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로우 Mar 04. 2024

군마 1000m 산맥을 넘어서

일본종주 14일차 : 유자와~다카사키

날이 밝고 칠흑 같은 암흑이 걷히자, 꼭 스릴러 호러게임에서 나올 것만 같던 골목길은 정말 평화로운 마을로 변해 있었다. 유자와를 둘러싼 푸릇푸릇한 산에는 깎아내린 겨울철에는 스키장으로 변신할 예정인 평사면들이 보였다. 나중에 도쿄에 교환학생을 오게 된다면, 한국처럼 방학 때 대학교 서클 일본인 친구들과 유자와의 스키장에 놀러 오는 행복한 상상을 했다.


군마의 1000m 산맥으로 향하기 전에 한 가지 고민이 있었는데, 바로 이곳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키요츠 협곡’이라는 곳을 갈지 말지였다. 일본의 3대 협곡이라고 불린다는 곳으로, 파노라마 스테이션이라는 유명한 협곡 전망대가 SNS 사진에 많이 보였다. 반원형의 협곡이 보이는 전망과 아래의 수면으로 반사되어 비치는 모습의 사진을 보자마자 “와. 여기 어디야?”라고 하며 일본에 오기도 전에 구글맵에 저장해 둔 곳 중 하나였다.


키요츠 협곡의 모습


하지만 문제는 일단 10km라 하더라도 원래 가야 할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협곡이다 보니 아무래도 산길을 타야 할 것이 눈에 선했다. 어쨌든 돌아와서 나중에 1000m 산을 넘어야 하는데... 이곳에서 체력을 빼버리면 이후에 라이딩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시 이곳을 지나게 될까? 사실상 이번 종주 이후 내 생애에 다시는 한번 더 오지 않을 것 같으니까 지금 들를 수 있다면 무조건 다 보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 지금 아니면 대체 언제 가겠어. 안 가봐서 후회할 바에는 갔다 오는 게 낫지.’


그렇게 나는 뒤가 없는 무모한 결정을 내리고 키요츠 협곡으로 페달을 밟고 향하기 시작했다. 예상한 대로 마을을 벗어나 험난한 산길이 펼쳐졌다. 문제는 그 험난한 오르막이 적당한 수준이 아니라 상상 이상으로 가팔랐다는 것이다. 산의 급경사가 너무 심해서 도로는 한눈에 봐도 Z자 형태를 그리며 지그재그로 산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사실상 제대로 업힐을 타는 것은 9월에 일본에 온 이후 처음이었기에 아직 다리도 오르막길에 적응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숨이 차고 허벅지는 터질 것 같았다.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너무 힘든데, 나중에 산은 대체 어떻게 오르지? 하지만 돌아가기에는 이미 체력을 너무 많이 소비해 버렸다. 보상심리가 발동해서 협곡을 보는 보상이라도 받고 돌아가야만 했다. 힘겹게 오르막을 겨우 오르자, 이번에는 협곡으로 내려가는 긴 급경사의 내리막이 펼쳐졌다. 나는 큰일 났다는 생각을 했다. 내리막을 내려갈 때에도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차라리 협곡이 오르막 끝에 나타나는 게 낫지, 왜냐하면 협곡을 보고 나면 다시 돌아와야 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협곡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계곡을 낀 산속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키요츠 협곡의 입구에 도착해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웠다. 아침 9시 개장시간에 맞춰서 와서 관광객은 잘 보이지 않았다. 협곡은 기다란 터널을 통해 들어가 감상할 수 있다. 입장료는 성인 1000엔으로 꽤 비쌌다.


터널 군데군데에는 터널에 대한 설명이라든지, 여러 경치들과 터널 내부에 전시된 조형물들을 감상할 수 있는 섹션들이 있는데, 나는 시간이 급해 터널 끝의 하이라이트만 보기 위해서 제대로 감상할 겨를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신비한 느낌을 주려고 설치한 듯한 인위적인 주황색, 초록색, 파란색 등 갖가지 조명의 터널을 지나 드디어 마지막 코너에 도착했다. 긴 아치 형태 가운데 웅장한 협곡을 배경으로 한 커다란 공간의 바닥에는 얕은 물이 있어 그 공간을 정반대로 반사하고 있었다. 올 때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잘 안 보였는데, 역시 하이라이트인 이곳에 모두 모여서 사진을 연신 찍어대고 있었다.


