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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로우 Mar 21. 2024

지옥의 하코네 오르막길

일본종주 18일차 : 요코하마~누마즈

  게스트하우스 직원에게 유성매직을 빌렸다. 꼭 2000년대의 일본 락 밴드나 호스트바에서 볼 법한 탈색한 색깔의 샤기컷을 하고 있던 직원은, 겉으로는 쌀쌀해 보였지만 다행히 친절하게도 유성매직을 빌려주었다.


내가 유성매직을 빌린 이유는 자전거 뒤에 <일본 종주 중>이라고 써붙이기 위해서였다. 왜? 그냥 인터넷이나 여러 매체에서 그런 걸 쓰고 다니길래… 열심히 한 글자 한 글자씩, ‘일본 일주’라고 간드러지게 한자를 크게 썼다.


사실 ‘일주’라는 단어와 ‘종주’라는 단어는 뜻이 다르다. 일주란 한 바퀴를 도는 것이고(예를 들면 제주도 일주), 종주는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까지를 횡단한다는 뜻이라서, 사실 나는 일본을 ‘일주’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종주’라는 단어 대신 ‘종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종주라고 하면 일본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다.



뭐, 잘못 썼다 치더라도 누가 지적을 하겠어. 이 당시에는 그런 것도 모르고 일주라고 썼지만, 누군가가 뭐라고 하면 그냥 일주를 하다가 최남단까지 와서 관뒀다고 하면 되지. 어쨌든 주워 온 상자에 큼지막한 글자를 쓴 뒤에 자전거 뒤에 케이블타이로 매달았다.


이제야 좀 자전거 종주를 하는 사람답군… 아니, 대단하다기보다는 '저 고생하고 있어요'라고 써붙인 것 같다. 불쌍해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일본 종주를 써붙이고 막상 거리로 나오니, 내가 보라고 써놓고도 사람들이 볼까 봐 부끄러워서 거리를 다니기가 힘들었다. 시내라서 그런 것 같다. 빨리 요코하마를 탈출해야 한다. 어쨌든 겨우 철판을 얼굴에 깐 채 게스트 하우스 근처에 있던 맥도날드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오늘은 가마쿠라까지 내려가 태평양 연안을 달려서 하코네 산을 넘을 예정이었다. 날씨도 따뜻하고, 어제 적은 거리를 달려서인지 다리도 가볍고 기분도 산뜻했다.


가마쿠라는 요코하마에서 정말 가까웠지만 직진으로 이어지는 국도가 없었기에, 이리저리 가마쿠라 방향으로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지도를 수시로 확인해 가면서 타야 했다.


가마쿠라에 가까워지자 점점 차량도 많아지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대부분 학생이었다. 이 시간에 학교가 마쳤을 리는 없고, 수학여행 등으로 가마쿠라에 온 학생들이 많은 것 같았다. 이곳에서도 소풍을 온 듯한 알록달록한 모자를 쓴 유치원생들이 귀엽게 줄을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이가하마 해변을 시작으로 쭉 가마쿠라 바다를 따라서 라이딩을 했다. 예전에 가마쿠라에 처음 왔을 때에는 막상 명성과는 달리 바다가 은근히 초라한 느낌이 들어서, ‘여기가 왜?’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시 와보니 뭔가 가마쿠라 바다만의 은은한 바이브가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내가 그때보다 더 일본에 심취해서 그런 거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점점 쌀쌀해져 가는 10월이었음에도 유이가하마 해변에는 은근히 서핑보드를 타고 있거나 바다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의 첫 장면에 바로 이 바다가 나온다. 책 속의 주인공도 '선생님'을 여기서 만났겠지.



