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도구를 바꾸었습니다. 회사에서 사용하던 전자책과 키보드를 다른 물건으로 바꾸었습니다. 무슨 물건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라서 특별히 소개나 설명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글 쓰는 삶이 좋은 건 커다란 게임용 노트북이나 엑스박스 같은 것을 탐내지 않고 단지 글 쓰는 도구 정도에만 욕심을 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저렴하다고 할 만한 건 아닙니다. 어떤 분야든 비싼 물건은 있게 마련이니까요.
도구를 바꾸고 가장 큰 변화는 글을 쓰고 나면 그 글을 집에 와서야 다시 읽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책은 와이파이나 블루투스로 핸드폰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단 쓰고 나면 나머지는 핸드폰에서 처리했습니다. 저희 회사에서는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게 방해하는 기기가 있어서 핸드폰으로 핫스팟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자책은 점심시간에 작성한 글을 블루투스 핫스팟으로 연결해서 핸드폰으로 글을 이어받아 오며 가며 짬이 날 때마다 점심시간에 쓴 글을 다시 읽으며 다듬어 갔습니다. 그리고 완성이 되었다 싶으면 저장하기도 하고 인터넷상에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최초에 글을 쓰는, 그러니까 초고를 쓰는 일만 기기를 사용하고 나머지 작업은 모두 핸드폰으로 이어받아서 진행한 셈입니다.
그런데 기기를 바꾸고 나니 블루투스는 없고 와이파이로만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단점이라면 단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 점은 알고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딱히 불만은 아닙니다. 그저 변화가 생겼을 뿐입니다. 애초에 핸드폰으로 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기기를 업무 시간에 들여다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글을 다듬고 다시 읽어 보고 맞춤법을 확인하는 모든 일이 퇴근 후에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기기는 좋은데, 덕분에 거꾸로 전업작가를 꿈꾸게 될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운동을 하러 나가거나 사무실에서는 낮잠을 잡니다. 불도 꺼져 있고요. 그래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기 위해 제 책상 위에는 스탠드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책을 읽기 적당한 조명이어서 전자잉크 화면을 보기에도 꽤 괜찮습니다. 불을 켜 놓고 커피 한 잔을 내려서 홀짝거리면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툭툭, 친 후에 글을 씁니다. 기기를 바꾸면서 키보드가 노트북 키 같은 것으로 바뀌었지만 그전에 사용하던 롤리 키보드에 비해서는 많이 두꺼워져서 글을 쓰는 재미가 더 커졌습니다. 화면도 조금 더 또렷해졌고요, 글자를 세거나 시간을 확인하는 기능은 똑같은 상태에서 이것저것 좋아진 것이, 그것도 글을 쓰는데 유리하게 개선된 셈이기 때문에 당장 퇴고는 못한다고 해도 만족도는 그 전의 전자책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전자책은 그래서 이제 정말 전자책만 읽는 용도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키보드가 조용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정작 불 꺼진 사무실에서는 어떨지 걱정했는데 그것 역시 실제로도 아무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문득 오래전, 볼펜으로 얇은 종이에 글을 쓰다가 만년필로 두꺼운 종이에 기록을 하게 되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는 만년필을 쓸 때 사각사각하는 소리에 설렜었습니다. 만년필은 보통 사용하는 촉으로는 너무 두꺼워서 집중이 되지 않았지만 EF촉의 존재를 알고 나서 다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선물 받은 만년필도 사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있는데 촉을 선택해서 구입한 라미 만년필은 확실히 글씨가 가늘게 나오니 글자 자체보다 생각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던 겁니다. 그전에는 페이지를 다 쓰고 나면 잉크가 마를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하기도 했고 아무튼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책에 기록을 하게 되면서 얇은 촉의 볼펜을 찾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0.5짜리 볼펜만 사용하다가 책 여백에 쓰기에는 글자가 너무 커져서 좀 더 가는 글씨가 써질 만한 펜을 찾았는데 최근에는 0.28mm를 찾아서 가지고 다닙니다. 노트에 기록은 똑같이 0.5짜리를 사용하지만 책의 여백에는 가늘게 써서 같은 양이라도 최대한 적은 공간만 차지하게 하려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작년 6월 이후로는 책에 뭔가를 쓴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재테크에 대한 책을 많이 읽게 되면서 감상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때 그 만년필의 사각사각소리, 고등학교 때 용돈을 모아 5천 원짜리 샤프를 처음 샀을 때, 그래서 처음으로 학원에서 필기를 할 때 금색으로 빛나던 화려함, 지구상에 나온 볼펜 중 가장 가늘게 느껴졌던 0.28mm 볼펜으로 처음 책의 여백에 메모를 할 때의 신비감. 그런 설렘이 오늘도 오랜만에 느껴졌습니다. 정말이지 필기구는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제게는 전혀 소용이 없는 물건인데 말입니다. 사실은 그런 설렘을 전해주는 글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 필기구의 가치를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조금 더 분발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