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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로우 Mar 07. 2024

가와고에로의 뜻밖의 여정

일본종주 15일차 : 다카사키~가와고에

아침에 숙소를 나와 가장 가까운 자전거 수리점에 갔다. 어제 자전거 바퀴의 스포크가 터져서 오늘 출발 전 수리를 하고 가야만 했다. 9시부터 영업이라고 되어 있던 가게에 시간 맞춰 왔는데, 불은 꺼져 있었고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그때 마침 바로 앞에서 주인인 듯한 나이가 꽤 드신 어르신이 가게 앞을 지나다니고 있어서 물었다. 


“혹시 여기 가게 주인이신가요?”라고 묻자, 그가 맞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자전거 스포크가 터졌는데, 혹시 지금 고칠 수 있냐고 물었는데 그가 솰라솰라 뭐라고 대답했다. 나이 드신 분이라 일본어를 알아듣기가 어려웠는데, 대충 ‘등록이 되지 않은 자전거는 수리할 수 없다’라는 답변이었다.


‘뭐야… 그럼 어딜 가도 외국인은 자전거 수리를 못하는 건가?’


조금 불안했다. 일단 다시 자전거를 끌고 조금 더 먼 곳에 있는 자전거 수리점에 갔다. <사이클 요시다>라는 가게였는데, 방금 가게와는 달리 굉장히 큰 전문점이었다. 수 백대의 자전거가 가게 내부에 즐비해 있었다. 자전거를 끌고 들어가 스포크가 터졌다고 말하자, 정말 다행히도 이곳에서는 수리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아 냉큼 자전거를 부탁했다.



하지만 수리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늘 도쿄까지 가야 해서 빨리 출발해야 하는데…’라고 속을 앓으며 기다렸던 수리는 1시간 반이나 걸려서 11시 반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수리비는 무려 8600엔이었다. 벌벌 손을 떨면서 현금을 건넸다. 점원은 트렁크백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스포크가 터졌을 뿐 아니라, 뒷드레일러도 정상 이상으로 휘어져 있어 수리비가 많이 청구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아무래도 아키타에서 자빠지면서 휘었던 것 같았다. 낙차 이후 바로 아키타에서 수리를 했었어야 했는데, 아키타에서 여기까지 그런 상태로 무려 500~600km 이상을 달려왔다니. 큰일이라도 났었더라면 하면서 나의 안전불감증에 스스로도 혀를 내둘렀다.


결국 자전거를 고치는 데에만 점심시간이 되어서 150km 정도 떨어진 도쿄까지 갈 수 있을지가 불투명해졌다. 뭐 어쩌겠어, 하고 일단 점심부터 먼저 먹기로 했다. 어제 만난 다카사키에 사는 친구에게, 오늘 먹을 메뉴를 추천받으려고 “다카사키는 뭐가 제일 유명해?”라고 물었는데,


“어… 음… 글쎄, 여기 다카사키에 뭐가 유명하더라? 아, 돈카츠 파스타가 유명해!”


“돈카츠 파스타? 그건 대체 무슨 조합이야?”


“나도 몰라. 우리 언니가 먹어봤다는데 맛있대.”


“넌 먹어봤어?”


“아니?”


하고 그녀가 깔깔 웃었다. 아무튼 그녀는 정체불명의 돈카츠 파스타의 원조격이라는 다카사키의 프랜차이즈인 <샹고(Shango)>라는 가게를 알려 주었다. 자전거 수리점에서 꽤 가까운 곳에 샹고의 1호점이 있어 그쪽으로 가기로 했다. 상상과는 달리 돈카츠 파스타라는 단일 메뉴를 미는 가게가 아니라, 여러 가지 종류의 파스타나 피자를 파는 서양식 레스토랑 같은 느낌이었다. 점심 개장시간인 11시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갔음에도 역시나 본점이라 그런지 이미 사람들이 꽤 웨이팅을 하고 있었다.


