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밤 냄새와 감각

by 루펠 Rup L

고소하고 향긋한 군밤 냄새가 난다. 추운 겨울, 눈처럼 하얀 입김조차 건조하고 운동화 속 발끝부터 시려운, 파란 하늘조차 하얗게 김이 서린 듯 흐린 파란색을 띠는 그런 겨울날이다. 제법 먼 곳에서 리어카에 실은 군밤 기계가 보인다. 그럼에도 그 거리를 타고 군밤 냄새가 여기까지 날아온 것이다. 손을 데지 않으려고 군밤장수는 두꺼운 장갑을 끼었다. 나는 춥지만 그냥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을 뿐 장갑은 끼지 않았다.
여름이다. 누군가 군밤을 굽는다. 안 그래도 더운데 겨울에 껴입었던 패딩과 스웨터 생각이 나자 등골에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지는 듯하다. 군밤은 겨울에 먹어야 제맛이지 여름에는 습해서 그런 끈적끈적한 맛은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군밤은 냄새만 맡아도 시골로 향하는 기차를 타러 나온 추운 90년대 기차역 앞이 생각난다.
원래는 군밤과 붕어빵이 그런 역할이었지만, 붕어빵이 너무 비싸져서 이제는 먹지 않는다. 물가는 모두 오른 것 같은데 왜 굳이 붕어빵 가격이 너무 오른 듯한지는 모르겠다. 사실 붕어빵은 그전에도 많이 먹지는 않았다. 팥을 싫어하기 때문에 슈크림 붕어빵을 더 좋아하는데, 슈크림 붕어빵이라고 더 비싸게 팔지 않는 곳도 있고 더 비싸게 파는 곳도 있었다. 배고파서 먹는 것도 아니고, 미친 듯이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팥이 들어간 것과 별도로 가격표를 찾아보아야 한다는 점이 그냥 차라리 신경 쓰지 않고 먹지 않는 편을 선택하게 한다.
겨울철이면 붕어빵과 군밤, 한여름에는 찐 옥수수와 수박, 봄에는 봄나물, 가을에는 뭐더라. 이렇게 정해놓고 그 계절에는 꼭 이걸 먹어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굳이 비싼 돈을 주고 겨울에 과메기를 주문한 다음 다 못 먹는다며 나눠주는 사람들도 있다. 아, 생각났다. 가을에는 전어와 대하였다. 그런데 나는 먹을 것을 가지고 그렇게 쫓아다니는 편은 아니다. 그런 것을 찾아 먹는 재미도 이해를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해의 측면에서 일 뿐이지 왜 남도 먹어야 한다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걸 모르면 인생의 낙의 절반을 모르는 거라나. 비슷한 이야기를 스무 살 때 들은 적 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이십 년 헛산 거라던.
그렇게 찾아다니면서 먹는 것은 선호하지 않지만, 너무 맛있었거나 의외의 분위기였거나 하는, 기억에 각인될 만한 사연이 있는 경우에는 그 음식을 먹을 때 그때의 분위기가 생각이 나거나 반대로 비슷한 분위기가 되면 그 음식이 생각나기도 한다. 반드시 음식은 아니지만 비슷한 분위기에서는 늘 생각나는 장면이 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쯤, 방에서 더워서 침대 아래 방바닥에 누워서 음악을 틀어놓고 뒹굴뒹굴한 적이 있었다. 누워서 책을 읽다가 아마 책이 무거웠거나 팔이 아파서였는지 머리맡에 책을 놓고 눈을 감고 있었다. 음악도 끝났고 그 상태로 약간 잠이 오는 상태, 반쯤 조는 상태가 되었던 것 같다. 거실에서는 어머니와 이모님이 참외를 깎아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이모님의 목소리가 흐리게 들렸다. "그게 있잖아. 내가 지난번에 말했잖아.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자세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지만, 거기에 어머니도 작게 맞장구를 쳤다.
