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커피

by 루펠 Rup L

2005년 어느 날, 아마 어떤 과목의 기말고사였을 것입니다. 전날에 밤을 새워 일 년의 필기를 달달 외웠습니다. 물론 자신 있는 과목이라도 그렇게 많이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성적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대학 과정은 앞으로의 길을 찾는 과정이고 그 안에서 내가 더 잘하고 노력해서 가고 싶은 분야가 생기면 그것을 찾은 것만으로도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만화가가 되겠다, 로고 디자인 하는 사람이 되겠다 하는 친구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 친구들은 소수였고, 그 안에 들지 못하는 대다수처럼 저 역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라 그냥 공부를 한 것이었습니다. 대학에 가서야, 대학처럼 점수대로 취업을 했다가는 이건 생각 없이 점수로 대학을 선택한 것보다 나 자신에게 꽤 안 좋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했습니다. 성적만 좋으면 대기업에 다들 가는 전자공학과였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경제가 다시 펴지기 시작했을 때고, 대기업 공채도 제법 많이 나왔지만 그럼에도 40대에 퇴직하는 건 그때도 여전했으니까요. 그러다가 우연히 랩실에서 프로그래밍을 해서 기구를 돌리는 것을 보고 빠져들었습니다. 책을 아무리 보고 따라 해도 C언어는 어려웠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C++을 다루었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따라 하면 될 만한 정도는 되었던 것 같습니다. 캐나다까지 따라왔던, 경첩이 망가진 노트북에 랩실에서 얻어온 CD를 넣고 비주얼 스튜디오6를 설치했습니다. 6 버전이 아니라 그전 버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와서 읽던 C++책이 다루던 버전이 6였기는 했습니다. 어쨌든 그 책을 뒤적거리면서 랩실에서 받아온 소스코드를 이리저리 손보고 수정하면서 프로그램의 재미를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반도체 설계는 화학 약품을 사용하는 공정이 뒤따라서, 그리고 무조건 개인이 할 수는 없는, 반드시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 같아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반도체 설계하는 사람'이라는 사람은 있을 수 없고 단지 '기업에서 반도체 설계하는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만 있을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이었습니다. 사실일지 아닌지는 제가 가 보지 않은 길이어서 모르겠습니다. 단지, 사회 초년생이었던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는 것뿐이지요. 그나마 관심이 있던 반도체 설계는 그렇게 보냈고, 전자기기의 통신을 담당하는 마이크로웨이브는 안테나 설계에서 막혔고, 디스플레이, 그러니까 화면 구현에 대한 과목에서 프로그램의 매력을 알고 나니 임베디드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때는 아이리버의 기기들이 대히트를 치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그날 제가 밤을 새우면서 공부하던 것은 그 디스플레이공학 과목이었습니다. 같은 강의를 듣던 친구들이 어렵다고 했던 프로그래밍 쪽은 그 정도는 소스 코드가 몇 줄 되지 않아 다 외웠고, 조교가 문제를 낼 때 소스코드의 이 부분을 바꾸었을 때 어떻게 될지가 나올 거라고 한 내용은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변경사항은 노트북으로 다 시험해 본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신경 쓴 김에 기말고사까지 만점을 맞자고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다섯 시에 이른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 계속 앉아 책에서 밑줄 친 부분과 노트를 모두 외우기로 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모든 과목을 이렇게 공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과목은 이렇게 해서 A+를 맞았지만, 다른 과목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방법을 모른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열심히'하지 않은 것뿐이겠지요.
중간에 수업에 빠졌을 때 친구가 필기한 노트를 복사한 종이가 노트에 반 접혀서 끼워져 있었습니다. 기말고사라서 앞으로 노트를 더 쓸 일이 없기 때문에 마지막 필기 다음 페이지에 복사한 내용을 베껴서 썼습니다. A4용지로 두 페이지 정도 되었는데, 친구가 글씨를 작게 쓰는 편이라 제 필기로는 세 페이지가 조금 넘어갔습니다. 쓰면서도 책과 비교하면서, 이해하면서 옮겨 적었기 때문에 조금 오래 걸렸습니다. 그리고 나오니 여덟 시쯤. 온전히 필기만 베끼지는 않았겠지요. 앞의 내용과 비교하면서 혹시 오자는 없는지, 그림은 책의 보충이니까, 책과 상충되는 내용이 되면 그림이 잘못된 것이고, 그러면 다시 그 내용이 원래 필기할 때는 어떤 모양이었을지 등을 고려하면서 제 노트에 필기를 가지고 강의 내용을 복원해 나갔습니다.
