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꿈이야기

잭포트에 거름을 주자

by 루펠 Rup L

90년대의 대학교 캠퍼스는 평화로웠다. 그 평화는 지금에야 깨달은 그 평화 그대로였다. 여기저기 붙어 있는 대자보와 그 사이 풀밭에서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일부와 벤치에 기대어, 바위에 기대어 책을 읽는 학우들, 학생운동이나 정치에 대해,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 토론하는 학우들. 사회로 나오기 직전의 과도기에서 그 시절은 말 그대로 나에게 모든 것의 씨앗이 되었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사회성이 길러진다고 하지만 그때는 사회성이라는 것에 대해 온몸으로 맞부딪히는 시기일 뿐이었고 진정 사회 안에서 보호받지 못할 경우에 대비한 선행들, 자신 있는 삶을 위한 내 모든 행동에 대한 이유들을 만들어가는 시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그때 필요한 것이 있을 수 있으니 회색 지대를 반드시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일부는 이미 그때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 나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나답게 모든 것에 확신하는 듯한 그 말투, 문장들 자체가 내용보다 매혹적이었던 것 같다. 그 말투에서 나오는 확신은 성경의 문장들이 지닌 확신보다 더 강력했다. 어떤 논리도 깨부술 수 있는 힘 자체로 읽혔던 것이었다. 지금도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느낌에 전율이 흘렀던 팔의 소름은 기억이 난다.
오후 네 시가 지나자 햇빛이 조금씩 사그라들었고, 학우들도 하나 둘 풀밭으로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연진은 학생회에 수시로 드나들었기에 우리 무리에서는 소식의 창구나 다름없었고, 그녀가 오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하던 일에서 긴장을 풀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서울대에서 시위를 계획하고 있어."
"우리도 가야 하나?"
"모르겠어. 투표를 할지, 그냥 일단은 연대 요청이 올 때까지 기다릴지."
"언제까지?"
"야, 그런 건 서로 미리 얘기하는 거야. 연대를 요청한다고 성명서 발표하고 다시 성명을 발표해서 그런 요청받은 적 없다고 반복하고 그럴 게 아니잖아. 우리는 분열되면 안 된다고."
"그게 아니라 투표를 하게 될지 아닐지는 어떻게 아냐고?"
"일단 기다려 봐. 안 하게 되면 내가 말해줄게."
"우리한테 제일 먼저 알려줘야 해?"
"알았어."
이런 대화가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것이 그날 그 시각은 왜 갑자기 생소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하얀 바탕의 플래카드에 모든 색을 흡수해서 모든 색을 반사하는 흰색과 대비된다는 검은색 페인트로 쓴 구호를 보았다. 검정은 모든 색을 흡수한다던데, 플래카드의 검은색은 유성페인트를 사용해서인지 햇빛에 반사되어 맨 위의 획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덥진 않았지만 목덜미에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언젠가 선배 하나가 말했다.
"소설을 쓰겠다고 소설책을 쌓아두고 읽는 녀석들이 제일 안타까워. 그게 뭐 하는 거야? 남의 소설을 베끼겠다는 거야? 대통령이 되려면 정치를 공부하거나 사회에 내가 왜 필요한지를 알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일단 정계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야지, 출마할 생각만 하고 있으면 길이 어디서 나오겠어?"
"그럼 무조건 쓰라는 말이에요?"
"그게 소설만 읽는 것보다는 낫다는 거지."
"안 그런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그게 제일 웃겨. 있을 수도 있지. 근데 에디슨 갖다 놓고 '나도 대학 안 갈 거야.' 하는 건 웃긴 거야. 지금 내가 있는 상황에 맞춰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맞지 예외 같은 상황, 나와 맞지 않는 상황을 가져와서 '그러니 나도 언젠가 되겠지' 하면 안 된다는 거야."
뭔가 진지한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서 내가 물었다.
"나도 나중에 소설을 쓰고 싶은데 그럼 뭘 하면 될까요?"
"살아야지. 인생을 살아야지. 인생 사는 이야기들도 읽고, 사회 돌아가는 이야기들도 읽고."
"소설 읽지 말라면서?"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을 잘 쓸 수 있겠지 따위의 생각으로 읽지 말랬지 누가 담쌓고 살래? 세상이, 사회가, 개개인의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 깨달을 수 있다면 그런 것도 괜찮고, 경험을 쌓아도 괜찮은 거야."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요?"
"잘 들어봐. 네가 소설을 쓰는데 나이 50이 돼서 잭포트가 터진다고 가정해 봐."
"잭포트요?"
"카지노 슬로트 머신에서 한 방에 따는 걸 잭포트라고 해. 야, 그것도 모르면서 무슨 세상을... 야, 됐다. 하던 얘기나 계속할게."
"네..."
"그럼 그게 네가 살아온 인생과 이제까지 쓴 것들과 읽은 것들이 만나서 그렇게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하냐, 아니면 그때까지 줄창 읽기만 한 것들이 드디어 빛을 본 거라고 생각하냐?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그때까지 읽기만 했으면 그러긴 힘들겠죠."
"그거야. 네가 잭포트를 터뜨리게 되고 그 소설을 네가 농사를 지은 거라고 생각해 봐. 열매를 제대로 맺게 하려면 농사를 지어야지, 농사 공부만 하면 안 돼.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이거야."
선배는 나를 쳐다보더니 담뱃불을 끄고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소설을 쓰겠다고 소설만 읽잖아? 그건 사방에 널려 있는 거름을 포기하고 굳이 비료를 주는 거야. 비료를 주지 말고 거름을 줘."
"아..."
"비료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경험이 쌓여서 어떤 영양분이 부족하니 그것만 보충하면 되겠다 싶을 때 그렇게 하는 거고 처음부터 모든 비료를 쏟아 넣으면 그 땅은 망가져. 그런데 소설만 읽는다? 그럼 그건 심지어 모든 비료를 쏟아 넣는 것도 아니지."
"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난 글도 모르고 쓰지도 않고 소설 재미있는 줄도 모르지만, 네가 내 후배니까, 네가 뭔가 쓴다면 세상 전체가 거름이 돼서 모두가 네 글을 떠받쳐주면 좋겠어. 됐지? 오늘 토론은 여기서 끝. 아 머리 아프다. 연료 넣으러 가야지."
"연료요?"
"응, 내 뇌는 미래형이라 알코올로 돌아가."

그 이야기는 아직도 유효하다. 아직 나는 잭팟을 터뜨리지 못했기에 아직도 내 인생 속으로 거름을 준다. 두 눈으로, 두 귀로, 온몸으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주선 비상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