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종주 15일 차 : 다카사키~가와고에 (93Km)
자전거 가게가 문을 열어야만 출발할 수 있기에 강제로 느긋한 아침을 보내게 되었다. 주인이 직접 아침에 무려 무료 커피도 만들어 주었다.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주인이 “몇 달 전에도 한 유튜버가 자전거로 일본 종주를 한다는데 여기서 머물다 갔거든요.” 알고 보니 나도 일본 종주 전에 참고 삼아 봤던 ‘대빠리 Daebbari’라는 유명한 유튜버라서 신기했다.
체크아웃 후 급히 가까운 자전거 수리점으로 향했다. 시간은 오전 10시. ‘오늘 도쿄까지 가야 하는데….’하고 발을 동동 굴러봤자 걸리는 시간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기다리는 것이 고통스러워 수리하고 있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수리는 무려 1시간 반이나 걸렸다. 수리비는 8600엔. 값싼 숙소면 이틀은 족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피 같은 여행 자금이 빠져나갔다.
무거운 트렁크 백 때문에 스포크가 터졌을 거라고 점원이 설명해 주었다. 뒷드레일러도 크게 휘어져 있었다고 한다. 아마 아키타에서 사고가 나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낙차 이후 바로 다음 날 점검을 받으러 갔어야 했는데. 단순히 굴러간다고 아키타에서 여기까지 무려 5~600킬로 이상을 달려왔다니, 나의 안전불감증에 스스로도 혀를 내둘렀다.
가게를 나오자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오늘 과연 150킬로 정도 떨어진 도쿄까지 갈 수는 있을까? 이미 이렇게 된 걸 어쩌겠냐는 체념과 함께 일단 점심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다카사키 출신이라던 친구가 추천해 준, 다카사키의 명물인 ‘돈카츠 파스타’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돈카츠 파스타? 그건 대체 무슨 조합이야?”
“나도 몰라. 우리 언니가 먹어봤다는데 맛있대.”
“넌 먹어봤어?”
“아니? 네가 한 번 먹고 후기 좀 들려줘.”
하고 그녀가 깔깔 웃었다. 아무튼 그녀는 정체불명의 돈카츠 파스타를 판다는 프랜차이즈 가게인 ‘샹고(Shango)’를 알려 주었다. 상상과는 달리 샹고는 돈카츠 파스타라는 단일 메뉴를 파는 가게가 아닌 여러 종류의 파스타나 피자를 파는 서양식 레스토랑이었다. 개장시간인 11시 즈음에 갔음에도 역시나 본점이라 그런지 이미 정장 차림의 주변 직장인들이 꽤 웨이팅을 하고 있었다.
이런 레스토랑에 당연하게도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래도 기죽지 않고 자신감 있게 돈카츠 파스타 하나를 주문했다. 돈카츠 파스타는 말 그대로, 정말 어떠한 특별함도 없이 정직하게 파스타 위에 정확히 돈카츠가 올려져 있는 음식이었다. 정말 맛도 정직했다. 그냥 정확히 돈카츠 맛과 파스타 맛이 함께 난다. 둘의 맛이 입안에서 따로 노는 느낌이다. 따로 팔 정도로 유명한 특제 소스를 사용한 거라던데 내 입맛에는 그다지 맞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왜 유명한 음식인 거지?
어쨌든 돈카츠 파스타로 체력을 비축한 후, 페달을 본격적으로 밟기 시작했지만 저녁까지 도쿄까지 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특히 다카사키부터 도쿄까지는 대부분 시가지의 연속이어서 신호에 멈춰야 하거나, 도로 대신 인도를 탈 일이 많아 속도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도쿄는 80킬로밖에 남지 않았는데 시간은 오후 2시 반. 이번 종주 중에 한 가지 깨달은 것은, 내 실력이 시간당 20킬로라고 평균 속도를 20킬로로 계산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계산하면 오후 6시 반에 도쿄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중간에 쉬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길을 잘못 들 수도 있는 너무 많은 변수가 존재했다. 사실상 4시간이 아니라 최소 5~6시간으로 계산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도쿄에는 최소 오후 8~9시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지도를 보니 지나는 근처에 도쿄까지 흘러가는 아라카와 강이 있었다. 혹시 강 쪽이라면, 한강처럼 라이딩 코스가 조성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도로에서 벗어나 요리조리 주택가의 골목길을 따라 아라카와 강에 도착했다. 강둑 언덕 위로 올라가자, 쭉 강을 따라 이어진 아스팔트 길이 나타났다. 역시! 나의 예상이 맞았다. 간간이 산책 중이던 주민들을 제외하고서는, 둑길(どて) 위에는 차가 다니지 않아 속도를 올려서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코스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걸리는 시간은 매한가지였다. 오후 5시가 되자 해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고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시가지에 비해 강가에는 가로등이 전혀 없어 암흑천지로 변할 것이 뻔했다. 일단 먼저 둑길을 빠져나와 다시 밝은 도심지로 향하기로 했다. 현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가와고에라는 도시였다.