노트만 완전하게 만들었을 뿐인데 시간이 여덟 시가 넘었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열람실이지만 엄밀히 책이 있는 곳은 다른 건물입니다. 하지만 그곳의 열람실은 24시간 열 수 없기 때문에 책이 없는 곳에 24시간 운영하는 열람실을 따로 열어준 것 같습니다. 이 열람실은 총 세 층이었던가 두 층이었던가 하는데, 저는 그냥 입구가 있는 층을 선호했습니다. 이미 열람실에 들어가려면 계단을 여러 번 사용해야 하는데 또다시 계단에서 힘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 입구에서 떠드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다른 층을 일부러 선호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습니다. 덕분이 여유롭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요.
입구로 빠져나가면, 바로 오른쪽으로는 복사실이 있습니다. 프린트는 다른 곳에서 했던 것 같습니다. 복사카드를 공중전화카드처럼 충전을 해서 사용했었는데, 때로 종이가 떨어져서 안 될 때는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종이가 떨어지면 복사 자체가 안되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복사 명령을 누르고 복사카드에서 금액 차감이 이루어졌는데 종이가 없다고 복사가 안 되면... 그리고 복사실에서 더 밖으로 나오면 계단이 있습니다. 건물 밖에서는 그 계단으로 한 층 정도 내려와야 열람실 입구가 나옵니다. 계단 바로 옆에는 레쓰비, 파란색 레쓰비 캔커피만 잔뜩 들어 있는 자판기가 있었습니다. 레쓰비가 카페인이 세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기에 이 자판기는 새벽에 나오면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판기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가면 벤치가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 계단만 보아서는 여기가 열람실 입구라고 아무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중앙도서관 열람실 입구라는 명판이 걸려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냐면, 그 계단이 사람 세 명만 동시에 지나갈 수 있는, 폭이 좁고 양쪽이 시멘트로 사람 가슴 높이까지 담을 친 형태, 그러니까 마치 한남대교 설계한 사람이 와서 만든 계단 같은 느낌입니다. 게다가 계단도 직선이 아니고 세 번에 나누어 앞뒤로 꺾여서 내려가게 되어 있어서 어디로 가는 건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앙도서관 열람실 입구라고 쓰여 있으니, 오히려 중앙도서관에 가져가던 명판을 잠깐 보관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 '잘못 놓인 명판' 같은 것 옆에는 벤치가 있습니다. 낮에는 강의실을 찾아가다가 다리 아플 때 한 번씩 앉는 그런 벤치이지만 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앞에서 잠시 기지개를 켜고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 초반부에 나오는 공부하는 장면을 다시 떠올립니다. 고3 때도 종종 펼쳐보고는 하던 장면입니다. 그리고 다시 들어와서 책의 첫 부분부터 다시 천천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원서이지만 보통의 전공서적처럼 두꺼운 책은 아니어서 읽어 나가는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마지막 기말고사의 시험범위는 책 전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노트도 처음부터 다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다행히 그 과목은 재미가 있어서 책도 다 읽었던 내용입니다. 13장까지 있었던 것 같은데 처음 3장을 다 읽고 나니 두 시간이 흘러 있습니다. 노트와 대조하면서 읽으니 영어로만 읽는 것보다 더 걸렸겠지요. 그러고 나서 큰 부분은 다음 8장까지입니다. 일어나니 허리가 뻐근해서 나가서 이번에는 학생식당까지 걸어갔다가 종이컵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밤을 새더라도 완전히 새우면 시험 볼 때 졸릴 수 있기 때문에 중간에 두 시간 정도는 자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일까?'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이제 시작했는데.
