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의미

나는 모르겠다

by 루펠 Rup L
"오늘 오후 출판사의 변호사가 이야기하더군요. 당신이 서명한 계약서는 계약 당사자만 권한을 행사할 수 있기에, 발행인들이 사망한 이상 그 계약은 이제 해지되었다고요. 다만 이전에 출판된 작품에 한해서는 상속인들이 계속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답니다. 아마도 당신에게 그런 사실을 서면으로 통보할 겁니다. 그러나 그전에 아는 게 좋을 것 같더군요. 당신이 언급했던 그 출판사 발행인의 제안에 관해 결정해야 할 게 있을지 모르니."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란데스는 급히 담배를 빨더니 꽁초를 바닥에 던지고는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 치고 프린세사 거리를 향해 멀어져갔다.
"형사님?" 내가 불렀다.
그란데스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다.
"혹시 지금 생각하는게..."
형사는 피로에 지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몸조심하십시오, 마르틴."
(천사의 게임 p.265)

소설을 읽다 보면 이런 장면이 종종 나온다. 요즘 소설, 옛날 소설을 가릴 것 없이 수시로 튀어 나온다. 은근히 언급하면서 지나가는 이런 장면을 읽을 때면 의미도 모르고 그냥 넘어가는 느낌이 든다. 피로에 지친 미소? 몸조심 하라고? 이런 부분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나는 이런 부분을 읽으면 대체 무엇을 암시하려고 쓴 건지 잘 알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뭔가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주려고 한 것 같은데, 전혀 의미심장하지도 않고, 무슨 말을 의미심장하게 한 건가 하는 생각만 든다. 그래서 모른체 하고 계속 읽어 나가고 나서 '이런 뜻이었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식이다. 어차피 뒤에 가면 나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저런 부분에서 복선을 만들어 둔다면 나에게만 그 복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책을 아직 덜 읽어서 이해를 못하는가 보다, 뭔가 소설들 사이에 암묵적인 규칙이 있겠지, 언젠가 복선의 클리셰를 알고 나면 이해하기 쉬워 지겠지, 했지만 사십이 넘어서도 여전히 모르겠다. 저 인용한 부분만 보아도 저게 형사가 좋은 뜻으로 한 말인지 경고라고 한 말인지. 피로에 지친 미소라니. 그렇다고 저런 부분만 모아서 빅데이터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서 분석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오히려 그런 부분에 규칙이 생긴다면 그 규칙을 깸으로써 진부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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