사실 인물 사진을 찍기엔 꽤나 아쉬웠던 곳이다. 공간의 특성상 역광으로 찍힐 수밖에 없어 사진의 내 모습이 시커멓게 나와 내가 나인지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협곡은 분명히 멋졌지만, 사진에서 느껴지던 이 공간의 신비로움보다는, 실제로 보니 철판들의 이음새도 잘 보이고 물아래의 바닥도 보이고 여러모로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있다 보니 신비로움은 사라지고 단지 협곡 관광을 위해 멋지게 만들어놓은 듯한, 설계의 의도 자체가 꽤나 노골적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라리 그냥 협곡을 지나가는 아슬아슬한 다리 정도에서 구경하는 게 더 멋지지 않았을까…


어쨌든 협곡의 구경을 마치고 나올 때에도 서둘러 빠져나왔다. 올 때는 내리막이었지만, 다시 돌아갈 때에는 오르막인 길을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돌아가야만 했다.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했다가는 어제처럼 위험한 야간 라이딩을 감수해야 할 확률이 커지기 때문에 쉬면서 체력 안배를 할 시간도 없었다. 어제의 야간 라이딩은 정신까지 탈탈 털려 기억도 하기도, 다시 경험을 하기도 싫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급경사를 올라서 왔던 길을 되돌아서 다시 내가 머무른 숙소가 있는 마을로 돌아왔다. 유자와로 돌아오니 오전 10시였다. 사실상 원점으로 다시 돌아와 오전 10시에 출발하게 된 셈이다.


군마 산맥을 넘는 약 50여 키로 동안 편의점이 아예 없을 예정이었기에 미리 편의점에 들러 빵과 에너지젤, 에너지 드링크 등 잔뜩 먹을 것을 샀다. 눈앞에 보이는 거대하고 푸른 산과 함께, 유일하게 이곳을 통과하는 도로인 17번 국도로 바퀴를 내디뎠다. 저 산이 바로 오늘 내가 두 바퀴로 올라야 할 산이었다.


사실 군마가 키요츠 협곡보다 훨씬 덜 힘들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경사가 그렇게 급격하진 않았다. 평균 경사도는 5~6도 정도였다. 낙석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긴 터널이 자주 나왔다. 특히 터널에서 공사를 많이 하고 있었다. 왕복 2차선인 이곳의 경우 한 차선을 폐쇄해 두고, 양 쪽 끝에 인부들이 무전을 주고받으며 차들을 한쪽씩 통과시킨다. 물론 자전거도 예외는 없었다.


“차량 N대, 그리고 자전거 1대 지나갑니다.”


라고 말하고는 인부는 봉을 휘두르며 가라는 신호를 보이면 차량들이 이동하기 시작한다.


차량들의 뒷꽁무니를 따라가면서도, 특히 가장 느린 자전거는 아무리 전력질주를 하더라도 항상 마지막으로 터널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터널을 빠져나갈 때면 항상 반대 차선에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차량들이 보였는데, 마지막인 나만 통과하길 기다리고 있는 차량들을 볼 때마다 눈치가 보여서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가곤 했다. 참고 기다려주셔서 다들 감사했습니다.


쉬고 오르기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1000m를 타고 올라갔다. 사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힘들긴 했지만 경사가 키요츠 협곡 정도도 아니었기에, 한국 이화령의 600m든 이곳 군마의 1000m든 힘듦의 정도는 비슷했던 것 같다. 아니, 이화령 때를 생각하면 정말 죽을 뻔했다고 생각했었는데(자전거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지금은 꽤 올라갈 만했다. 그만큼 내 자전거 실력이 성장했다는 것일까?



어쨌든 오후 2시에 드디어 오르막의 마지막 정점을 찍었다. 뭔가 이화령처럼 위에 도착하면 휴게소라던지 뭔가 있을까 기대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부터 내리막이라는 사실도 몰랐을 정도였다. 내리막을 내려가기 시작할 때, 원숭이 주의 표지판이 보였다. 산에 원숭이가 산다고? 내려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원숭이가 나오길 기대했지만 원숭이는 아쉽게도 끝내 보이지 않았다.


내리막은 정말 과장을 보태서, 자전거를 타면서도 멀미가 난다 싶을 정도로 구불구불한 커브 구간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내려갈 때 질주하는 것은 기분이 좋지만, 아키타에서 미끄러져 다친 이후로 커브 구간이나 내리막 구간에서도 겁이 나 속도를 내기가 무서웠다. 그래서 핸들바의 브레이크를 꽉 쥐고 타느라 타고나면 손목이 매우 아팠다. 게다가 바람 때문에 너무 춥다.


여차저차 내리막을 내려가 4시간 만에 반가운 편의점도 다시 보이고, 어느새 마을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내려오면 누마타라는 도시가 있는데, 나는 오늘 더 아래에 있는 다카사키까지 갈 예정이었다. 다카사키에서 도쿄까지는 150km 정도이므로, 다카사키에만 도착한다면 내일 열심히 달리면 도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도쿄가 코앞이었다.