돌아와서 다시 책을 읽습니다. 같은 반복입니다. 책을 읽고, 두세 페이지 읽고 나면 필기를 읽고, 그 부분을 넘어가는 것 같으면 다시 책을 읽고. 그렇게 8장까지 끝내고 드디어 소스코드가 나옵니다. 뒷부분은 이제부터 거의 매일 업데이트된 소스코드가 필기에 등장합니다. 아주 간단한 형태에서 조금씩 업데이트되는 형태입니다. 여기부터는 책은 원리를 소개를 한 것뿐, 실제 구현은 필기에서 이루어집니다. 단, 어떤 개념을 소스코드로 만든 것인지는 다시 책을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소스 코드만, 익숙하지만 다시 천천히 살펴본 후 동아리방으로 향했습니다. 시간이 열한 시 반이어서, 한시 반까지 자면 될 것 같은데, 잠이 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잠이 올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금방 잠이 들어 휴대폰 알람 소리를 듣고 한시 반에 깨어났습니다. 동아리방 중 어딘가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춥지는 않습니다. 아마 복도에서 열화상 카메라를 들이대면 사람이 있는 동아리방을 찾을 수 있겠지요. 아무도 없다면 계단에 올라오면서부터 따뜻했을 리가 없습니다. 난로를 끄고, 기지개를 켭니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했는데도 잠이 잘 깨지 않습니다. 터덜터덜 다시 도서관으로 향합니다. 휴대폰 시계를 보는데 이미 토요일, 시험날 새벽입니다.
열람실에 들어가면서 레쓰비를 뽑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꿀꺽꿀꺽 다 마시고 캔을 버리고 옆에 있던 정수기 물을 떠서 입 속에서 오물오물했습니다. 이제 공부할 준비가 다시 되었습니다. 책을 펴도 살짝 졸리겠지만 시동을 거는 나머지 과정은 이제 슬슬 몸속에 퍼질 카페인이 알아서 해 줄 것입니다.
다시 반복의 연속입니다. 똑같이 책을 읽고, 노트를 보고, 소스코드를 외워서 써보고, 다시 책을 읽고 노트를 보고 소스코드를 외워서 써보고.
세시가 조금 안 되어 화장실에 다녀온 것을 빼고는 계속해서 자리에만 앉아 있었습니다. 하늘을 보니 조금씩 환해져 오는 것이 보입니다. 그때 저는 마지막 소스 코드를 외우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새로운 개념이 들어와서 쪽지시험에서는 그 생소함 때문에 쉽게 맞추었는데, 다시 보니 그전 소스코드에서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서 생겨난 개념을 단지 최종 개념만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럴 때는 그냥 외워야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나마 최신 기술에 가까운 것을 배웠으니 다행이다 해야지요. 그 필기 내용은 책에서는 이미 다루지 않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더 가야 할 법한 내용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을 덮고, 노트도 덮고 홀가분하게 가방에 집어넣었습니다. 이날 공부한 기억은 지금까지도, 밤샘 작업을 할 때면 다시 떠오르고는 합니다. 잘 해결이 되었을 때는 그때 책을 넣는 그런 기분입니다. 밤샘작업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사람을 불러야 할 때도 있고, 아예 기기 자체가 이상이 생겨서 구매를 내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 일의 연장일 뿐이고 점검 자체는 끝난 것이니 홀가분해해도 될 일입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그날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가방을 동아리방에 다시 갖다 놓고 학교 밖을 향했습니다. 서너 블록 되는 큰 범위를 설정해 두고 한 바퀴 걸어볼 생각입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외운 내용이 머릿속에서 정리될 수 있게 잠시 고립시켜 주고 저는 딴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딴생각이라고 해도 딱히 할 만한 게 없습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것들을 곱씹는 것뿐입니다. 하늘이 푸르스름했지만 학교 교문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푸르스름한 것은 하늘 위쪽으로 모두 밀려났고 푸르스름하던 곳은 노랗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해가 질 때는 노르스름하면서 붉은데 해가 뜰 때는 해만 빨갛고 하늘 전체는 노르스름하기만 하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이후에도 해돋이를 볼 때마다 하는 생각입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쓰레기통 근처에 서 있다가 저를 보고 도망갑니다. 이미 청소차가 지나간 듯 쓰레기통은 깨끗합니다. 원래 새벽까지는 쓰레기통 근처까지 쓰레기봉투들이 수북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그만 가고 앞에 있는 큰길에서 왼쪽으로 틀어서 가야겠습니다. 조금 전 그 길은 차들이 종종 지나다녔는데 이 길에는 차가 한 대도 없습니다. 가로등도 하늘에 가려서 더 이상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가로등과 하늘의 색이 똑같습니다. 마치 노란 하늘의 왕이 있어서 그 왕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근위대가 밤새 노란 가로등을 한 줄로 곧게 켜고 지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나서 곧바로 많이 피곤한가 하는 생각을 하며 살짝 웃었습니다. 건너편 패밀리마트 외에는 불 켜진 곳이 없습니다. 가로수들, 빈 쓰레기통들, 그리고 가게들보다 단독주택이 많은 양쪽의 건물들을 보면서 다시 큰 길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차가 많이 다닙니다. 아침이 다가오면서 차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이 많아져서라기에는 방금 걸어 나온 길 방향으로 가는 차는 한 대도 없습니다. 아마 주택가이니 시간이 지나면 그곳에서 나오는 차가 많아지겠지요. 큰길을 따라 학교를 향해 걸어가다가 24시간 표시에 불이 들어온 맥도널드가 있었습니다. 호기심에, 시간도 시간이니만큼 커피를 시켰습니다. 직원이 뭔가를 물어보았지만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뭔가를 또 넣어주겠다고 해서 그건 싫다고 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무거나 시킨 것이 아메리카노였을 겁니다. 따뜻한 걸로 드릴까요, 했을 때 그렇다고 했을 겁니다. 그리고 시럽을 넣어 드릴까요, 했을 때 아니라고 했겠지요.
