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송이가 떨어진다. 하늘하늘 바람조차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흩날리며 지그재그로 살포시 내려와서는 내 체온에 녹아내린다. 그 눈송이가 하나 둘 모여 함박눈이 되어 내린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올 필요도 없다. 그 상태로 시간이 가기만 기다리면 눈이 쌓인다. 처음 내리기 시작할 때는 바닥에서도 녹아내리는 듯하더니 내려오는 양이 녹는 양보다 많아지는 순간 바닥이 하얗게 얼룩지기 시작한다. 보고 있으면 지겹도록 느린 과정이지만 잠시만 다른 곳을 보고 오면 어느새 하얀 하늘과 하얀 공기 아래에 새로운 공간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느리지만 지겹도록 긴 시간 동안 멈추지 않은 눈은 이제 한 번 덮은 세상을 계속해서 몇 겹이고 반복해서 덮어간다. 그렇게 쌓인 눈은 그 위를 걷는 사람들에게 사각사각 소리를 선물한다.
글자 하나하나는 가치가 없다. 그 글자들을 배열하기 위해 심상에 떠올랐던 것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글이 된다. 글자가 아니라 글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눈송이가 예쁘기는 해도 금방 녹아 버리듯이 글자 하나하나도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지만 글이 되지 않은 글자는 그저 흘러가듯 아무도 관심 없는 무늬에 불과하다.
그렇게 글자가 만들어 낸 문장들이 모여 글이 되고 그 글이 쌓이면 그 위를 걸어갈 때는 무슨 소리를 내게 될까. 수첩에 쓴 글이 모여서 제법 읽을 만해지면 그 글은 수첩의 종이를 넘기는 소리를 가진다. 오랫동안 누르며 꾹꾹 글씨를 눌러쓴 탓에 특유의, 눌림으로 인한 구조를 가지게 되면서 종이가 휘어지고 꺾이는 소리가 나게 된다. 단순히 펼칠 때뿐만 아니라 한 장 한 장 넘길 때도 그런 소리와 촉감이 글의 내용과는 다른, 외적인 배경이 된다. 하지만 인터넷에 저장한 글은 쌓인 기간의 흔적을 어떻게 가지고 있을까? 수많은 다른 컴퓨터 작업과 마찬가지로 딸깍딸깍하는 마우스 클릭소리로 기억을 남길까? 키보드를 치는 손맛이 될까? 그런 것들을 읽으면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까?
수첩에 글을 쓰다가 다음 단계는 워드 파일에 쓰는 것이었다. 쓰는 방식은 정확히 동일했다. 그냥 전에 쓰던 부분에 이어서 날짜만 쓰고 계속 쓰기. 그렇게 일 년이 지나면 인쇄해서 묶어서 보관했다. PDF 파일도 만들었지만 단지 백업과 검색을 위한 컴퓨터 파일일 뿐이고 다시 읽어볼 때는 그 종이 뭉치를 꺼낸다. 그래서 처음 읽을 때는 뻣뻣한 종이이지만 몇 번을 읽고 나면 앞장들은 넘긴 자국이 살짝 접힌 형태로 남게 되고 오른쪽 하단은 계속 넘긴 탓에 둥글게 올라오기 시작한다. 인쇄를 A4용지에 했기에 넘기며 볼 때의 느낌도 수첩과는 사뭇 다르다. 같은 종이이지만 상대적으로 넓은 면적 덕분에 수첩에서는 듣지 못했던 촤락 소리가 단 한 장만 넘겨도 들리고는 한다. 몇 장을 한 번에 넘길 때의 촤르르르, 타다다닥 하는 소리는 종이라면 무조건 따라오는 서비스인 듯하다. 그래서 해가 바뀌고 한 달만 지나면, 내가 지난 글을 그렇게 자주 살펴봐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작년의 기록은 납작한 직육면체에 맨 앞 한두 장은 가운데 약간 사선의 접힌 흔적이 있고 처음부터 중간까지는 오른쪽 아래 귀퉁이가 둥글게 말려 올라오려고 하는 겉모습으로 특징지어진다. 소리도, 촉감도 없이 책상에 던져진 종이뭉치 그대로가 그 이미지가 된다. 이 또한 완전히 덮어지지 않고 자꾸 커버 안에서 밖을 내다보려고 하는 듯한 수첩처럼 하나의 고정관념처럼 저장이 된다.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갈 때부터 다시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나갈 때까지 물리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수첩이나 인쇄물들은 그 나름의 이미지를 나에게 각인시켜 주고 나는 글에서 연상되는 생각뿐 아니라 그런 것들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도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글씨를 쓸 때 거친 듯하면서 부드럽게 지나가는 만년필 촉이나 묵직하게 마치 도장을 찍듯 글자가 새겨지는 듯한 키보드의 느낌은 글을 쓰고 싶게 만들기는 하지만 읽는 것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사항들이다. 계속 무언가를 읽게 만드는 것은 종이의 질감과 넘기는 촉감과 청각적인 효과들이다. 그래서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을 더 선호하는 사람으로 남게 될 예정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장 내가 쓰는 글들이 온라인상에 자동으로 저장이 되고 있고, 글이 지금은 눈송이처럼 우습게 보일 만큼만 굴러다니고 있지만 눈처럼 쌓인다면 어쩔 수 없이 일일이 출력하는 것보다 리스트를 보고 클릭해서 읽는 편이 훨씬 나을 거라는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온라인에서 글을 읽을 때 글을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 글 외적인 요소는 뭐가 있을까 하는 것을 궁금해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가 워드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글을 읽는데 종이 뭉치의 촉감을 느끼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다. 마찬가지로 온라인의 글도 결국 일 년에 한 번씩 출력을 하게 될까? 아니면 태블릿으로 읽으면서 컴퓨터로 읽을 때와는 또 다른 새로운 감각을 가지게 될까?
기술은 감각을 새롭게 해 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우연인 경우가 많다. 기술 발전 그 자체의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무한한 경험이 가능하지 않은 한 우연이 섞일 수밖에 없다. 나의 경험과 세상의 기술 사이에서 내가 쓴 글이 눈송이처럼 모여서 나를 다시 인도할 때 어떤 새로운 감각을 선물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