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에센셜 한강을 읽고
내가 투명이라는 것에 주의 깊게 생각할 계기가 될 만큼 그 특성이 내게 성큼 다가온 때가 언제인지. 먼 옛날 나에게는 장난감 비행기 창문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레고 투명 블록이 있었다. 해변가에서 닳고 닳은 유리 병조각도 있었다. 하지만 기능상 투명해야 하는, 목적상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런 당연한 투명이 아니라 왜 투명한지, 왜 투명해야 하는지, 투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게 되었던 건, 아마도 2001년 겨울, 원빈의 화보집을 보았을 때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사진집을 무척 좋아했지만 사진작가들의 절묘한 구도 선정이라던가 메시지가 아닌 단지 편안하게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으로 보는 그런 화보를 좋아했기에 인테리어 잡지를 종종 구독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보고는 했다. 아무 이유 없이 창문을 (내다보는 대신) 들여다보는 그 행위는, 고층 건물에서 창밖으로 빨갛게 줄지은 자동차들을 벽지와 같은 초점으로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창밖을 보는 것은 삼십 분을 넘기지 못하고 싫증이 날 수 있지만 사진은 충분히 보았다고 생각되면 페이지를 넘기면 그만이라 더 가벼운 취미가 아니었을까. 나는 원빈의 팬도 아니었고 그 출판사나 사진작가도 몰랐지만 사진의 질감과 느낌 때문에 화보를 구입했었다. 연예인 화보집은 보통 색상도 쨍한 느낌이고 주인공만 어마어마하게 클로즈업되어 있어 조금만 보고 있어도 피곤한 느낌이 들어서 기피했는데 당시 원빈의 화보는 배경과의 균형도 그렇고 두고두고 보아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진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화보 중간에 원빈이 노트북을 가지고 침대에 있는 사진이 있는데, 그 노트북이 그 유명한 스티브잡스의 재데뷔작인 아이북이었다. 당시 데스크톱과 마찬가지로 녹색, 파랑, 분홍의 투명한 케이스로 내부의 회로가 보이면서도 동글동글한 디자인이 그 회로들과 함께 뭔가 계산된듯한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깨끗한 흰색의, 차분하고 정돈된 듯한 가지런한 직선으로 이루어진 컴퓨터만 보다가 색이 물든 투명한 곡선을 보니 그 투명이라는 것이 특색이 되는, 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는 새로운 시각적 충격이 지금도 또렷하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머릿속에 내리 꽂혔다. 아마 뇌가 부드러운 부분이기에 충격보다는 재미라는 형태로 다가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동안 실제로 투명한 케이스 디자인은 다른 회사들도 눈길을 끌기 위해 한 번쯤 손을 대보는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컴퓨터는 컴퓨터다. 아무리 곡선으로 동글동글하게 하더라도 어쨌든 그 표면은 단단하다. 힘을 가하면 찢어지는 대신에 갈라지고 깨진다. 이십 년이 넘도록 나는 투명이라는 단어를 보면 차가운 유리나 플라스틱을 먼저 떠올렸다. 그러나 그 화보의 색감과 질감이 전에 알고 있던 동글동글하면서 투명하고 단단한 컴퓨터의 느낌을 상당히 완화시켜 주면서 아이북은 내 머릿속에 부드럽고 독특한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내가 디에센셜 한강 편을 구입한 건 아마 작년 초로 기억하는데,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고른 것 같지만 실제 구매 기록은 찾지 못했다. 당시 채식주의자를 읽고 망설이다 고른 것이었는데, 역시나 망설였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태 읽지 못하고 책꽂이에 꽂아둔 채로 거의 십 개월 넘게 방치해 두었었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알게 모르게 답답한 느낌이 들면서도 그렇게 답답한 이유를 알기에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하지만 그 이유조차 내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일 뿐 그게 맞는지도 확신이 들지 않는, 그야말로 안갯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나는 식물이야'라는 말이 백 년 전, 이백 년 전 "나는 백인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라고 목숨을 걸고 외치던 수많은 유색인종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외치는 동족을 말리다 결국 포기하고 안타깝게 바라보던 사람들도.
하지만 희랍어 시간에서는 어느 정도 안개가 걷혔다. 얼마 전 서점에서 지나가다 보니 그 작품만 따로 출판한 책도 표지가 참 예쁘다. 에센셜에 없었더라면 그 책도 가지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속마음의 고백들, 아니 고백이라기엔 너무나 적나라하게 작가에게 해부당하는 실체가 순간순간의 단면을 또렷하게 보여주는데 사실 단면이 아닌 모습도 충분히 보여주기에 투명한 컴퓨터 케이스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내가 아이북을 떠올린 건 '투명'이라는 막연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가느다란 손목이 투명하면 그 안의 핏줄이 보이고, 힘줄이 보이고, 근육이 보인다. 그 모두가 투명하면 그제야 뼈가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투명하기만 하지는 않다. 하얀 햇살을 받아, 부드러운 솜털과 함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그러나 엄연한 반투명인 피부와 그 속으로는 뼈의 분자 하나까지 투명한, 그래서 마치 투명한 벨벳이 물로 팽팽하게 부푼 그런 질감의 몸이 나타난다(아이들에게 한대 유행했던 실리콘 장갑으로 만든 '버블리' 같은 이미지다.).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해할 필요도 없이, 그것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간이었다. 이 이미지는 이십 년 만에 투명에 대한 머릿속의 대표 이미지를 바꾸어 버렸다. 이야기는 여전히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고, 읽어 나가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아름답게 투명할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은 강렬하다.
보드랍고 새하얀 투명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전에 책은 끝났다. 그리고 더더욱 무거운 마음에 서점에서 진열된 것조차 펴볼 수 없었던 '소년이 온다'를 읽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책을 읽고 나면 왠지 투명은 더 이상 하얗지 않게 될 것만 같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산에 걸린 붉은 구름은 더 이상 아이들을 위한 민트색과 분홍색의 솜사탕에 비유할 수 없다. 오늘의 기분 좋은 충격이 하루라도 오래 가면 좋겠지만, 원래 그건 하얗지 않은 것을 하얗다고 믿으며 눈을 감는 것과 같아 보인다.
그래, 투명은 여기까지다. 들을 수 있는 만큼 더 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