따뜻한 종이컵을 들고 나오면서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인터넷에서 읽었던 것인데, 마침 그때쯤 퍼지기 시작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데 대한 인터뷰였습니다. 어차피 같은 가격인데 편하게 안에서 마시지 않고 왜 테이크아웃을 하느냐는 말에, 그러면 마치 뉴욕 시민이 된 것 같아서요,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나와서 뉴욕 시민 같다면 그 사람이 맥도널드 컵을 든 나를 보았다면 슬럼가 사람 같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커피 내리는 방식도, 마시는 사람도 결국 같은데, 게다가 레쓰비 같은 것도 커피가 맞는데 브랜드가 그렇게 많은 차이를 준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가방 하나를 메고서도 부끄러울 수 있는 사람인가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모금을 살짝 마셨.."우웩"
난생처음 맛보는 아메리카노였습니다. 세상에 첫맛은 뜨거워서 모르겠고, 끝맛은 감초 없는 한약맛. 그런데 한 모금 더 마실 생각을 못하고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져 걷는 사이 커피 향이 슬슬 올라옵니다. 고소한 것 같으면서도 쓰면서도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맛이었습니다. 한약맛이 여러 가지 색의 유리를 넣고 녹여버린 맛이라면 이건 이미 만들어진 여러 맛의 유리구슬들을 녹이지 않고 섞어 놓은 맛이었습니다. 고소하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깊은 맛이 나기도 하고. 그래서 한 번 더 홀짝 마셨습니다. "우웩" 그리고 나서 몇 초쯤 지나니 다시 향이 올라옵니다. 그렇게 마시니 학교 앞까지 몇 분 걸리지도 않은 것 같은데도 3분의 1도 다 마시지 못했습니다. 학교 벤치에 앉아서 계속 한 모금씩 마시다 보니 뱃속이 쓰렸습니다. 아침도 먹지 않고 커피를 마셔서 그렇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배가 많이 고파서 쓰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맥도널드에서 커피와 함께 사온 뭔가를 먹었습니다. 뭘 먹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햄버거는 아니었습니다. 햄버거였으면 나았을 텐데, 기억에 나는 것을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그걸 먹었는데, 그냥 커피맛만 느꼈던 것이었습니다.
그걸 다 먹었는데도 맥도널드 커피는 반 정도밖에 마시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커피도 많이 식어서 첫맛을 느끼게 되니 조금 마실만 해졌습니다. 쓴 맛은 첫맛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어서 첫맛을 뜨거워서 느끼지 못하니 쓴맛부터 저를 때렸던 것이었습니다. 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나무들과, 밝아오지만 오히려 추운 새벽 공기를 느끼면서 커피를 홀짝홀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인생 첫 모닝커피입니다.
지금은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를 갈아 모카포트에 붓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시험공부를 한다고 밤을 새운 덕분에 처음 도전해 본 그 아메리카노 덕분에 모닝커피를 마실 수 있습니다. 아마 다른 때 시작했다면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지금도 시럽을 넣은 어떤 종류를 마시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커피, 특히 모닝커피는 아메리카노 아니면 에스프레소여야 합니다. 그래야 한다는 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뭔가 밤을 새웠을 때조차 '지금부터 아침'이라는 선언을 해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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