유이가하마에서 에노시마 방면의 시치리가하마로 쭉 이어지는 방파제 길을 따라갔다. 경치가 이뻐서 바다를 배경으로 자전거를 한 컷 찍으려던 순간, 뭔가 어디서 낯이 익은 느낌을 느꼈다. 여길 어디서 봤더라? 아! 바로 <슬램덩크>의 표지에 나왔던 서태웅이 자전거를 탔던 곳이었다.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 보니 내 예상이 적중했다. 성지순례를 하러 굳이 찾아온 것도 아니었는데 가던 길에서 실제 장소를 우연히 마주치니 반가웠다. 실제로 보면 라이딩이 불가능한 길(애초에 길도 아니다)이다. 인도도 아니고 이 좁고 위험한 방파제 위에서 라이딩을 하는 서태웅은 정말 미친놈이 아닐까…




시치리가하마로 도착하자, 저 멀리 후지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마쿠라에서 후지산이 보인대, 말만 들었지만 항상 가도 보이지 않길래 의아해했는데, 에노시마 부근에서는 후지산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는 후지산이 보이는 게 신기했다. 날씨가 맑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꼭대기에 흰색 베일을 쓴 후지산을 정면에서 바라보면서 라이딩을 하니, 마치 내가 후지산을 향해 달려가는 것만 같았다. 명소여서 그런지 관광객뿐만 아니라 몇몇 라이딩을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내 인생에 한번쯤 꼭 달려보고 싶던 가마쿠라 해변을 드디어 오늘, 여기서 페달을 밟으며 달리고 있었다.


그 순간, 쌩하고 오른쪽으로 바이크 하나가 지나가더니 나를 향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어?” 자전거 뒤에 달았던 <일본 일주>를 보고서는 내게 엄지를 들어준 것이었다.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버려서, 게다가 처음으로 누군가가 반응해 준 일이라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말할 겨를도 없이 잠시 얼을 탔다. 5초 정도 뒤에야, ‘아, 뒤에 있던 걸 보고 해준 것이구나.’라고 깨닫고는 그제야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와서라도 제게 첫 응원을 보내주신 가마쿠라의 라이더 분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 뒤로도 몇 번씩이나 가마쿠라에서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다. 차량이 내 곁을 지나가면서 조수석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이따금 차창을 내리고는 “힘내요!”라고 외치거나 손을 흔들어주시고는 했다. 아까처럼 얼타지 않고 나도 그럴 때마다 항상 “감사합니다!”라고(물론 일본어로) 크게 대답하곤 했다.


요코하마에선 쪽팔린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써두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그 덕분에 정말 라이딩에 큰 힘이 되어서, 응원을 해주었던 모두에게 너무 감사했다(항상 차는 나를 지나쳐가지만, 가끔 신호에 막혀 내게 응원을 해 준 차를 내가 다시 지나갈 때는 조금 뻘쭘했지만...).






하코네 앞에 도달하기까지 134번 국도를 달리면서, 점심을 먹은 것 말고는 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다. 어느새 134번 국도는 1번 국도가 되었고, 곧 하코네가 나를 반길 예정이었다. 군마처럼 하코네 역시 가파른 오르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딱히 군마 때와 달리 별 생각이 없었다. 고도는 800m. 1000m도 넘었는데 800m야, 하고 방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800m도 국토 종주 때 올랐던 이화령의 600m보다 한참 높은 높이인데 말이다.


하코네 부근의 온천마을에 들어서서, 서서히 산길로 접어들며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오르막을 오르자마자 오늘 시즈오카까지 갈까라던 생각은 접었다. 경사가 군마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 정도면 내 실력으로는 자전거로 오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정말 가파른 곳에서는 일치감치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사서 벌컥벌컥 들이켠 후 자전거에 올라타도 얼마 가지 않아서 나동그라졌다.



쉬는 동안에 도저히 회복이 안 될 정도로 정신을 빼놓는 경사였다. 마을을 벗어나면서부터 더더욱 난코스가 펼쳐졌다. 경사도는 기본 10도 이상이었다. 뱀처럼 구불거리는 오르막길을 따라, 사실상 코스의 반 이상은 자전거를 끌고 걸어서 올라간 것만 같다.


허벅지는 터질 것 같고, 숨은 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가빠왔다. 사진으로는 좀처럼 여행에서 체감으로 느꼈던 가파른 경사가 잘 담기지 않는데, 여기는 사진에도 담길 정도였으니...