과연 돈카츠와 파스타를 함께 먹으면 어떤 맛일까?라는 기대와 함께, 내 차례가 되어 점원의 안내를 받고 입장했다. 레스토랑에 혼자 온 사람은 유일하게 나뿐이었다. 그래도 기죽지 않고 자신감 있게 돈카츠 파스타 하나를 주문했다. 


돈카츠 파스타는 말 그대로, 정말 어떠한 특별함도 없이 아주 정직하게 파스타 위에 정확히 돈카츠가 올려져 있는 음식이었다. 포크를 이용해 적당히 파스타 면과 돈카츠를 결합하여 둘의 궁합을 맛보기 위해 한입에 넣었다. 어쨌든 같이 먹으면 어울리니까 이렇게 판매하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와, 정말 맛도 정직했다. 그냥 돈카츠 맛과 파스타 맛이었다. 둘의 맛이 입안에서 따로 노는 느낌이다. 게다가 특제 소스가 굉장히 인스턴트 느낌이 강해서(꼭 편의점에서 파는 파스타 소스맛 같은 느낌) 굳이 이 돈을 주고 이 것을 사 먹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게 도대체 왜 유명한 음식인거지?



어쨌든 맛이 있든 없든 돈카츠 파스타로 오늘의 체력을 충전한 후 도쿄로 향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점심이었기에 도쿄까지 갈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다카사키부터 도쿄까지는 거의 대부분 시가지의 연속이다. 그래서 신호에 멈출 일이나, 도로 대신 인도를 탈 일이 많아 속도를 내기가 쉽지가 않았다.


인도에는 특히나 요철이 많아서 자전거가 덜컹거릴 때마다 전해져 오는 충격으로 온몸이 점점 망가져가는 것만 같았다. 항상 뜻대로 되지 않는 일정에 짜증이 솟구쳤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페달을 밟는 것뿐이었다. 도쿄는 80km밖에 남지 않았는데 시간은 오후 2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이번 종주 중에 한 가지 깨달은 것은, 평균 속도를 20km/h로 계산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계산하면 오후 6시 반에 도쿄 도착 예정이었지만, 중간에 쉬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길을 잘못 들거나 하는 너무 많은 변수가 존재했다. 사실상 4시간이 아니라 최소 5~6시간으로 계산해야 했으므로, 도쿄에는 최소 오후 8~9시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해야만 했다. 오늘 안에 도쿄를 갈 수 있기는 할까?


지나는 근처에 도쿄까지 흘러가는 아라카와 강이 있었다. 나는 혹시 강 쪽이라면, 한강처럼 라이딩 코스가 조성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큰길에서 벗어나 요리조리 주택가의 골목길을 통해 아라카와 강에 도착했다. 강둑 언덕 위로 올라가자, 아스팔트로 된 쭉 강을 따라 이어진 길이 나타났다. 역시! 나의 예상이 맞았다. 간간이 지나다니는 산책 중인 동네 주민을 제외하고서는, 둑길 위에는 차도 아무것도 없어서 신나게 속도를 올려서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코스의 행운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걸리는 시간은 매한가지였으니, 오후 5시가 되자 해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고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가로등이 없기에 깜깜해질 강둑길을 벗어나야만 했다. 어쩌지? 일단 그나마 밝은 도심지로 가기로 했고, 가장 나의 위치와 가까웠던 가와고에라는 도시가 구글맵에 보여서 그쪽으로 가자고 우선은 결정했다.


가와고에로 가기 위해 아라카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널 때, 노을과 함께 큰 산의 실루엣이 보였다. 설마 하고 지도로 검색해 방향을 맞춰보니, 바로 그 산은 후지산이 맞았다. 드디어 후지산이 보인다는 사실에 감개무량함과 동시에, 이 먼 사이타마 현에서도 후지산이 보인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어느새 멀리 오래된 목조식 건물들과 주황색 불빛들이 보여 가와고에 시내에 도착했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가와고에는 과거 일본의 거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관광지로도 유명한 도시였다. 하지만 나는 어두워져서 어쩔 수 없이 예정에도 없던 가와고에에 온 것이었기에 썩 기분은 즐겁지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먼저 조금 쉬기 위해 가와고에의 유명한 스타벅스에 잠시 들렀다.


