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숍 가운데에는 기둥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도 커피숍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면 그 기둥을 끼고 벽이 쳐져서 별다른 존재감을 보일 수 없었겠지만, 보통 상가의 두 배나 되는 카페였기에 한가운데 있는 그 기둥은 누구에게나 눈에 띌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무로 대부분의 인테리어 마감을 한 카페 안에서 가운데 쪽인 제가 앉은자리에서 창문을 보면 제 바로 앞 시야를 막고 그 기둥이 서 있습니다. 양쪽으로 눈을 돌리면 어김없이 카페 내부와 카페 밖을 골고루 볼 수 있지만 바로 앞, 한 명만 간신히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그 공간만큼만 떨어져 있는 거리에 새하얀 기둥이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 공간의 두 배만큼은 떨어져 있었을 겁니다. 하얀색 도자기 화분이 있었거든요. 화분은 잘 닦아서 관리를 하는 듯 사람이 지나가면 함께 지나가는 그림자 같은 것들이 무척 싱싱하게 반사되었습니다. 하얀색이지만 더러워지지 않았고 아무 무늬도 없습니다. 위아래로 긴 원통 모양이고, 화분 안 맨 위에는 작은 자갈들, 새끼손톱의 반 만한 크기의 돌들이 잔뜩 있어서 아마도 화분 안에는 자갈과 모래, 흙, 모래, 돌 순서로 된, 학창 시절에 배웠던 물 빠짐을 고려한 흙 채우기가 적용된 그런 쌓기가 되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화분은 나무 때문에 세워둔 겁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아마 행운목인 것 같습니다. 행운을 준다는 행운목이 가게 한가운데 있으니 카페의 미래가 창창하기를 기원해 줘도 될까요? 어쩌면 이런 기운은 건물 전체로 가서, 건물의 모든 가게들이 오래도록 돈이 흐르는 그런 건물이 되는 방향으로 발휘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화분이 가게 한가운데 있듯이 나무도 화분의 한가운데에서 올라옵니다. 나무의 밝은 색 기둥이 2미터 정도 올라와 있고 그 앞에 놓인 의자의 등받이가 끝나는 곳부터 커다란 이파리들이 깃발처럼 늘어져 있습니다.
초록색 이파리들과 거기에 아직 설익은 레몬 같은 색의 수맥들이 보입니다. 마치 국경을 나눈 것처럼 이파리 끝가지 뻗은 수맥은 저 높은 이파리가 보여주는 뒷면에서는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오히려 고가도로처럼 돌출되어 있습니다. 윗면에서 단순한 경계를 나눈 도구라서 나머지 면들이 부각되어 보인다면, 아랫면에서는 마치 힘줄처럼 튀어나와 이파리의 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래쪽에서 골격처럼 위쪽으로 받쳐주는 수맥 덕분에 처진 것처럼 보이는 이파리지만 제법 뻣뻣해 보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어느 정도는 바람이 불게 되는데 그 정도 바람에는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무게감도 없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저 화분을 든다면 무게가 얼마나 될까. 원통형이고 나름 높이도 있으니 무릎을 접고 앉아서 끌어안고 무릎을 펴면서 들어 올려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관찰을 하고 관찰한 것을 머릿속에 넣은 다음 그것을 다시 기억하면서 말로 풀어 나갑니다. 카페에 간 건 지금으로부터 네 시간 전이었습니다. 자세히 관찰하면서 위에서 써먹은 '설익은 레몬' 같은 비유가 생각나면 기억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대신 그렇게 저절로 생각난 것이 아니면 일부러 외우고 떠올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정이 있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집에 와서 오후 네 시가 넘어서야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그 기억을 더듬어 가는 것입니다.