가와고에는 과거 일본의 거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작은 에도’라는 별명으로 관광지로도 유명한 도시다. 오래된 목조식 건물들과 주황색 불빛들이 보이자 가와고에 시내에 도착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두워져서 어쩔 수 없이 예정에도 없던 가와고에에 도착한 것이었다.
야간 라이딩을 감행해서 오늘 도쿄까지 남은 50킬로를 갈 것인가? 아니면 그냥 여기에서 자고 내일 도쿄에 갈 것인가? 넷카페는 불편해서 정말 가기 싫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숙소를 찾던 도중, 검색하지도 않은 ‘차부다이(Chabudai)’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 하나가 구글 지도에 보였다. ‘그래. 가격이 그냥저냥이고 남은 침대가 있다면 오늘은 그냥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쉬고 가자. 급하게 가지 말고 여유 있게 가자.’라고 하며 스스로를 어린아이 달래듯이 하며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스태프에게 “오늘 묵을 수 있나요?”라고 묻자, 딱 도미토리 한 자리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뛸 듯이 기뻐서 누가 자리를 채갈 것처럼 바로 묵겠다고 하고는 여권을 건넸다.
“축제 때문에 놀러 오셨어요?”
한 스태프가 체크인을 도와주며 내게 물었다.
“네? 축제요?”
“아, 내일 여기 가와고에에서 축제가 있거든요! 시간 맞춰서 잘 오셨네요. 1년에 단 이틀만 열리는 축제예요.”
검색해 보니 정말 가와고에 축제가 있었다. 매년 10월의 세 번째 주 주말에만 열린다고 한다. 어제 자전거 스포크가 터져 수리 때문에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예정에도 없던 가와고에에 머물게 되어 방금까지만 해도 죽상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유명한 축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일련의 사건 하나하나가 나를 이곳 가와고에로, 축제를 볼 수 있도록 이끌어준 것이었다.
게스트하우스는 묵지 않는 사람들도 음식과 술을 먹을 수 있는 바를 겸하고 있었다. 내일이 축제여서 그런지 가게 안은 손님들로 인산인해였다. 로비에 있던 숙박객용 좌식 테이블에 앉아 일기를 썼다. 아까 전 체크인을 도와준 스태프가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뭘 쓰고 계세요?”
그녀는 꼭 뭔가 만화에서 나올 것만 같은, 까무잡잡한 피부가 눈에 띄는 시골에서 갓 상경한 듯한 이미지의 여자였다. 이윽고 다른 숙박객 한 명이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40대의 요코하마에서 왔다는 여성이었다. 그녀 역시 내일 축제를 보러 이곳 가와고에까지 왔다고 했다.
점점 몇몇 숙박객들이 더 앉기 시작했다. 아, 여행기 써야 하는데. 어쩌다가 여섯 명 정도의 여러 숙박객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50대 정도로 보였던 일본 여성은 갑자기 친구를 소개한다며 또 다른 독일 여성 한 명을 데려왔다. 이후에 미국인 남성 한 명이 가세했다. 내 국적을 밝히자, 미국인이 자신의 여자친구도 한국인이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자 어느새 여행기를 쓰고 있던 것은 까맣게 잊은 채 즐겁게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성격이었나? 독일인, 미국인, 일본인과 한국인. 각기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서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니. 언제부턴가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말을 걸기보단 걸어주길 기다리고, 걸어주지 않으면 그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나약함 때문에, ‘억지로 사람과 어울릴 필요 없다’, ‘내향인은 혼자 있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라는 말들로 스스로 변명하곤 했다. 나는 A형이라서, 나는 I라서, 나는 얕은 것보다 깊은 인간관계가 좋다고.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과 만나며 행복해할 수 있는 내 모습을, 가와고에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홋카이도에서의 종주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행복하게 사람들 속에 섞여 지낼 수 있었던 밤. 여기 가와고에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신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처음 보는 일본 축제, 그리고 내일은 정말 드디어 도쿄에 도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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