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상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펠 May 25. 2024

휴대폰과 블루투스 이어폰 그리고 브라운아이즈

Cause you're my love forever
매일 밤의 달콤한 낮은 속삭임
부드러운 커피 향보다 더욱 진하게
Don't be afraid tonight


그때는 2001년이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휴학하고 나서 맞이한 5월 말이었다. 따뜻한 봄날이지만 간혹 추위가 감싸고 지나가도 그나마 2월의 칼 같은 바람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며 얇은 옷에 바람막이를 걸치고 나가던 그런 날이었다. 전날은 금요일이었지만 학교에 가지 않았다. 평일에는 학교에 가서 복학하고 나서 들어야 할 과목 수업에 미리 들어가 보기도 하고 동아리방에서 시간을 때우기도 했지만 마침 그 주는 목요일에 과음을 했던지라 금요일에는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그때는 급할 게 없으니 시간이 많아서 책을 참 많이 읽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책을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었는데, 아마도 여러 가지 책을 한꺼번에 읽는 습관이 그때 들인 것이 아닌가 싶다. 서너 권의 책이 중간에 책갈피가 꽂힌 채로 책상 위, 책꽂이 위, 피아노 위 등에 놓여 있었다. 어머니께서 청소하면서 잔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책 읽는 스타일이 그런 것을. 어머니도 처음에는 뭐라고 하셨지만 책갈피가 점점 뒤쪽으로 이동하다가 마침내 책꽂이에 다시 꽂히는 것을 몇 번 보고 나서는 잔소리까지는 하지 않았다. 증산도의 도전 같은 것도 인터넷으로 그때 노트북을 끌어안고 읽었고, 성경의 열왕기와 역대기를 마음먹고 처음부터 샅샅이 읽다가 폐허 속에서 오래된 율법책을 찾는 부분에서 감동을 받았던 것도 그때였다. 불교에서는 묘법연화경은 몇 년이나 지나서 읽었지만 다른 책 몇 권은 그때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것을 읽어 보았다. 도서관에서도 계속해서 책을 빌려와서 읽었고 그 토요일에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기 위해 집에서 나온 것이었다.

도서관은 주말에는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동아리방에 책을 갖다 놓았을 것이지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날 햇빛이 너무 충격적이었기에, 그 풍경과 소리들 뿐이다.

그때는 MP3 플레이어라는 것이 일반에 출시되어 휴대용 기기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배터리나 메모리 용량이 문제일 뿐이었다. 아직 잘 사용하던, 카세트테이프용 워크맨이 있으니 가장 최신의 기기비싼 돈을 주고 살 필요는 없고 호기심은 있고 해서 바로  해에 나왔던가 하는 워크맨으로 혹은 자동차 카오디오로 들을 수 있는 카세트테이프형 제품을 떨이로 내놓은 것을 구입한 것이었기 때문에 32MB밖에 되지 않고, 세 시간인가 들으면 배터리가 다 소진되어 버렸다. 그래도 당시 삼성 핸드폰 충전기로 충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동아리방 어디서든 공용으로 꽂아 놓은 충전기에 꽂아서 충전하면 되었기에 그나마 지하철을 타고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소리바다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신 노래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차피 MP3플레이어가 없었더라도 워크맨이 집에 있던 당시로서는 주말에 집에 가만히 있다가 길거리에서 가요 소리가 들리면 밖으로 나가 리어카에서 불법복제한 최신가요 순위권 테이프를 구입할 수 있었지만 굳이 그 기기를 사용해 보고 싶어서 들고 나왔던 것 같다.

책 두 권만 든 가방을 메고 집에서 나와 생각보다 덥다는 생각을 하며 지하철을 탔다. 1호선. 신도림. 2호선. 한강을 건너면서 조그마한 카세트테이프 모양의 MP3에서 나오는 소리를 감탄하며 들었다. 한강을 보며 서서 수업도 없는 내가 주말에 지하철에 서 있는 모습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일부러 지하철을 타고 2호선에 몸을 싣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인상 깊다. 그 많은 시간을 통학을 위해 지나다닌 같은 루트지만 유독 그날은 기억에 생생하다.

평소에도 나는 홍대입구역에 내려서 바로 LG팰리스 옆길로 들어가 에뛰드하우스를 지나 막다른 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비스듬한 길을 따라 걷는다. 그때도 생각 없이 걸었기에 그렇게 걸었다. 아침부터 길을 나섰기에 시간은 11시쯤이 되었고 아스팔트가 노르스름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봄이라서,라는 말로 모두 정리될 만큼 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대부분의 식당이나 술집이 문을 닫은 조용한 홍대 앞. 완만한 오르막을 걸으면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면 꼭 들러서 맥주 한 병을 마시던 바인 올드 앤 뉴를 지나 계속 걸었다. 그리고 유리창이 깨져 있는 회색 아파트 건물을 지나 학교 앞으로 갔다가 공사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멀쩡한 건물도 아닌, 뭔가 하려다 버려진 것처럼 방치된, 옛 O(알파 'O') 동이 있던 곳과 그 옆 정문을 보았다가 바로 들어가기 허전해서인지 정문 쪽 횡단보도를 건너는 대신 오른쪽을 향했다. 얼마 전 뒤풀이를 했던 '홍콩' 중국집 간판이 선명했다. 문을 닫았을 것이지만 정문을 볼 때처럼 웬일인지 반가웠다. 하늘이 무척 화창하고 파랗고 높았다. 구름이 유독 새하얬다.

