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1000m 산맥을 넘어서

일본종주 14일 차 : 유자와~다카사키 (120Km)

by 루로우


어젯밤 공포 게임에서 나올 것만 같았던 골목길은 평화로운 골목길로 변해 있었다. 유자와를 둘러싼 푸릇푸릇한 산에는, 겨울철에는 스키장으로 변신할 예정인 깎아질러 헐벗은 평사면들이 보였다. 시골의 낮과 밤은 정말 극과 극이다.

군마를 넘기 전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10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키요츠 협곡’이라는 곳을 들렀다 갈지, 아니면 그냥 통과할지…. 하지만 문제는 10킬로라 하더라도 도쿄로 향하는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이라는 것. 게다가 협곡이다 보니 아무래도 산길을 타야 할 것이 눈에 훤했다. 나중에 해발고도 1,000미터의 오르막까지 넘어야 한다. 이곳에서 체력을 쓰면 이후 라이딩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시 이곳을 오게 될까? 사실상 많은 곳들이 이번 여행 이후 내 생애에 다시는 오지 않을 곳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미 이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만 같았다. 몰랐더라면 이런 고민도 없었을테고 ‘이미 알게 된 것이 문제다.‘


나중에 돈을 들여서 여행에서 오는 것보단 그냥 자전거를 타고 갔다 오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 지금 아니면 대체 언제 가겠어. 안 가봐서 후회할 바에는 갔다 오자.’


뒤가 없는 무모한 결정을 내리고서는 키요츠 협곡으로 방향을 틀었다. 예상한 대로 마을을 벗어나자 험난한 산길이 펼쳐졌다. 산의 경사가 너무 심해서, 도로는 한눈에 봐도 Z자 형태의 지그재그로 이어져 있었다. 사실상 이런 제대로 된 오르막을 타는 것은 9월에 일본에 온 이후 처음이었기에, 아직 다리도 오르막길에는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얼마 오르지 않아서 금방 숨이 차고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큰일 났다. 이미 너무 힘든데, 나중에 산은 대체 어떻게 오르지?’ 하지만 돌아가기엔 지금까지 사용한 체력도 아까웠다. 힘겹게 오르막을 겨우 올라갔지만 이번에는 협곡으로 내려가는 긴 급경사의 내리막이 펼쳐졌다.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내리막을 내려갈 때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다시 돌아와야 하는 길이었기에….

우여곡절 끝에 협곡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계곡을 낀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아침 9시 개장 시간에 맞춰서 와서 그런지 관광객은 잘 보이지 않았다. 협곡은 기다란 터널을 통해 들어가 감상할 수 있었다. 파노라마 스테이션에 도착하자, 긴 아치 형태 가운데 웅장한 협곡을 배경으로 한 커다란 공간의 바닥에는 얕은 물이 있어 그 공간을 정반대로 반사하고 있었다. 올 때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잘 안 보였는데, 역시 하이라이트인 이곳에 모두 모여서 사진을 연신 찍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감상은 꽤 아쉬웠던 곳이다. 공간의 특성상 역광으로 찍힐 수밖에 없어 사진의 내 모습이 시커멓게 나와 나인지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협곡은 분명히 멋졌지만, SNS 사진에서 느껴지던 이 공간의 신비로움보다는, 실제로 보니 철판의 이음새도 잘 보이고 물아래의 바닥도 훤히 보이고 여러모로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있다 보니, 신비로움은 사라지고 단지 협곡 관광을 위해 멋지게 만들어 놓은 듯했다.


어쨌든 협곡의 구경을 마치고 빠져나왔다. 올 때는 내리막이었지만, 다시 돌아갈 때는 오르막인 길을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돌아가야만 한다.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했다가는 어제처럼 위험한 야간 라이딩을 감수해야 할 확률이 커지기 때문에 쉬면서 체력 안배를 할 시간도 없었다. 어제의 야간 라이딩은 체력뿐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탈탈 털려 기억도 하기도, 다시는 경험을 하기 싫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왔던 길을 되돌아서 다시 내가 머무른 숙소가 있는 마을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오전 10시였다. 사실상 원점으로 돌아와 오전 10시에 출발하게 된 셈이다.



산을 넘는 약 50킬로 동안 편의점이 아예 없을 예정이었기에 미리 편의점에 들러 빵과 에너지 젤, 에너지 음료 등 잔뜩 먹을 것을 샀다. 눈앞에 보이는 거대하고 푸른 산과 함께, 유일하게 이곳을 통과하는 도로인 17번 국도로 바퀴를 내디뎠다.


