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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어느 날

by 루펠 Rup L

2025년 2월 초의 어느 날, 새벽이라면 새벽이고 아침이라면 아침인 여섯 시에 일어나니 안전 문자가 잔뜩 와 있었다. 어젯밤에도 왔던 내용이다. 눈이 많이 내리니 운전을 하게 되면 안전거리 확보에 유의하고 결빙 구간이 있을 수 있으니 서행하라는. 지난번 블랙 아이스라는 도로 표면 결빙으로 사십몇 추돌 사고가 났을 때도 생각했지만 집에서 출발해서 삼십 분 넘게 운전하는 동안 노면에 문제가 없었다면 사람은 쉽게 마음을 놓는 법이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부터 오늘은 그냥 차를 두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야겠다고 생각한 터였다. 그런데 밖을 내다보니 눈은 아직 쌓이지 않았지만 눈발이 날리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그때는 단순히
'여기는 눈이 오지 않더라도 어차피 중간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차를 안 가져가기로 하기 잘했다.'
는 생각만 했다. 미친 듯이 서해에서 생겨나는 눈구름을 보여주던 뉴스 화면도 떠올랐고. 그러다 아내가 방금 내려 준 커피로 마치 잠에서 깬 강아지가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곳곳을 확인하듯 반갑게 집 전체로 커피 향이 진하게 퍼질 때 문득
'여기가 눈 오는 산사와 다를 게 뭔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이라고 생각을 했다. 나는 엄밀히 말하면 산사의 대척점에 있다는 것을 머리가 알고 있다. 산사는 산속으로 구불구불 올라가 눈이 내리면 다시 나오기 힘든 곳이다. 눈이 내리면 차를 끓이고 커피를 내리고 다른 희망은 모두 접어둔 채 있는 재료만으로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곳이다. 눈이 내리는 것은 축복도 저주도 아닌, 그저 원래 그런 장소 속으로 내가 스스로 걸어 들어갔을 따름이다. 반면
'와, 산사에 있는 기분이다!'
라며 커피를 마시면서 글을 쓰는 내가 있는 곳은 십 분이면 걸어서 지하철 역이 있고 바로 앞에 있는 사 차선 도로를 타면 십 분이면 강변북로와 한강이 나오는 시내이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대형 건물이다. 산사에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은 위치도 시간도 모두 상관없이 그저 어두컴컴한 공기 중에 하얗게 흩날리는 눈발 단 하나 때문이다.
그걸 아무리 기분만이라고 말해도 이것이 과거 회상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산사라는 곳이 한 번쯤 처박혀서 글만 쓸 수 있다면 가보고 싶은 막연한 후보, 호텔과 산사 중 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상상했던 모습이 떠오르는 이미지일 따름이지 실제 어릴 적 다녔던 향림사나 다큐멘터리로 보았던 절이나 직접 가 보았던 수덕사, 개심사 같은 절의 모습은 조금도 닮지 않았다. 호텔이라 말해도 막연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살짝 코토르의 아스토리아나 이스탄불의 페라팔라스 정도의 내부 구조 정도는 떠오르는데, 산사라는 장소에는 아직은 그런 모델이 없다. 그러다 보니 상상에 상상이 쌓인,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순수한 상상이 덮어지고 덮어져 마치 투명한 비닐만 잔뜩 쌓아도 하얗게 보이듯이 현실에 대해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투명한 상상이 두꺼워지다 못해 마치 과거를 떠올리거나 꿈을 떠올리듯이 자기만의 나름의 형체와 색깔을 가지고 드디어 오늘 같은 날이 되어 마치 내가 그 안에 있는 것 같은 착각조차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런 분위기에서 글을 쓰며 시작하는 하루는 너무나 반갑다. 잠시 후 일곱 시면 에스프레소 잔에 반 남은 커피를 입 속에 털어 넣고 눈 오는 거리를 향해 출근길을 서두를 것이다. 그리고 눈발이 날리는 거리를 어서 지하철 역에 도착하도록 서둘러 걷겠지.
산사건 도시건 내가 두 다리로 걸어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똑같다. 상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이제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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