가끔 졸릴 때면 내가 그때처럼 침대 아래에 누워 있고 머리 근처의 방문 밖에서 이모님이 말씀하시던 억양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을 때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면 곧 잠이 오는 것이다. 단순히 반쯤 졸린 것만으로 어떻게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상상에 빠지는지는 모르겠다.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어나는 일이다. 리고 상상 속에서도 그 접시에 놓인 것은 반드시 참외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음식과 소리까지 생각이 나고, 군밤은 특히 내가 살아 보지도 못했던 70년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다. 아마 텔레비전의 영향이겠지. 은행과 마늘을 함께 구운 것은 스물여섯, 처음 회식 2차에 따라갔었던 투다리가 생각나게 한다.
장마철에 서늘할 때나 겨울이 되면 종종 홍대 앞 오뎅 바에 간다. 자주 가는 곳이 있는데 거기는 오뎅 세트가 있어서 여러 가지를 시켜 놓고 하나씩 먹을 수 있다. 거기에 도쿠리 히레사케를 시켜 놓고 마시는데, 첫 잔을 따를 때 향을 맡으면 20년 전 처음 마신 히레사케 집이 생각난다.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지금 봐서는 그 건물 자체가 없어진 것 같지는 않다. 그 집은 히레사케를 커다란 잔으로 시킬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컵이 뜨겁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술을 한 잔 시키면 보통 술집에서 콘치즈를 시키면 주는 그런 접시형 불판에 계란프라이를 하나 올려 주었다. 추가가 500원이었던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만 먹었기에. 항상 히레사케 한 잔과 계란프라이 한 개, 그렇게만 먹고 나왔던 것 같다. 향은 좋아하지만 많이 마시지는 못하니까. 마치 전통주점 가는 길처럼 한지를 발라놓고 거기에 붓으로 뭐라고 쓰여 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바로 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거기도 오뎅바가 아니었나 싶다. 내게 그런 개념이 없을 때라 오뎅바였더라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오뎅바에서만 그 집이 생각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일식집에서 사케를 몇 번을 마셨는데, 홍대 오뎅바 외에는 그 생각이 다시 난 적이 없으니까.
향이나 소리나 맛이나 감각일 뿐이다. 나는 그 감각들을 모아 '처리'를 하는 뇌를 가지고 있다. 감각을 내가 처리한 기억과 연결을 시킨다는 것은 아마도 내가 과거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소중한 증거일 것이다. 그 기억이 나의 것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연결해 주고, 그 연결은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내가 한 것의 흔적을 찾는 일이다. 역사 연구를 하면서 기록이 직접적으로 하는 역할과 같다. 글을 쓰듯이 뭔가를 남기는 데 정성을 들이는 사람이라면 나 자신에게 새기는 기록인 감각의 기억에도 세밀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이제까지 신경을 쓰지 않고 어떻게 기억이 되든지 우연에만 맡겨 왔다. 모든 기억이 소중하다는 것은 한낱 개념적인 외침이 아니라, 매일매일 모든 순간을 살아갈 때 정신을 번쩍 차리고 새겨야 할 좌우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연히 힘드니까 이제까지 해오지 않았을 텐데, 생각해 보면 앞으로 할 것이라고 생각만 해보아도, 무척 피곤할 것 같기는 하다.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어차피 기억할 만한 것은 뇌가 알아서 기억해 준다. 의외의 상황이라던가 하는 그런 예외적인 상황은 남겨두고, 평이한 상황들은 흘려보낸다. 마치 기억에 남길 것과 남기지 않을 것을 구분하는 체가 하나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모든 기억은 소중하지만, 모두 잡으려고 할 수는 없으니, 뇌가 기억해 주는 것은 특히 더 소중하다, 그렇게 기억나는 것은 감사히 받아들이자, 정도로만 결론을 내면 될 것 같다.
아직 여름이 되지 않았고, 웬일로 시원한 저녁이라 그런지 군밤이 생각난다. 처음 이빨에 닿을 때는 딱딱한 것 같지만 턱에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드럽게 들어가는 고소한 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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