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에 대하여

by 루펠 Rup L

산을 오릅니다. 힘겨운 시간들을 지나고 어느 순간 걷는 것 자체에서 쾌락이 느껴집니다. 이제 다리가 아파서 오는 고통보다 산을 오르는 즐거움이 더 커지기 시작합니다. 그 즐거움은 점점 커지다가 산의 정상에 도착했을 때 절정에 이릅니다. 세상을 발밑에 두고 내려다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성벽에 깃발을 꽂고 적들을 향해 비웃음을 내비칠 때와 같은 승리감! 그 쾌락의 절정이 끝나면 남은 것은 다시 산에서 내려올 때의 고통뿐입니다. 무릎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내려와야 하는, 쾌락보다 다칠 수 있는 공포가 더 큰 시간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내리막길이 다시 평지가 되어 완전히 등산이 끝났을 때의 안도감이 온몸을 감쌉니다.
암벽을 오릅니다. 다리와 팔의 온 근육을 사용해야 합니다. 근육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리저리 뼈에 붙은 모양대로 당기지만 평소 훈련을 한 덕에 저 아래 깊은 곳으로 떨어질까 싶은 공포는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 큽니다. 한 칸 한 칸 오르면서 힘이 다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간혹 아래를 내려다보고 아찔함을 느끼지만 그 아찔함은 공포 자체가 아니라, 공포와 성취감이 3:7 정도로 섞인 술잔입니다. 그 술잔을 온몸으로 퍼지도록 들이마시며 다시 한 손 한 손, 한 발 한 발 위로 짚어 나갑니다. 암벽 꼭대기에서 모든 줄이 긴장을 풀고 땅바닥에 팽개쳐질 때, 어떤 부속 하나도 힘을 받지 않는 순간이 올 때, 방금 올라온 암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두 발로 든든하게 서 있음을 실감할 때의 승리감! 그 쾌락의 절정을 위해, 이 순간만을 위해 그동안 힘겹게 훈련하고 처절하게 근육을 짜 내며 올라왔습니다.
주사기에 액체를 살짝 채웁니다. 주사기 끝의 바늘을 보면 공포에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그러나 그 공포를 이기는 것이 쾌락입니다. 남들이 폐인이라 부르며 손가락질하고, 약을 넣는 것이 음식을 섭취하는 것보다 우선이라 피골이 상접했지만, 그 약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사기를 혈관에 찔러 넣을 때, 그리고 그 쾌락이 뇌를 정수리 아래 깊은 곳에서 뒤통수 쪽으로 비스듬히 꿰뚫고 올라가기 직전의 기대감이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그리고 쾌락이 실제로 온몸을 강타하는 순간, 다시금 유혹에 굴복했다는 자괴감이 듭니다. 그러나 그 자괴감은 금세 쾌락에 집중하며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쾌락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쾌락의 시간이 끝날 때마다 죽음이 몇 발자국 더 다가온 것을 실감합니다. 쾌락에 대한 기대감이 죽음의 공포를 덮었던 것입니다. 쾌락에 대한 기대감이 죽음의 공포보다 더 큰 것이 아니라, 단지 내 눈을 가린 것뿐입니다. 산 정상에 다 올랐을 때의 기대감이 낙하하여 온몸의 뼈가 으스러질지 모른다는 공포로부터 내 눈을 가립니다. 올라가면 올라간 만큼 다시 내려와야 한다는, 그 수고로움을 피하고 싶은 마음을 정상에 도착했을 때의 후련함이 덮어 버렸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리고 마약의 경우에는 너무나 극단적이지만, 쾌락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죽음의 공포는 더 살고자 하는, 덜 다치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본능적일 수도 있고 당연한 논리로부터 도출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쾌락은 그 정도를 불문하고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 버립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마치 처음부터 알지 못했던 것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죽음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 그것이 쾌락입니다. 하지만 쾌락은 눈은 돌리되 우리의 실제 위치는 삶으로부터 죽음 쪽으로 한 칸씩 이동시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점점 더 높은 곳을 향하게 하고, 점점 더 강한 자극을 향하게 하고, 점점 더 도전을 익숙하게 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에는 그렇게 하여 삶에 대한 느낌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반동의 역할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은 하루하루 갈수록 죽음으로 가까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가고, 죽음을 향해 남은 나의 인생은 하루하루 줄어들어 갑니다. 