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꿈이야기

껍질, 안녕.

by 루펠 Rup L

아파트에는 내가 알기로 지하에는 주차장밖에 없었다. 분양받아 처음 하자가 있는지 보러 왔던 날, 붐비던 지하 주차장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풍선으로 장식한 안내원 책상과 통신사부스, 가전제품 공동구매 부스 등이 지하 1층 주차장 여기저기에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지하 3층까지 주차장은 이어졌고 그 이후로 입주해서 사는 동안, 차를 가지러 갈 때나 차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올 때나 이상한 것을 느낀 적은 전혀 없었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12일 연속으로 체감온도가 50도를 넘기며 절대 수그러들 것 같지 않던 더위가 처음으로 꺾인 날이었다. 이번에는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에 늘 주차하던 지하 1층에 자리가 하나도 없었지만 우리 동과 가까운 바깥 주차장에 대는 대신 날아오는 나뭇가지들을 피하기 위해 지하 3층까지 내려가서 주차를 했다. 그리고는 한 번도 걸어 다녀보지 않은 통로를 찾아 지하에서 헤매는 대신 그냥 운동할 겸 지상으로 바로 연결된 계단을 찾았다. 더위 때문에 여기저기 간판들도 본드 자국이 선명한 채로 떨어져 내리고는 했는데, 지하는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밖과 연결된 계단이기도 했고, 또 지하 주차장에 통하는 문도 늘 닫혀 있기도 해서인지 더위의 영향을 받은 듯 떨어진 안내판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안내판은 안내판이 아니라 안내판을 가리기 위해 벽과 똑같은 색으로 칠한 철판이었다. 별생각 없이 흰색 바탕의 안내판 위에 덧대고 눌러보았지만 이미 본드는 모두 말라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붙을 리가 없었다.
다시 바닥에 잘 기대어 세워 놓고 계단을 올라가려다 페인트와 같은 색의 판으로 가리려던 게 뭔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무심코 하얀 판을 쳐다보았다. <지하 4층 강당>이라는 검은 글자가 선명했다.
내 기억에 이 아파트는 지하 3층 주차장이 가장 아래층이다. 그런데 더 아래에 강당으로 가는 길이 있다니 호기심이 들어 지하 3층까지 내려오는 계단 뒤로 가 보았더니 정말로 문이 하나 있었다.
'이게 강당 가는 길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손잡이를 돌렸다. 내 긴장과 달리 문은 늘 사용하던 것처럼 부드럽게 열렸다. 들어가 보니 웬만한 학교 강당만 한 강당이 정말로 있었다. 주차장과 달리 어둑어둑했지만 무대에 조명이 조금 켜져 있어서 좌석들을 내려다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무대 오른쪽 위에 있었고 앞뒤로는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뒤로 가는 계단으로 내려가면 좌석으로 바로 통해 있었지만 좌석은 왠지 꺼려져서 앞쪽으로 내려왔다. 뒤로 가는 계단은 일반 계단이었다. 앞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바닥이 유리여서 약간 무서웠다. 마지막 계단까지 내려왔을 때 그 바닥 유리가 섀시가 있어서 위로 들어서 열 수 있는 구조라는 것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 아래에는 관중석용 조명을 점검할 수 있는 통로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문이 열려 있었다면 미처 보지 못하고 떨어질 뻔했다는 생각에 두리번거렸을 때, 조명을 점검하는 통로에서 유리계단 오른쪽으로 끝에 문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문의 틈으로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왔다. 사람들이 있어도 여기 주민이라면 설마 뭐라고 할까 싶어서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내부는 뭔가 연구실 같은 분위기의 장비들이 가장자리에 가득하고 가운데에는 짐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도 물론 걸어 다니고 있었는데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모두 단발의 여자들이었고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는데 왠지 불편한 듯 천천히 걸어 다녔다. 대략 여섯 명 정도였는데 내가 방해가 될 것 같아 얼른 빠져나가야겠다 싶었지만 뒤를 돌아보니 막상 강당에서 열고 들어왔던 그 문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반대쪽 끝에 유리문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원래 그리로 가려고 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걸었다. 여자들은 모두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리고 한 명은 가까이에서 지나가는 그 순간, 입 옆에 뚫린 구멍이 보였다. 멀리에서 보았다면 그냥 짙은 반점이라고 치부했을 수도 있지만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지나오는 동안 그녀는 실제로 시선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이 내 앞 어디를 향하고 있었지만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강한 것으로 보아 그 구멍 안의 무언가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까지 걸어오는 동안 두 번째 여자를 지나쳤을 때, 그 여자 역시 구멍 안에서의 시선이 나를 관찰한다고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여자가 비틀어진 각도로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유리문을 열고 나오니 방화문이 닫혀 있었다. 여자들이 혹시 쫓아올까 싶어서 문을 열였는데 의외로 쉽게 열렸다. 문을 열고 나와 얼른 다시 닫았는데, 바깥에서 보니 이 문이 단순히 벽으로 보일 만도 했다. 손잡이가 없이 단순히 골목의 막다른 끝처럼 보이게 모양부터 색까지 교묘하게 꾸며 놓았던 것이었다. 통로를 따라 걸으니 교묘한 경사가 있는 건지 지하 3층 주차장이 나왔다.
일부러 다시 처음의 그 계단으로 가 보았다. 어느새 내가 세워 놓았던, 표지판을 가리는 철판이 표지판 위에 잘 붙어 있었다. 그걸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올라오는데 어떤 검은 정장을 입은 여자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얼굴 어디에도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여자의 멍한 표정과 초점 없는 눈과 느린 움직임으로 볼 때 구멍이 실제로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가 여전히 멍한 표정인 채로 뜬금없이
"저하고 같이 가요!"
라고 밝은 목소리로 외치자 순식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에요, 저 먼저 갈게요!"
라고 말하고 그녀를 지나쳐 계단을 뛰다시피 올라왔다. 그녀는 팔을 뻗었지만 너무 느렸다. 그녀가 몸을 돌려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적당히 쫓아올 수 있는 속도로 계단을 올랐고 1층으로 나와 바로 다른 건물 앞에 숨어 그녀를 몰래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구멍이 있었어야 하는 위치를 나를 향한 채로, 그러니까 얼굴은 왼쪽을 바라보는 채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를 보지 못했을 테지만 내가 있는 방향은 아는 것 같았다. 살며시 몸을 피해 골목 뒤로 돌아 반대쪽으로 갔다. 그녀가 천천히 움직여 대충 내가 있던 곳으로 걸어갔다면 지금쯤 도착했을 만한 위치를 생각해 보고는 그 위치가 잘 보이는 곳으로 가 보니


이미 그곳에는 그녀가 멍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는 구멍을 나를 향한 채로 멍하게 입술을 느릿느릿 움직여 나에게 말했다.
"껍질은 놓고 이제 가."
나는 잠에서 깨었다. 껍질을 그곳에 두고 온 것이다. 꿈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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