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 경운기
비가 오니 병원에 가야지. 맑은 날엔 깨를 솎고 흐린 날에는 고추밭을 매다가 비오면 깨 팔고 고추 팔아 모은 돈 병원 갖다 줘야지. 병원도 나이 들어야 누리는 호사. 셋째를 잃을 때도 못갔던 병원을 장마덕에 가보려니
무릎이 말썽이로세. 사래 긴 콩밭이야 허리 한 번 안 펴고도 매지만 평생을 쪼그리고 밭머리를 돌았더니 무릎이 고장났다네. 성한 곳이 드문 나이여도 아픈 건 늘 새삼스럽지. 무릎은 아프고 병원에는 가야겠는데 수단이 마땅찮을 땐 역시 영감 경운기.
영감이야 더는 쓸데가 없지만 경운기는 천금같지. 경유 한 말이면 논 서마지기 갈고도 서울을 갔다 온다네. 돌밭에 굴려도 아프단 소릴 하나, 배고프다고 참 달란 소릴 하나. 일꾼 중에 더없는 일꾼인데 경운기도 주인 따라 늙고보니 영감 아니고는 시동이 안걸리는 게 좀 그렇지.
그러니 할 수 있나. 병원이라도 가자면 영감을 부려야지. 그래도 평생을 영감 떠받든 보람이 아예 없진 않다네. 비를 가리라고 날 위해 친 저 파라솔 좀 보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