나의 생이 절정에 이른 순간, 내 나이가 태어나서 가장 많아진 순간이 죽음이 나를 삼키는 순간이자, 남은 시간이 가장 짧아진 순간입니다. 태양이 동쪽에서부터 가장 많이 이동한 순간, 더 이상 하늘에서는 이동할 공간이 없는 순간, 서쪽으로부터의 거리가 0이 된 순간이 바로 일몰의 비명이 핏빛으로 온 세상을 덮고 사람들이 회한과 마음속의 고요를 애써 삼키며 서쪽을 바라보는 순간입니다. 그 가운데를 일몰과 같이 만들어 예상치 못한 어둠에 숨을 죽인 직후 일몰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하고 아직 일몰까지 시간이 남았다는, 태양빛을 조금 더 누릴 수 있다는 희망과 기쁨을 주는 것은, 일식으로 갖은 두려움과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 불안감을 주다가 이윽고 일식이 다 끝나고 나서 다시 정상적으로 이동하는 태양을 발견하였을 때와 같은 느낌은 인위적으로 죽음에 가깝게 만들었다가 다시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쾌락과 같습니다. 쾌락은 일식이 시작되는 것과 같고, 일식이 찬란한 순간, 단 하나의 불꽃 속에 빛나는 반지의 모습이 되는 순간이 쾌락의 절정에서 그 모습의 아름다움의 허무함과 죽음에 가까워왔다는, 비정상적인 어둠의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이 걷히고 다시 삶은 시작되지만, 사람들은 그 안도감을 또다시 찾아 나섭니다. 마치 새벽에 아침이 온 줄 알고 깨었다가 시간을 보고 안도하면서 다시 잠이 들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쾌락이 죽음에 가까운 일이라면, 무언가를 향해 돌진할 때 삶이 아름답다고, '인생을 불태웠다'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부러워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는 '죽음을 불사하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대상이 남이 보기에 얼마나 자해적이고 허무한지, 위대한지, 아름다운지와 관련이 없습니다. 종교적인 열정이나 마약으로 자해하는 것이나 똑같은 눈으로 보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헌신이나 목에 핏대를 세운 정치 공세나 똑같은 광기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어쩌면 남의 시선을 밟으며 죽음을 향해 용기 있게, 두려움을 무시하고 걸어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일식인지 일몰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것이 온 땅을 집어 삼키는 일식이면 삶이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나서 사람들은 그 위대함에 찬양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단지 자신의 몸을 망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라면 또한 사람글들은 굳이 왜 그럴까 이해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식 속에서 삶과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이어져 있습니다. 죽음의 근처에 발을 담그고 놀지 않고는 삶을 삶답게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말라간다, 삶이 너무 단조롭다고 느끼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죽음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작게나마 갈망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작더라도 그 경험을 두려워합니다. 근처에도 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몰은 반드시 옵니다. 일몰의 순간, 자신의 삶에서 가장 먼 곳까지 왔다는 것을 감탄하며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종교적 관점이라면, 그렇게 돌아보면서 죽음에 가장 가까이 왔음을 두려워하면서 죽음 너머에서 쾌락 후의 두려움이 극복되는 순간 느낀 안도감의 궁극적인 형태를 맛보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일몰조차 일식의 궁극적인 형태로 인식할 수 있는 나의 존재가 계속해서 있다면, 그때는 우리가 삶 자체를 통해 누린 쾌락을 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일식을 만들어 일몰의 공포로부터 쾌락을 느끼지만 죽음 또한 실제로는 일몰이 아니라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거대한 일식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곧 우리 삶이 그 자체로 쾌락이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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