야간 라이딩을 해서 오늘 도쿄까지 남은 50km를 갈 것인가? 아니면 그냥 가와고에에 머무르고 내일 도쿄에 갈 것인가? 머무르려면 비싼 호텔보다는 넷카페에 가서 돈을 아끼는 것이 좋은데. 넷카페에선 또 자기가 정말 싫다. 그렇게 생각 없이 지도앱을 펼쳐 본 도중, 갑자기 검색하지도 않은 '차부다이(Chabudai)'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 하나가 지도에서 눈에 띄었다. 그래, 가격이 그냥저냥이고 자리가 있다면 오늘은 그냥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쉬고 가자, 급하게 가지 말고 여유 있게 가자 라며 나 스스로를 다독이고는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들어가서 예약 없이 바로 묵을 수 있는 자리가 하나 있냐고 묻자, 딱 하나가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뻐 바로 묵겠다고 이야기하고 주인의 안내를 받아 서둘러 빨리 쉬고 싶어서 여권을 건네고 예약서를 작성했다.


가와고에의 게스트하우스 차부다이

안내를 도와주던 게스트하우스의 직원이 내게 “축제 때문에 놀러 오셨어요?”라고 물었다. 축제라고? 내가 “네? 축제요?”라고 되묻자, 그 직원은 그제야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설명해 주었다.


“아, 내일 여기 가와고에에서 축제가 있거든요! 시간 맞춰서 잘 오셨네요. 1년에 단 이틀만 열리는 축제예요.”


정말 검색해 보니 가와고에 마츠리(축제)가 있었다. 매년 10월의 세 번째 주의 주말에 열린다는 축제 날에, 어제 자전거 스포크가 터지고 수리를 받아서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예정에도 없던 가와고에에 우연히 오게 된 것이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도쿄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얼마나 속을 애태웠었던가. 



게스트하우스는 묵지 않는 사람들도 음식과 술을 먹을 수 있는 가게도 겸하고 있었는데, 내일이 축제여서 그런지 정말 사람들로 북적였다. 숙박객 전용의 주방이 있는 좌식 테이블에 앉아서 여행기와 일기를 쓰고 있었다. 아까 나의 체크인 안내를 도와주었던 직원 여성 한 명이 옆에 앉더니 말을 걸기 시작했다. 꼭 뭔가 만화에 나올 것만 같은, 까무잡잡한 피부가 특유의 시골에서 상경한 이미지를 풍기는 여자였다. 그리고 또 다른 숙박객 한 명이 우리의 대화에 끼었는데, 40대의 요코하마에서 왔다는 여성이었다. 그녀도 내일 축제를 보러 이곳 가와고에까지 왔다고 했다.


사람들과 어울려 놀 생각은 없었는데. 나는 소위 유행하는 MBTI의 결과가 I인, 내향적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여러 숙박객들이 합류해서 얼떨결에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한 40~50대로 보이는 일본 여성이 독일 여성 친구를 데려 왔고, 이후에 미국인 남성 한 명이 참가해 5명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연찮게 내 국적을 밝히자 미국인이 자신의 여자친구도 한국인이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일본에 와서 가장 일본어를 많이 사용한 날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다양한 국가의 외국인들과 함께 일본어, 영어를 사용해 가며 대화를 할 수 있다니. 역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종주를 시작한 이후 정말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던 너무 즐거운 밤이었다. 기대되는 일본에서 처음 보는 축제와 기다려라, 도쿄. 내일은 정말 드디어 도쿄에 도착이다.




블로그에서도 더 많은 사진과 함께 종주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ywhfrv/22327658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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