보통 뭔가를 묘사하는 것은 소설을 연습하는 작가들에 대한 글에 많이 나옵니다. 저는 외부 세계에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소설을 쓰는 것도 관심은 있기는 하지만 써야 하면 쓰겠지 하는 정도이고,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면 소설가라는 직업에 크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닙니다. 글만 쓸 수 있다면 소설가도 상관없겠다, 싶은 수준입니다. 저는 그냥 제 생각을 적고 제 주변에서 제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 있으면 기록하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저 자신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글로까지 남기는 일은 드물지만, 속으로 묘사하면서 마치 글로 쓰듯이 문장을 완성하는 것은 언젠가 글을 쓰면서 한 번쯤 그런 묘사가 다시 나오게 된다는 점에서 창고에 차곡차곡 경험이라는 자재를 쌓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하는 것이 묘사한다는 행위 자체입니다. 속으로라도 문장이라는 형태를 사용해서 묘사한다는 것은 대상을 보면서 글을 쓰는 것의 다른 형태입니다. 결국 글을 쓴다는 것은 전달하고 싶은 것을 문장의 형태로 변형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문장의 형태가 먼저 이루어져야 그다음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문장의 형태로 1차적으로 변형하지 못하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묘사는, 실제 키보드나 펜을 사용하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한다고 해도 글을 쓰는 데 중요한 연습입니다.
그 연습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제가 제 자신을 보면 생각이 가지를 치면 그 생각을 따라가면서 계속해서 글을 쓰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따라간다'는 것은 그 대상이 생각의 흐름인 만큼 제가 다른 생각을 하면 그대로 그 자리에 전복되어 버리고 맙니다. 강아지가 뒷다리로 목을 긁는 모습을 보면서 떠오른 다른 일을 묘사하려다가 키보드가 눌리는 키감이 이상하게 빡빡해진 것 같다는 생각만 해도 강아지와 관계있었던 그 모든 흐름들이 사라져 버립니다. 증거라고는 제 글밖에 없는데 그 글은 아직 생각이 끊어진 순간의 그곳까지 아직 가지 못한 상태이고요. 그러니, 제가 따라가야 하는 생각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생각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따라가야 하는 생각만 잘 따라가면서 기록을 해야 하지요. 묘사는 이런 것을 도와줍니다. 대상에 대한 집중력을 키우고,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한 주의를 감소시킵니다. 또한 묘사에 있어서 과도한 제 개입 역시 생각을 흐트러뜨리기 때문에 과도하게 직유의 대상을 찾는다거나 멋진 구절을 만들려고 하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연습을 늘 하는 건 아니지만, 지하철에서 낯선 모양의 머리핀을 보거나 가방이 찌그러진 모양이 신기할 때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런 연습을 하려고 합니다. 연습을 해야 해서 한다기보다는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카페에서 글을 쓰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카페에 머문 시간이 짧아서 나무만 관찰하고 나왔습니다. 사실, 떠올렸던 문장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어떤 남자(접니다)가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자기 자리 앞 화분에 심긴 나무 한 그루를 보고 있다. 그 나무는 계절에 걸맞게 푸른 잎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마치 실외에 있다가 몇 분 전에 들여놓았다고 해도 믿길 정도로 싱싱했다. 남자가 시킨 커피는 차가운 아메리카노였고, 남자는 커피잔을 픽업할 때의 그 쟁반 위에 놓고 커피를 마실 때만 들어서 빨대를 입에 물었다. 다시 쟁반에 커피잔을 올려놓을 때는 들어 올릴 때와 달리 쟁반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나무만 쳐다보면서 짐작으로 내려놓았다. 나무의 초록색과 그 뒤의 기둥의 순백색의 대조가 매우 커서 나뭇잎 가장자리에 어떤 진한 색의 테두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의외로 자신의 내면이나 나무에 얽힌 배경, 또는 그런 것을 보고 있을 때의 감상에는 관심도 없이 나무의 겉모습만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빛에 반사된 색깔들의 배분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무라는 개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만큼, 고려해서 생각해 보겠다, 식의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