파란 불이 들어와 길을 건넜다. 그대로 큰길을 걸을까 했지만, 길을 틀어 놀이터 옆 골목을 향했다. 그 골목은 지하철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신 다음 날, 닭곰탕을 먹을 때 가는 곳이었다. 술을 마실 때는 그다음 골목이나 그 다음다음 골목이나 혹은 홍대입구역 방향의 길을 향했다. 특히 놀이터는 갈 일이 없었다. 그 길 자체가 사람이 많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자주 가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 자체가 자주 가지 않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나중에는 그래도 종종 지나가는 길이 되었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금요일 밤, 광란의 밤이 지난 토요일이었지만 거리는 깨끗했다. 아마 새벽에 모두 깨끗이 치웠기 때문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놀이터 옆길로 올라가면서 생각보다 오르막이 가팔라서 조금 놀랐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과 모든 풍경이, 학교에 정규 학기여서 다닐 때, 동아리 활동 때문에 술을 마시러 나올 때, 끼니를 때우러 나올 때, 혼자 술을 마시러 돌아다닐 때 등 어느 때와 비교해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오르막 각도 때문인지 햇빛에 반사되는 아스팔트의 면적이 제법 넓었다. 아스팔트 길이 눈부셨다. 아스팔트가 노란색, 아니 황금 색이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아스팔트와 마치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법한 선명한 광경의 건물들과 놀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이렇게 예쁠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이어폰으로 가사가 흘러나왔다.


바로 지금 여기 시간이 멎어
함께 눈감아도 멋질 거야
같은 시간 속을 두 손 잡고 걸어가게
너만을 바라보고 또 너만을 지키고 너만을 원해


그 순간 시간이 멎었다. 내게 아직 커피는 달콤한 자판기 종이컵 커피가 최고였을 때지만, 그래서 노래는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그래서 어떤 커피가 그런 느낌을 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현실감 없는 가사였지만, 이 기억만큼은 평생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만큼 멋진, 그런 풍경이 눈앞에 있었다. 온통 축복처럼 내리는 따뜻한 햇빛과, 그 햇빛이 황금색으로 반사되는 아스팔트와 하얀색으로 만든 간판은 순백색으로, 검은색으로 쓴 글씨는 선명한 모습으로, 문 닫은 가게들조차 지금은 그 포근함에 잠을 자고 있는 모습으로, 모든 광경이 자연 그대로인 양, 그 자체로 그럴 수밖에 없는 완벽한 모습이라고 외치는 듯 그 자리에 있었다. 거기에서 부자연스러운 것은 관객인 나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력한 상태로 숨을 죽이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놀이터 입구 쪽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광고지 한 장 바닥에 붙어 있었다. 그 종이 태양이 주는 빛을 온전히 내게 반사하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아름답고도 장엄한 광경은 아마도 아무리 높은 산 정상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더라도 다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 모습을 보기 위해 힘들여 올라간 곳에서 내려다본 것과, 일상에서 바라지 않은 순간에 기적처럼 찾아온 엄숙한 순간은 절대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그렇게 숨죽이고 잠시 있던 나는 가사를 곱씹다가 이윽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순간 느꼈던 햇볕은, 그 햇볕과 같은 햇볕은 다시볼 수 없을 것이었다.

가까스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가 그 광경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블록을 한 바퀴 돌아 다시 그 길을 올라왔지만 그때의 햇볕은 이미 그 햇볕이 아니었다. 이글거리며 그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성스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던 햇빛은 이제는 점점 뜨거워진 정오에 다가서는 여느 봄날의 햇빛일 뿐이었다.

그 이후로 'With Coffee'는 나에게 그 광경을 떠올리게 하는 창구가 되었다. 하지만 다시 떠올릴 뿐, 그날처럼 빛나는 그 거리는 볼 수 없었다. 기억 속에서라도 볼 수 있는 것다행이겠다는 생각 들지만, 혹시나 늙어서 죽을 날이 다가올 때에는, 마지막으로라도 다시 한번 직접 보고 싶다는 아쉬움은 남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는 꼭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준비물은 휴대폰과 블루투스 이어폰. 그리고 브라운아이즈.


연도와 날짜와 시기가 기억 속에서 뒤죽박죽 되어 있지만 벌써 20여 년이 지나면서 그 상태가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져 있어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적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을 쓰다가 익숙한 느낌을 받으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