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든 마찬가지이지만 글을 쓰는 것도 요란하게 판을 깔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글을 쓰는 부분의 기능만 멈추게 되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제가 이런 것이 유독 글을 쓰는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랬다면 진작에 글을 못쓰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규정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일상생활을 하면서 글을 써보고 싶은 주제들이 떠오르면 메모를 남기거나 혹은 메모를 남기지 못해 무슨 내용이었는지 날려버리는 일들도 물론 있지만, '모처럼 글을 써 볼까?'라던가 '지금부터는 빈 시간이 생겼으니 글을 써도 되겠다.'라는, 글을 쓰는 행동과 그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시간 사이에 주객전도가 되는 순간,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때는 방법이 없습니다. 글은 안 써지고 딴생각만 들면 딴생각이 드는 대로 딴생각을 계속하면 됩니다. 그러면 실뭉치를 마구 당기다 보면 엉켜서 뭉치는 곳이 생기듯이 언젠가 손끝에 잡히는 뭔가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다시 어떤 주제를 끌어내거나, 혹은 관련된 경험을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곧장 그것에 대해서 써봅니다. 글은 써보고 안 되면 짧더라도 마무리를 하고 끝냅니다. 하지만 급히 달려들어 생각이 가지를 내밀기 전에 글이 앞서 나가버리는 경우가 그렇고, 타자 속도를 교묘하게 생각의 속도와 맞춰서 생각이 끊어지지 않게 해 주면서 따라가면 새로운 생각이 계속 흘러나옵니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 중 기차에서 자동차를 훔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이 아주 좋은 예시일 것 같습니다. 엄밀히 그런 장면은 다른 영화도 그전부터 많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다른 자동차를 올릴 수 있는 브리지카를 만들어 기차 옆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기차의 속도에 맞춰서 브리지카 속도를 올립니다. 속도가 똑같아지면 자동차를 운전해서 브리지카 위로 올라갑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자동차를 운전해서 땅으로 내려갑니다. 여기서 그 브리지카의 역할을 하는 것이 타자를 치는, 혹은 글씨를 쓰는 속도인 것이고 머릿속에서 쉬지 않고 흘러가는 생각을 종이 위로 내려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쓸 것이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넘쳐나서 쉬지 않고 써 내려가는 것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영감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니라서 그런 것을 기다리면 아마 몇 년 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씨앗을 뿌리듯이 일단 손을 대고 나서 식물을 기르듯이 글이 자라나는 모양을 보는 것이 훨씬 뿌듯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순수하게 시간이 나서 얼른 쓰고 가야겠다,라면서 쓰기 시작하면 3천 자, 4천 자가 되는 글이 나오는데, '30분은 시간이 남으니 충분히 2천 자는 쓰겠지?' 하면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앉으면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몇 번을 두드린다 해도 제대로 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사실, 아이디어는 저절로 내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재의식이 되었든, 전 인류의 지혜가 모여 있는 지성체로서의 우주의 존재가 있든 그 어떤 주장이 맞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이 아이디어는 내가 손을 뻗어서 끌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 틀림없습니다. 의지대로 해서 되는 것은 물리법칙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글은 물리 법칙에 의해 쓰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지대로 했다가는 그 노력한 시간만큼 시간 낭비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좀 인스타그램에 올릴 타이핑 영상이나 찍어 볼까 하고 자리를 잡았다가 이십 분 정도를 보냈습니다. 오늘도 잠깐 외출을 했는데 약간 쌀쌀하기도 했고, 그 와중에 햇살은 따뜻했고 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힐링이 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려고' 따로 떼어 놓은 시간이라서 글이 나오지 않으면 초조한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따로 떼어 놓지 말자고 생각을 하지만 뭔가를 '해야 한다'라는 것은 노력을 해서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것과 달리, '하지 않음'을 노력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그로부터 한참 뒤, 모카포트에 커피가 남아 있어서, 그 커피를 마시면서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으면서 동시에 집안을 둘러보게 되니 생각의 씨앗이 생겨났기 때문에 다시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오늘은, 혹은 이번 주는, 아니면 이번 달은 글을 더 이상 못쓰겠다, 같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글은, 제가 생각이라는 걸 하는 한, 무슨 내용이든 쓸 수 있습니다. 써야 하고요. 이제 제 자신이 보기에도 정서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에 의지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느끼니까요. BBC 셜록의 시즌1 첫 화에서 왓슨이 소설 셜록홈스에서 신문에 자신의 경험을, 그러니까 셜록홈스의 사건 해결 담을 기고하기 시작한 것처럼 블로그에 사건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하는 계기가 나옵니다. 하나의 설정 설명의 장면이기는 한데, 왓슨이 중동 전쟁에서의 후유증으로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지자, 상담사, 혹은 의사가 무슨 글이든 써서 내면에 있는 것을 내보내 보라고 권유를 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단지 소설적인 설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정말 효과가 클 거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오히려 셜록 드라마에서는 사건 이야기를 주로 하는 편이라 자신의 얘기보다 옆 사람 얘기가 많아서야 치료가 될까, 싶을 정도로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글로 '내 얘기'를 풀어놓는 것은 남들과 만나서 수다를 떠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일요일 오후, 어쩌면 내일 또다시 월요일이기 때문에 휴일을 꽉꽉 채워서 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글을 꼭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건 나쁜 건 아닐 겁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거겠지요. 어쩌면 글자가 인류의 발명품인 만큼 글을 쓰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글을 쓰는 것에 '써야 한다'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하지 말아야 한다'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조금 관대하게, 그리고 생각은 물 위에 띄운 성냥갑 따라가듯 여유롭게 그렇게 힘을 빼고 계속 나아가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