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탓? 도구 골라쓰기!

by 루펠 Rup L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 악기든 농기구든 도구 이야기만 나오면 반사신경이 반응하듯 튀어나오는 말이입니다. 실력이 있으면 도구는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 많이 쓰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도구가 이상해도 받아들이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런 도구로도 저게 된다고?"에 가깝습니다. 도구가 상관이 없다는 게 아니라 인간의 능력이 도구의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런 시도들의 대부분은 기술적인 면에 머무릅니다. 신기한 악기라고 해도 연주자 스스로에게 중요한 것은 소리를 낼 수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자신이 늘 사용하는 악기로 하듯이 감정을 스며들게 연주하려면 얼마나 더 연습을 해야 하느냐일 것입니다. 확실히 정상적인 악기가 아니라면 연주가 되기는 하더라도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입니다. 신기한 '기예'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말입니다.
글쓰기에 사용하는 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한 바가 있어서 글을 꼭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어떤 도구를 잡아도 그것을 기록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 '메모'를 남겨서 나중에 진짜 '글 쓰기'를 할 때 참고하는 것입니다. 어떤 도구로든 글을 잘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오히려 습관 때문에 연필로만 글을 쓴다거나 만년필만 사용한다는 말이 더 와닿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제 컴퓨터를 사용한 지 4년 정도 되어가니 수첩에 만년필로 쓰는 글은 길게 가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컴퓨터로 쓸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휴대폰으로도 글을 쓰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쓸 수 없는 게 아니라 길게 쓸 수 없을 뿐입니다. 그리고 길게 써지지 않는 것은 생각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때때로 휴대폰으로 글을 씁니다. 글을 길게 쓰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글을 길게 쓸 수 있는지 여부로 중요한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길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생각의 흐름입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써도 재미있는 글이 나올 수 있지만 단, 실제 흐름을 잘 따라가야 합니다. 그 흐름이 끊어지거나 내가 타자를 치거나 글씨를 쓰는 속도 때문에 놓치게 되면 글이 뚝 끊깁니다. 거기서 마무리를 억지로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이야기가 한참 가던 상황이라면 그 글은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글이 됩니다. 완성본이 아니라 하나의 메모로서만 남는 것입니다. 제가 수첩을 더 이상 메모 외의 글쓰기 도구로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너무 느려서 생각을 따라잡지 못합니다. 키보드로 쓸 때는 오히려 너무 빨리 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도구에 따라 글의 속도부터 생각의 흐름까지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은데 어떤 도구를 주더라도 당장 글을 잘 써야 한다고 말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좋아서 쓰는 글이 일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되도록 마음에 드는 도구가 있으면 그 도구를 웬만하면 늘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글의 속도를 조절한다던가 하는 부가적으로 신경을 기울일 일이 최소화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핸드폰으로 글을 쓸 때는 전자책으로 글을 쓸 때와 같은 앱을 사용합니다. 핸드폰에서 훨씬 반응이 빠르지만 인터페이스가 같기 때문에 전자책으로 글을 쓸 때의 속도로 맞추면 됩니다. 쿼티 키보드를 쓰더라도 그런 속도로 글을 쓰면 오타도 잘 나지 않습니다.
밖에서는 지하철에는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사용하지만, 웬만하면 휴대폰으로는 메모만 합니다. 카페나 그밖에 책상이나 테이블을 이용할 수 있는 곳에서는 전자책과 휴대용 키보드를 사용합니다. 집에서는 노트북에 기계식 키보드를 사용했지만 최근 프리라이트라는 기기를 들여놓았습니다. 몸체가 통째로 알루미늄이어서 왜 타자기로 글을 써야 잘 써진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묵직한 느낌이 확실히 노트북으로 쓸 때와 다르기는 합니다. 그러다 보니 노트북으로는 점점 편집만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글의 종류에 따라 꼭 휴대폰으로만 써야 하는 글이 있습니다. 밖에서 지하철에 몸을 싣고 쓰는 글이 그렇습니다. 지금 이 글처럼 감상이 별로 없는 정보의 나열일 때는 특히 그렇습니다. 사실을 쓰는 것이지 스스로 들여다볼 필요까지는 없기 때문에 매우 얇은 함석 같은 느낌을 주는 글들 말입니다. 느낌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 같은 글이라 묵직한 기계를 사용합니다. 기계나 키보드의 느낌에 따라 글의 느낌이 영향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글의 종류에 따라 도구를 고릅니다. 도구를 종류별로 쌓아두는 것이 문제이지 골라가며 사용하는 건 문제가 아니지요. 즉, 이렇게 도구를 이것저것 사용하더라도 글쓰기를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될 것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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