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을 때 잔잔하던 머릿속에 조금씩 잔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오히려 시끄러운 곳에 있을 때는 고요해서 색깔조차 순백색인 듯하던 머릿속에 조금씩 물결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물결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 그림자를 보고 짐작만 할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 그 물결이 조금씩 커져서 파도가 되고 나면 비로소 수면의 질감이 생겨나고 그 위로 포말이 되어 떠오르는 생각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안에 섬이 하나 있다면, 그곳에서 배를 타고 나가서 그 생각들을 모두 잠자리채로 걷어 오고 싶습니다.
아마도,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외부의 자극이 있을 때는 저의 외적인 눈은 물론이고 내적인 눈마저 모든 시선이 저의 외부, 현실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늘 그곳에 있는 생각의 바다를 보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점점 잔물결이 일어나고 파도가 보이며, 섬에서 파도에서 올라오는 생각들을 모으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반대로 생각의 바다로 나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곳에 없는, 그러니까 제 내면에는 없는 바깥세상인 현실만 보고 있으니 당연히 그곳의 바다를 볼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조용한 환경을 찾아 비로소 제가 저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하는 것은 쪽배를 타고 강줄기를 따라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마침내 제 곁을 지나던 잔물결이 점점 파도가 되어 그 거친 질감을 볼 수 있게 되는 것도 그저 기다려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제가 그런 물길을 헤치고 바다까지 도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에는 이것을 물을 끓이는 것과 비교해서 생각했습니다. 점점 머릿속에서 생각이 들어 있는 통에 열을 가하다 보면 마침내 끓어올라 그 안의 생각들이 물과 함께 증발해서 수증기와 함께 위에 맺히게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제 내면이라고 해서 제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어도 뭔가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 같습니다. 적어도 어부처럼 배를 타고 나가 생각을 거둘 수 있게 점찍어 둔 섬까지는 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을 거두어들이는 작은 섬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물길이 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배라서 반드시 정해진 그 길이 아니면 강조차 빠져나가기 전에 모래톱에 박혀서 더 힘껏 노를 저어야 할 수도 있고 바다에 나가서도 강과 바다가 합쳐지는 곳에서 모래가 쌓이는 삼각지도 잘 피하지 않으면 다시 배를 들고 걸어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글을 쓸 수 있게 생각을 가라앉히는 과정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내면에서 제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내가 섬에 다다르는 여정을 무사히 끝마칠 때까지 계속 기다리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내면의 제가 생각을 낚아서 현실의 저에게 직접 보여줄 때까지는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무엇일지 궁금해하는 것 역시 제 생각이기 때문에 궁금해하는 마음, 빨리 나오지 않아서 초조해하는 마음이 너무 두껍고 크면 내면의 생각이 들어가야 할 그릇마저 궁금증으로 다 채워버리게 됩니다. 특별한 생각도 하지 않고, 특별한 자극도 찾지 않고 고요한 상태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합니다.
출발할 때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다만 노 젓는 물소리만 나는 곳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그 시작이 유독 힘든 법입니다. 어느 정도 지나면 저절로 생각들이 이리저리 튀어나오게 되는데, 그중 조금 길고 영화도 아니면서 이야기도 아니어서 흐릿한 무언가, 그러니까 순수한 형태의 생각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분석을 하면 그것이 말로 표현한 꿈과 같은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꿈도 생생한 상태에서 기록을 하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기록을 하려고 한 그 지점을 중심으로 앞뒤로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생각의 바다에서 건져 올려서 정제한 생각들도 말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그 변환에 대해, 그때 사용할 단어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을 하다 보면 그 문장 외에는 어떻게 그 생각에 도달했는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두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 너무 최선을 다하려 하지 말고 그곳에 내가 던져주는 것만 충실하게 받아 적으려고 해야 합니다. 다듬는 것은 그 바다를 떠나서 이미 배가 필요 없게 되었을 때, 현실의 나 혼자 있을 때 해도 충분합니다.
그러고 보면 생각조차 여행입니다. 그 여행이 없이는 제 안에 있는 생각은 그대로 순환만 하고 말 것입니다. 현실에서도 바다가 있으면 물고기와 바닷물의 소금 같은 것들이 그 세계에 속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원이 됩니다. 제 안의 바다 역시 저에게 영양분을 공급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섭취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내가 판단하기 나름입니다. 그 바다는 현실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어쩌면 제가 생각하듯 단순히 신기해서 들여다보는 것, 개인적으로 글을 쓸 생각을 건져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 과정이 나중에는 단순한 재미로 하기에는 우리 정신에 반드시 필요한 의학적인 효과가 있다고 밝혀질지도 모릅니다.
이상하게도 책을 읽고 있으면 글자를 읽고 머릿속에서 문장을 이미지나 영상으로 바꾸어주는 과정이 진행되면서 마치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와 같이 진공 상태인 순간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책을 오래 읽고 보면 나도 모르게 글로 표현하고 싶은 생각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충분한 양이 모여서 스스로 그 이상 다른 곳으로 가지를 치지 못할 정도로 묵직하게 말입니다. 그것이 이상한 이유는 똑같은 현상이 조용하고 스토리가 간단한 옛날 흑백영화를 볼 때에도 가끔 일어나지만 의외로 정말 머릿속을 비운다고 생각한 짧은 인스타그램 스토리나 유튜브 쇼츠 같은 것을 볼 때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딴생각이나 휴식이 현실의 내가 현실의 뇌로 생각을 하는 그 틈새, 생각의 진공을 파고들어 그 생각의 바다로 낚시를 가는 것이라면, 그것을 하지 못한다는 말은 실제로 뇌의 사고 과정에 빈틈이 없는, 실제로는 여유가 있지 않은 상태라는 뜻일 겁니다. 책을 읽는 것과는 달리 그런 영상을 보는 것은 해야 하는 일로부터 압박은 조금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나, 머리는 쉬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구분이 힘든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쉰다'라는 개념이 다른 것이겠지요. 저의 경우에는 쉰다면 뇌까지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책을 읽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그런,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이야말로 머리까지 쉰다는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렇게 파도의 포말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생각이 꿈과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파도를 얼마나 겪느냐가 하루가 얼마나 여유 있느냐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또한 제가 좋아하는 글을 얼마나 쓸 수 있는가를 결정합니다. 쪽배를 타고 아직 바다가 되기 전, 고요하고 흐르는지조차 잘 알 수 없는 그 잔잔한 강을 노를 천천히 저어 가는 가운데 뒤로는 노을이 지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리하여 섬에 도착했을 때 보이는 것은 달빛과 너무나 거대해서 달빛에도 불구하고 온 하늘을 뒤덮은 은하수, 그리고 그 희미한 빛들이 모여 거대한 샹들리에가 된 하늘을 향해 반짝거리는 수많은 파도의 기포들을 상상해 봅니다. 그곳이 제 글이 탄생하는 양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