하지만 누마타에서부터의 국도길 역시 만만치 않은 고난의 연속이 이어졌다. 어느새 인도가 사라져 버려서 차선 끝을 달려야만 했다.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인데, 문제는 오고 가는 차량이 너무 많았다. 보통 자전거를 피해서 차선을 넘어 살짝 역주행을 하며 나를 추월해 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양쪽 다 차량 통행이 많다 보니 내가 앞에 가고 있다 보면 반대편 차량들 때문에 추월을 하지 못해 내 뒤에 차량들이 줄지어 밀릴 수밖에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이 정도면 자전거 출입금지 도로로 해 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자전거 출입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고 딱히 다른 우회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이곳에서도 대형 화물 트럭들이 내 옆을 슝슝 지나가곤 했다. 밤이 아니더라도 어제처럼 정신적으로 힘겨워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인도가 나와서 잽싸게 인도로 갈아탔다. 하지만 가던 도중 갑자기 뒷바퀴에서 무언가 딱딱한 것이 바퀴에 걸린 듯 한 탕탕탕 소음이 나기 시작했다. 세운 뒤 자전거 뒷바퀴를 보자, 뒷바퀴의 스포크 하나가 터져 있었다. 스포크가 터져버린 것은 난생처음이었기에, 먼저 스포크가 없이 타도 되냐고 인터넷에 검색을 했다. 다행히 조금 타도 되지만 최대한 빨리 고쳐야 했다. 산길 한가운데에서 할 수 있는 조치가 아무것도 없었기에, 일단은 터져서 걸려 있던 스포크를 꼬아서 빼냈다.



오후 4시였기에 서서히 해도 저물어 가고 있었다. 결국 어두워졌다. 어떻게 보면 키요츠 협곡을 들렀기에 시간과 예정상 야간 라이딩이 당연했다. 어두컴컴해진 도로를 달리면서,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도심지인 다카사키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가게도 많아지고 거리도 환해졌기에 덜 위험한 라이딩을 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 야간 라이딩은 위험해서 절대 하지 않는다고 누가 다짐했었더라...



다카사키의 숙소는 <matoi hostel>이라는 호스텔이었다. 가격도 저렴한 데에다, 위치가 외진 곳에 있어서인지 리뷰 수는 적었지만, 리뷰가 무려 5점 만점에 5점이어서 오게 되었다. 얼마나 좋길래 단 하나의 리뷰도 4점을 주지 않은 걸까?


일단 건물 자체가 너무 깨끗하고 예뻤다. 원목의 나무들로 된 로비의 테이블들과 기둥들, 그리고 다른 좁은 호스텔들에 비해서 도미토리 룸마저도 정말 널찍했다. 주방은 꼭 무인양품 매장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여러 나무로 된 가구들로 즐비했다. 샤워를 하는데 심지어 샴푸와 린스도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싸구려 제품이 아닌 무인양품 제품이었다! 이 정도면 정말 5점 만점을 받을 만한, 리뷰 남기기를 귀찮아하는 나도 기분이 좋아서 리뷰를 남겨주고 싶을 정도의 숙소였다.



그렇게 오늘의 라이딩을 마치고, 예전에는 도쿄에 살지만 지금은 본가인 다카사키에 있는 일본인 친구를 만났다. 작년 11월 이후로 거의 1년 만에 만나는 셈이었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와 하며, 도대체 일본인도 하지 않는 일본 종주를 왜 하냐며 머리가 이상하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게다가 정말 감사하게도 헤어질 때 친구의 어머니가 친구를 데리러 오셨는데, 나도 태우시고는 10킬로나 떨어져 있던 숙소로 바래다주셨다. 잠시 중간에 편의점에 들러서 음료수도 하나 사 주셨다. 여기까지만 해도 너무 감사한데, 마지막에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내리려고 하니 아까 편의점에서 사셨던 빵, 과자, 음료 등이 잔뜩 담긴 봉투를 나에게 건네면서 사실 선물이라는 것이었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자전거를 타려면 잘 챙겨 먹어야 한다면서 극구 나에게 주시려고 하셨다. 몸 둘 바를 몰라 나는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친구, 그리고 친구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친구에게 주소를 물어봐서 꼭 보답으로 선물을 보내야겠다.


일본인 친구 어머니가 사주셨던 간식들




더 많은 종주 사진들은 블로그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ywhfrv/223274598117


이전 18화 목숨 건 일본 화물트럭과의 야간 라이딩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