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에는 '대침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냥 조용히 하는 침묵, 또는 소침묵과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사람은 말로써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에 이러한 완전한 침묵은 의사소통을 막는다는, 공감을 하고 공감을 얻는 사람들 사이의 소소한 즐거움을 희생하는 의미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생긴 과정은 인터넷만 찾아보아도 자세히 나오기 때문에 굳이 설명을 처음부터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런 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한 것을 보면 의외로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우리에게 흔하고 익숙한 것이라는 사실을 옛날부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전에는 참 신기하고 기발하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들은 말이지만 최근에는 종종 나오는 말이 공기나 물처럼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 우리 생명의 필수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일 뿐, 실제로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순수한 상태의 공기나 물은 오염되고 나서야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었지요. 우리에게는 의사소통도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사회 속의 인간이라면 태어나서부터 당연히 의사소통부터 배우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서 생명의 기본 요소인 물과 공기의 섭취와 호흡이 당연하게 여겨진 것처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원활한 의사소통과 법적 질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 맞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의사소통은 단지 사회적 교류의 차원에서만 필수일 뿐, 그런 윤활작용만 잘 이루어진다면 의사소통을 항상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감정에 대해 내내 떠들고 누군가에 대해 욕을 하고, 누군가를 칭찬하는 그런 것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대침묵의 범위에는 말로 떠드는 것 만 아니라 남의 글을 속으로 읽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소통을 엄밀히 막지는 못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면서도 독서는 다른 문제입니다. 독서는 '내가' 읽는다는, 주체가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쪽지로 하는 의사소통은 어쨌거나 의사소통입니다. 그런 식의 연장으로 생각해 보면 인터넷 댓글을 읽거나 신문 기사를 읽는 것 역시 침묵의 범위에서는 독서와 달리 밖으로 밀려나 버릴 것입니다.
그럼 내가 글을 쓰는 행위는 어떻게 될까요? 글을 쓰는 것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면 당장 의사 전달을 위한 댓글을 쓰거나 쪽지를 건네는 것 같은,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면 허용될 것입니다. 글을 읽고 정리를 하는 선에서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있어서 대침묵이란, 아마도 책을 읽는 것만이 허용되는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처럼 원래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하지 않고, 인터넷 댓글을 읽으면 쉽게 피로해지는 성격의 사람은 단순히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 것은 절제를 통한 자기희생이 될 수 없습니다. 사회의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는 이른바 '힐링'의 과정일 뿐입니다. 저에게 있어 대침묵이 위대한 희생이 되기 위해서는 그 시간 동안 글을 쓰지도 않고 글을 쓰는 데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글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생각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는 방식을 선호하지만 적어도 글의 시작이나, 글에 꼭 들어가야 할 핵심 문장 같은 것은 필요합니다. 글을 문장 덩어리라고 하면, 마치 솜사탕을 만들 때 중심이 되는 꼬챙이를 넣듯이, 하나의 씨앗이 되는 문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려고 이리저리 거닌다는 것은 곧 글을 쓰는 첫 단계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희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으면 글은 언제나 쓸 수 있습니다. 그런 문장이 있지만 글을 쓸 시간이 없으면, 잠을 잘 시간을 줄여서라도 쓸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몽롱한 시간에 써야 하게 되면 글은 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예 그런 씨앗을 만드는 일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은 그 이후로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대침묵은 하늘과의 교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의 대화 대신 하늘과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러니 저는 희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글을 쓰기 위한 씨앗을 마련하는 일이 이미 대침묵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할 때와도 비슷합니다. 굿하고 제사 지내듯이 "꼭 이렇게 해주세요."라는 식으로 매달리는 것은 단지 내가 그것을 간절하게 원한다는 것을 강조할 뿐입니다. 기도는 단지 믿으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 믿음의 중심을 잡는 일입니다. 글을 쓰기 위한 씨앗과 같습니다. 그것조차 없으면 기도도, 믿음도 없고 글도 없으니 말입니다.
글을 쓰는 일은 다른 차원의 일인 듯 느껴집니다. 내 눈으로 본 것, 내 귀로 들은 것, 내 손으로 만진 것을 머리로 인식하고 다시 다른 차원의 감각으로 환원하여 문장으로 만들어냅니다. 그 문장을 읽은 사람들이 그 문장을 통해 다른 차원의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그 감각의 빛을 자신의 경험이라는 필름을 투과하여 스크린에 비추어내는 과정입니다. 내 눈과 귀로 들어온 것이 다른 사람의 스크린에 비추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런 모든 것을 이루어낸 글과 문장, 그리고 그 문장들의 씨앗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기꺼이 생활을 옆으로 잠시 치워두고 씨앗을 만들기 위한,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 시간이 조금 길면 더 좋겠지만, 정말 잠시라고 할 만한 시간만큼만 한 번씩 간신히 확보하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이 침묵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치가 무한히 커서, 얼마 되지 않는 시간만으로도 글을 쓰는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