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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Oct 05. 2024

글을 쓰기 위한 명상

명상은 머릿속을 비우는 행위이다. 머릿속을 비운다는 말은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에게는 익숙한 이미지일지 모르겠지만 서양에서는 대단히 신비스러운 종교적인 의미로 다가가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이미지가 돌고 돌아서 우리에게도 명상이 종류를 불문하고 종교적인 행위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명상은 대중적으로 퍼뜨리기 위해서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한편으로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어쩌고 하는 말을 참고하자면 일종의 환기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파티에서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나서 소파에 몸을 푹 빠뜨린 상태 같은. 그래서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던 생각들을 모두 내보내고 하나씩 천천히 다시 들여보내는 과정을 가지는 그런 것이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꼭 거치는 과정을 리추얼이라고 하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의식적으로 가지는 리추얼은 하루를 생생하게 만들어준다고 한다. 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이런 말을 하지만 내 생각에는 돈벌이가 잘 된다거나 하는, 생활에서 신바람 나는 뭔가가 있다면 그런 건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런 선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아무래도 대문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고, 일의 시작점을 찍는 것은 어쩌다 보니 시작하게 되는 것보다 낫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휴대폰을 본다. 이메일을 확인하고 지울 것은 지우고 다시 읽을 만한 것만 놔두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보지 말고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하지만 나중에 내 사업을 하게 되면 그렇게 할지 몰라도 지금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영어 공부라던가 할 게 많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리추얼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 잘 모르겠으면 도움을 요청하고 책을 찾아보겠지만 다 해 보고 돌고 돌아서 이렇게 왔으니 계속 가는 수밖에.
때로 옷을 갈아입고 글을 쓰고 출근을 하는 일도 가끔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글을 한 편 쓰면 꼭 마무리까지 해야 하는 성격이라서 차라리 글감노트에 메모만 하고 마는 일이 많다. 그리고는 그 글감노트에 있는 것으로 글을 쓰려고 망설이고 있고 말이다.
지난번에는 연필을 샀다. 연필가격도 올랐다고 생각했지만 나머지 필통이나 지우개 가격을 생각하니 그리 많이 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글을 쓰고 나서 나중에 보았을 때 연필로 쓴 것들이 번져서 읽지 못하게 되는 일이 있어 필기구를 바꾸어 가다가 이제는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생각해 보니 글감노트는 나중에 읽으려고 쓰는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단기간만 보는 글이기 때문에 연필로 써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핑계는 많다. 볼펜도 좋고 마지막으로 손글씨를 쓸 때처럼 만년필도 좋고, 심지어 샤프도 몇 자루나 굴러다니고 있다. 그렇지만 연필을 선택한 것은, 솔직히 연필로 글을 써 본 일 자체가 초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눈앞에 굴러다니는 게 연필이어서 그걸 사용해서 메모를 해 보았을 뿐이지 제대로 글을 쓸 일은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사용해 보기로 한 것인데, 이게 의외로 앞에서 말한 명상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 글씨를 쓸 때 서걱거리는 느낌은 샤프를 사용할 때와 비교해서 생각보다 너무 다르다. 오히려 만년필을 사용할 때와 비슷한 것 같다. 내가 'HP'심을 좋아하기 때문일 뿐일지도 모른다. 다른 심으로는 아예 써볼 생각이 없지만 미술 시간에 써본 사람은 누구나 알듯이 '4B'심을 사용하면 확실히 더 부드러울 것이다. 'HP'심으로는 글을 쓰면서도 볼펜보다 덜 부드럽기 때문에 글씨가 조금은 덜 흘려 써진다. 상대적으로 묵직한 펜 종류를 좋아했는데 균형점 같은 건 없는 가벼운 점도 새삼 신선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글쓰기의 리추얼이 생겼다는 것이다. 필통과 연필을 사면서 연필깎이도 함께 구입했는데, 유리병 모양으로 된 브랜드 제품이다. 비싸지는 않지만 연필을 깎으면서 병 속에 나무가 쌓이는 모습이 제법 낭만적이다. 옛날에는 이렇게 손에 들고 깎는 제품은 연필에서 꺼끌꺼끌한 느낌이 나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면 어차피 나무가 노출된 부분을 잡고 글씨를 쓰지는 않으니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왼손에 연필, 오른손에 유리병 연필깎이를 들고 돌리면 글씨를 쓸 때와는 또 다른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양쪽 손바닥으로 나무가 깎여나가는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연필을 깎는 것은 어차피 그전에 글씨를 쓰면서 닳은 정도만큼만 하면 되므로 생각보다 시간은 매우 적게 걸린다. 그렇지만 눈과 귀와 손바닥으로 그렇게 한바탕 감각을 자극하고 나면 글쓰기에 그렇게 좋은 명상이 없는 것 같다.
필통에서 연필을 꺼내고, 연필 뚜껑을 열어서 연필 뚜껑은 필통에 놓고 연필깎이를 들고 연필을 깎는다. 그러면 글을 쓸 준비가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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