사실 군마가 키요츠 협곡보다 훨씬 덜 힘들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경사가 급하지 않았다. 평균 경사도는 5~6도 정도에, 낙석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긴 터널이 자주 나왔다. 특히 터널에서는 공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왕복 2차선의 도로 한 차선을 폐쇄해 두고, 양쪽 끝에서 인부들이 무전을 주고받으며 차들을 한쪽씩 통과시킨다. 물론 자전거도 예외는 없었다.


“차량 N대, 그리고 자전거 1대 지나갑니다.”


인부가 무전기에 말하며 봉을 휘두르면 차량이 줄지어 이동하기 시작한다. 차량의 뒤꽁무니를 열심히 쫓아가 보지만, 전력 질주를 해도 항상 마지막으로 터널을 빠져나왔다. 그래서 터널을 나올 때면 항상 반대 차선에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차량이 보였다. 마지막인 나만 기다리고 있던 차량들을 볼 때마다 눈치가 보여서,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전하며 길을 지났다.

쉬고 오르기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오르막을 올라 오후 2시에 정상에 도착했다. 이화령처럼 휴게소라든지 기념비 같은 장소가 있을까 기대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부터 내리막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을 정도였다. 내리막의 시작점에 원숭이 주의 표지판이 보였다. 정말 야생 원숭이가 있다고? 내려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원숭이가 나오길 기대했지만 원숭이는 아쉽게도 내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리막에서는 정말 과장을 보태어 멀미가 난다 싶을 정도로 구불구불한 커브 구간이 연달아 이어졌다. 내려갈 때 질주하는 것은 기분이 좋지만, 아키타에서 미끄러져 다친 이후 내리막에서도 겁이 나 속도를 내기 무서웠다. 그래서 핸들바의 브레이크를 꽉 쥐고 타느라 손목이 너무 아팠다. 게다가 땀으로 젖은 옷이 바람으로 마르면서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산에서 내려온 뒤의 국도 역시 만만치 않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인도가 사라져서 왕복 2차선 끝을 달려야 했는데, 문제는 오고 가는 차량이 통행량이 너무 많았다. 보통 뒤따라오는 차량이 나를 피해서 차선을 넘어 살짝 역주행하며 추월해 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양방 차선 통행이 모두 잦다 보니 나를 추월하지 못해 내 뒤에 차량이 줄지어 밀리는 것이었다. 혹은 내 옆을 특히 이곳에서도 대형 화물 트럭들이 내 옆을 슝슝 지나가곤 했다. 밤이 아니더라도 어제처럼 정신적으로 힘겨워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인도가 나와 잽싸게 갈아탔다. 가던 도중 갑자기 뒷바퀴에 뭔가 걸린 듯한 우당탕하는 소음이 나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세운 뒤 뒷바퀴를 찬찬히 보았다. 스포크 하나가 터져 있었다. 스포크가 터졌는데 라이딩을 해도 되긴 할까?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일단 어떻게 되든지 간에 산길 한가운데였기에, 터졌던 스포크를 제거한 뒤 다시 라이딩을 이어갔다.


키요츠 협곡을 들렀던 대가로 야간 라이딩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다카사키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가게도 많아지고 거리도 환해졌기에 덜 위험했다. 다행히 숙소까지는 스포크가 터진 바퀴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이번 여행에 야간 라이딩은 위험해서 절대 하지 않는다고 누가 다짐했었더라….



늦은 밤 다카사키의 숙소 ‘matoi hostel’이라는 게스트하우스였다. 가격도 저렴한 데다 위치가 외진 곳에 있어서인지 리뷰 수는 적었지만 리뷰가 무려 5점 만점에 5점이었다. 얼마나 좋길래 단 한 사람도 4점을 주지 않은 걸까?


일단 건물 자체가 게스트하우스 치고 지나치게 깨끗하고 예뻤다. 원목의 나무로 된 로비의 테이블과 기둥, 그리고 다른 좁은 게스트하우스에 비해 도미토리마저도 정말 널찍했다. 주방은 꼭 무인양품 매장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여러 나무로 된 가구들로 즐비했다. 샤워를 하는데 심지어 샴푸와 린스도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싸구려 제품이 아닌 무인양품 제품이었다. 이 정도면 정말 5점 만점을 받을 만한, 리뷰 남기기를 귀찮아하는 나도 기분이 좋아서 리뷰를 남겨주고 싶을 정도의 숙소였다.


1,000미터를 넘었지만 키요츠 협곡을 간 것을 포함해 오늘 기록을 보니 누적 고도는 2,000미터였다. 스포크가 터진 채 타도 되냐고 인터넷에 올렸던 질문에는 “그냥 타자 타다가 X져도 괜찮으면”이라는 커뮤니티 특유의 격한 어조의 댓글이 올라왔다. 결국 내일은 일찍 출발하지 못하고 먼저 가게에서 수리를 하고 가야만 했다. 내일 도쿄에 도착할 수 있긴 한 걸까? 바꿀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성급함이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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