엠은 다시 창밖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에게 신데렐라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걸 자네가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고 해보게. 다 듣고 나서 무슨 말을 하겠나?"
"신데렐라가 잘 돼서 다행이라고 하겠지."
"맞아. 그거야."
"그거라니?"
"자네 글을 내가 읽는다면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말이지. 읽고 나면 어떤 감상이든 말을 할 수밖에 없네. 글을 읽게 해 주고 그 글에 대한 의견을 듣지 않겠다는 것도 옳지 않은 거야."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글을 읽게 해 주더라도 반응은 내 마음대로인 거지. 말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고, 호평일 수도 있고 혹평일 수도 있지만 내 입으로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유고 뭐고 더 요구하면 안 되는 거야. 그 중립을 지킬 수 없으면 글을 읽게 해서는 안 되네."
"어렵군. 알겠네. 이제 내 글은 읽을 생각 하지 말게."
"아니, 내 말은 상대방에게 뭔가 그렇게 강제로, 획일적으로 기대하지 말란 말일세."
"알겠네."
헛기침을 한 번 한 후 엠이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 글을 읽기 싫은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이에서 글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 아닌 한쪽의 글만 읽는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설명했을 뿐이네.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지만, 당장은 기분이 상했다고 하더라도 내 설명이 그냥 설명일 뿐이었다는 것만 알아주면 되네."
"기분이 나쁠 건 없네. 무슨 말인지도 알겠고. 내가 생각이 짧았네."
"아닐세. 나도 글을 썼다면 해 보지 않았을 생각이야. 그나저나 글은 언제 쓸건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는데."
"오늘은 공기 냄새도 상쾌하고 좋은데 밤늦게까지 써볼 생각이네. 혹시 괜찮다면 나가서 맥주 한 캔만 사다 줄 수 있겠나?"
"작가나리를 위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대신 내가 맥주를 사가지고 이 건물 창문 아래를 지날 때는 타자기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네."
"그건 내가 보장하지."
그리고 나는 곧장 타자기에 손을 올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늘 같은 날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글이 잘 써질 것 같은 날씨에 맥주가 있으면 금상첨화겠다 싶으니 술이 없다. 물론 평소에는 홍차를 마시고 사무실에는 냉장고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