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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Nov 12. 2024

습관과 글쓰기

연필로 글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좋지 않다. 연필을 글을 쓴다고 할 때 상상이 가는 모습은 20세기 초의 유명한 작가들이 카페에서 골몰히 생각하며 멍하게 있다가 어느 순간 줄거리가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연필을 끄적이다가 다시 문득 연필을 깎으며 멍하게 있는 그런 모습이지만 실제로 나는 연필로 그렇게 긴 글을 쓰지도 못할뿐더러, 조금만 길게 쓰면 나중에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너무 잦아서 최대한 압축해서 말 그대로 글감만 적어 두어야 하기 일쑤이다. 그것도 딱히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 글감이 떠오를 때마다 적어 놓는 것은 언제나 도움이 되기도 하고, 또 연필로 적을 때는 볼펜으로 적을 때와 달리 '임시 기록물'이라는 인식이 또렷하기 때문에 요약도 조금은 더 잘 되는 편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머릿속으로 잠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연필을 깎는 것이 좋은데, 짤막짤막하게 요약만 적다 보니 연필을 깎을 일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뾰족한 연필을 굳이 다시 깎아서 낭비할 필요는 없는데 사실 기다란 연필로 기록하는 건 초등학교 시절(사실 국민학교 시절) 한글 연습 숙제로 교과서에 미농지를 대고 글씨를 베껴 쓸 때로 돌아가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그냥 원통형의 모양에 칼날 하나 들어 있는 연필깎이를 사용하기 때문에 원한다면 시간만 들이면 당장 연필이 짧아질 때까지 계속 깎을 수 있지만, 옛날 샤파 연필깎이를 사용할 때는 그런 염려는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판매하는 기차나 자동차 모양보다 이전에 나온 삼각형 모양의 샤파를 1988년부터 25년 동안 사용해 왔었다. 더 이상 프레임 부분의 플라스틱이 버티지 못하고 부스러져서 버렸지만, 호돌이가 그려져 있던 그 샤파를 손으로 누르며 핸들을 돌리던 느낌이 너무 익숙해서 기차 모양이나 자동차 모양은 사용할 때마다 이질감이 너무 강하다.
한 달여 후에 해외에 나갈 일이 있는데 그때는 노트북 대신 연필을 가지고 나가 볼까 생각 중이다. 연필로만 기록을 잔뜩 남겨서 가지고 들어오면 그중 몇 편이나 기억을 다시 해 내고 글을 쓸 수 있을까? 뭐 그런 것을 테스트해 보겠다는 그런 건 아니고, 다른 수단을 모두 제쳐두고 연필로만 이야기를 적게 되면 새로운 뭔가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가깝다. 당연히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지만, 사실 이렇게 그런 게 없을 거라는 것을 명확하게 아는 상태에서는, 그런 게 나타나지 않더라도 실망할 일이 없고, 혹시 환경이 바뀌면서 건질 게 생긴다면 좋은 일이니까 나에게는 오히려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글을 쓰는 일이 주업이라면 감히 생각도 못할 도박일까? 어쩌면 글을 취미로 쓰기 때문에 가능한 실험일지도 모르겠다.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키가 눌리지 않을 정도의 세기로 엄지를 제외한 모든 손가락을 제자리에 두고 키에 톡톡, 두 번 두드린다. 그것이 키보드로 글을 쓰기 전의 리추얼이다. 연필을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한 바퀴 돌리면서 깎아야 하는지 들여다본다. 깎아야 하면 깎고 깎을 필요가 없으면 연필 뒤쪽 끝을 종이에 대고 톡톡 두 번 두드린다. 내가 쓰는 연필은 모두 뒤에 지우개가 달려 있기 때문에 카페에서도 그다지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지우개 달린 연필을 다 쓰고 나면 습관이 바뀔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싼 맛에 지금 사용하는 연필을 한 번에 60자루를 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만년필을 쓸 때도 리추얼이 있었다. 만년필을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으로 뚜껑을 당겨 연 후 만년필을 오른손으로 쥔 채로 뒤집어서 뒤쪽에 뚜껑을 끼우는데, 매우 천천히 끼우는 것이다. 그러다 글을 쓸 준비가 되면 그제야 딸깍, 소리가 날 때까지 끝까지 끼우고는 바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그게 가장 요란하지 않은 리추얼이었던 것 같다. 볼펜은 뒤쪽을 눌러서 심을 나오게 하는 볼펜은 딸깍딸깍 거리기 일쑤고 말이다.
키보드를 치는 것도 어쩌면 십 년만 지나도 지금 타자기를 보듯 노스탤지어 가득한 행위, 효율은 떨어지지만 글을 써야만 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는 도구 정도로 전락할지도 모르겠다. 처음 반지의 제왕이 탄생한 것은 잠자리에 드는 아이에게 해줄 이야기를 즉석에서 지어내다 보니 스케일이 커져서였다고 들었다. 백설탕을 좋아해서 곰보가 되어 별명조차 백설이 되었던 공주 이야기도 딸아이에게 백설공주 이야기를 조금 더 웃기게 만들어 주다 보니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내가 챗지피티에게 이야기를 해 주고 받아 적으라고 한 다음, 정리만 시키면 줄거리를 앞뒤로 알아서 맞추어 어엿한 이야기를 탄생시킬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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