그렇게 가는 동안 대부분을 사실상 라이딩이 아닌, 자전거에 거의 몸을 싣다시피 해서 반 이상은 걸어서 1시간 반 만에 하코네 호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명한 호수 위에 떠 있는 유람선도 보였다. 온천 여행으로 도쿄에서 와야 할 곳을 자전거를 타고 왔다니... 도착한 시간도, 날씨도 너무 아쉬웠다. 구름이 좀 더 없었더라면 눈부시게 빛나는 하코네 호수를 볼 수 있었을 텐데. 홋카이도부터 여러 명소들을 둘러보고 왔지만 사실 그 명소들의 객관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날씨의 영향도 매우 큰 것 같아 함부로 여긴 좋다, 여긴 별로야라고 판단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나는 먼저 하코네에서 점찍어 두었던 <평화의 토리이>를 보러 찾아갔다. 호수 위에 빨간 토리이가 떠 있는 유명한 명소이다. 자전거와 함께 꼭 사진을 그 토리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하지만 평화의 토리이에 도착하자, 이 소망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선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진 하나를 찍기 위해서 사람들이 숲 깊숙한 곳까지 줄을 서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사진을 찍는 것은 포기하고는 그냥 가까이에서 다른 사람들이 순서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내 모습을 빼고 토리이를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하코네에서 오래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하코네의 숙소들은 대체로 다 호텔이라 비싸기 때문에 가까운 도시로 가야만 했다. 시즈오카는 이미 포기했으니 남은 곳은... 하코네에서 내리막이 끝나면 나타나는 누마즈였다. 하코네는 벗어나는 순간까지도 지옥의 오르막이 펼쳐졌다. 아무래도 호수이기에 지형상 다시 오르막을 올랐다가 산을 내려가야만 했다.


이미 체력은 털릴 만큼 바닥까지 털렸는데, 뭐가 남았다고 또 털어대는 하코네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더 생생하게 쓰자면 입에서 육두문자가 10초 단위로 쏟아져 나왔던 것 같다. 빨간 토리이는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더니 이내 호수와 함께 시야에서 자취를 감췄다.




누마즈로 가는 길이 서쪽 방향이다 보니 마침 해가 질 때여서, 눈앞에서 누마즈 너머로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 풍경은 너무 아름답고, 내리막이라서 전혀 힘들진 않았지만, 올라올 때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내리막을 내려갈 때에는 추위에 벌벌 떨며 라이딩을 했다.


누마즈에 도착하자 이미 하늘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이렇게 늦게 누마즈에 도착했는데 시즈오카는 무슨 얼어 죽을 시즈오카. 항상 과신했던 나 자신을 자책한다. 누마즈에서는 3000엔대 정도의 게스트하우스가 보이지 않아서 오늘도 넷카페에서 자기로 결정했다.


일본 여행 중 두 번째로 가는 넷카페 이용은 너무나도 쉬웠다. 회원카드를 만들게 되면 사실상 이후의 넷카페 이용은 식은 죽 먹기였다. 회원카드로 바로 아무런 제약 없이 체크인할 수 있고, 체크아웃할 때 돈만 계산하면 된다. 이곳 넷카페 <카이카츠 클럽>은 부스 없이 전부 개인실으로 된 구조라서 어쩔 수 없이 조금 비싸지만 개인실에서 머물게 되었다.


사실 넷카페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만족스러웠다. 샤워실에서 수건도 무료로 제공해 주고,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기 때문에 사실상 남을 신경 쓸 필요 없이 호텔처럼 머물다 가는 느낌이었다. 정말 정말 좁은 호텔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무료 아이스크림 두 개를 퍼먹다가 오늘도 피로에 골아떯어져서 잠에 들었다. 내일은 시즈오카를 지나서... 어디까지 가야 하지?




블로그에서도 사진으로 된 여행기를 읽으실 수 있어요!

읽어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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