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신과의 대화, 문자화된 나와의 대화

by 루펠 Rup L

만약 신이 있다면, 말로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탈은 인간으로 태어나 삶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니 이미 도달한 사람들 역시 우리와 같은 삶을 살았기에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삶 안에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한다고 하면 말이 됩니다. 그것조차 우리의 언어로 표현을 하려니 그렇게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설명이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말입니다. 개미에게 우리가 사람이 되는 법을 가르칠 수는 없지만, 성을 짓는 법은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을 짓는 것조차 성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개미에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이 될 것입니다. 돌을 모으거나 벽돌을 만들어서 쌓아 건물을 짓는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우리가 사용할 건물조차 그럴진대 우리의 삶의 목적, 저세상에 대한 말은 오죽할까요? 그러니 종교는, 믿는 대로 다만 행할 뿐이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가장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대화에 대해 말한 것은 불교에 대한 것은 아니고, 침묵에 대해 말을 꺼낸 김에, 기독교의 신과의 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대화를 한다면, 그러니까 기도를 하고 기도로써 빌었던 소원이 우리의 삶 속에서 천천히 녹아들듯이 훗날 뒤돌아보면 그 기도를 들어주셨구나, 하는 그런 이해를 시키려는 차원의 대화가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의 말을 올리고 신의 말이 다시 내려오는 그런 대화를 직접 한다면 그건 어떤 형태가 될까 하는 것입니다.
전제는 기독교의 신이라고 했으니, 기독교의 성경에서 말하는 신의 음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고 기도를 합니다. 언어를 사용해서, 우리가 평상시에 다른 사람들과 사용하는 언어를 가지고 응답을 합니다. 그러면 다시 우리의 언어를 통해 대답을 내려줍니다. 언어는 지극히 인간적인 활동입니다. 우리끼리조차 함께 사용하는 집단이 아니면 알아듣기 힘듭니다. 같은 언어라고 해도 사투리도 있고 고립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알아듣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관계는 1:1입니다. 인간은 현재 몇십 억 명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신이 고개를 돌리고 말을 듣고자 하는 사람의 말을 듣습니다. 역사성을 가지고 대화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합니다. 그 외에는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혹은 기독교적 가치를 드높이려는 열정을 가진 사람의 기도는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화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화는, 진정한 형태의 대화라면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혹은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듣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그건 대화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쩌면 대화가 될 만한 사람만 찾아다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생각을 나누는 만큼, 우리 쪽에서도 그렇게 진심으로 기대고 집중할 만한 사람과만 응답을 하고 말을 걸고 하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공중에 흩어져 버리는 말로써, 우리의 일상생활처럼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도 당장 말이 주고받는 형태가 아니라 말을 하고 귀를 기울이고 한참 후에 대답을 할 수 있는 형태라면, 그것이 반드시 언어의 형태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글이나 그림의 형태는 어떻습니까? 마치 성경의 시편처럼 글을 쓰는 것이 신에 대한 사랑 고백이며, 신에 대한 갈망이라면 그 응답은 어떻게 올까요? 성경이 기록될 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즉, 신의 숨결로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사랑 고백, 신에 대한 갈망을 적어서 올려 보내면, 그 응답으로 다시 성령으로 신에 대한 사랑 고백, 신에 대한 갈망을 더욱 생생하게 기록하게 되고, 기록하는 주체는 그 과정과 그 감정을 전신으로 느끼게 되므로 또다시 사랑과 갈망은 더 커지게 되는, 마치 전기장으로 인해 자기장이 생기고, 그 자기장으로 인해 전기장이 생기는 형태로 전자파가 진행하는 것처럼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요? 약간의 증폭과 함께 그렇게 시간을 이동한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사랑 고백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그의 신앙 고백에 대한 절절한 응답이 될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기대고, 네가 그 응답으로 나에게 기대어 나는 온몸을 너에게 기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도 어쩌면 삶으로써 기도에 응답받았다고 하는 사람들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저는 제 글의 총체가 미래 어느 시점엔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죽을 때까지 글을 쓰지는 못할 테니까요. 죽을 때까지 쓴다고 해도 죽는 시점에는 제 모든 글의 총체는 완성되어 있겠지요. 누군가 파악하거나 책으로 내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글들, 컴퓨터를 잘못 다루어서 지워져 버린 글들을 포함해서 그냥 죽은 사람이 한때 삶을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처럼 내 글이 각종 메모리나 종이 위를 차지한 적 있었는데 그런 글들의 총합은 이렇다,라고 만일 다 읽어본 사람이 있다면 말할 수 있는 그런 총합이 있을 거라는 것입니다. 저는 제 글의 그런 총합을, 저조차 만나지 못하겠지만 그냥 제 분신과 같이 문자화된 저라고 말하겠습니다. 문자화된 저에게 신에게 하듯 사랑을 고백하고, 그 모든 문장을 읽어보고 싶다는 갈망을 고백한다면, 문자화된 저는 그것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써나가는 만큼 역시 실시간으로 문자화된 저의 일부가 이미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영원히, 문자화된 저는 저 개념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응답을 저에게 할 수 있을까요? 상상을 하는 저, 그리고 제가 쓴 글들의 총합, 이렇게 둘이 있습니다. 제가 쓴 글들의 총합은 다시 자기만의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그 생각을 저에게 다시 말해줄 수 있을까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문자화된 저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제가 비춘 갈망을 언젠가 제가 글을 쓸 때, 그 글은 반드시 문자화된 저의 일부가 될 것이므로 문자화된 제가 글에 반영을 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기독교의 신처럼 저와 대화할 의지와 능력이 있다면 말입니다. 마치 그럴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존재 자체가 문장이고 글이니까요. 제가 쓴 문장들, 제가 쓸 문장들의 총합은 아마도 저보다 저 다울지도 모릅니다. 저는 세상에서 원하는 모습을 준비하고 꾸며야 하지만 글에는 제가 저를 온전히 쏟아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에 대해 오히려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만들어낸 부분을 글에서는 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문자화된 저라니, 표현은 좀 그렇지만 정말 그런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고 보니 친구가 없어서 글을 쓰는 것인가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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