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종주 18일 차 : 요코하마~누마즈 (113Km)
다음 날 아침, 숙소의 스태프에게 유성매직을 빌릴 수 있냐고 물었다. 꼭 세기말 일본 락 밴드나 호스트바에서 볼 법한, 탈색 샤기컷을 하고 있던 스태프는 겉으로는 쌀쌀해 보였지만 다행히도 친절하게 펜을 빌려주었다.
펜을 빌린 이유는 자전거 뒤에 ‘일본 종주’라고 써붙이기 위해서였다. 왜? 그냥 인터넷이나 여러 매체에서 자전거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걸 쓰고 다녔기 때문이다. 주워온 박스 종이 위에 ‘일본 일주’라고 크게 간드러지는 한자를 썼다. 사실 일주와 종주는 뜻이 달랐다. 일주란 한 바퀴를 도는 것이고(예를 들면 제주도 일주), 종주는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까지를 횡단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사실 일본 일주가 아니라 일본 종단이라고 썼어야만 했다(일본에서는 ‘종주’라는 단어 대신 ‘종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 종주라고 하면 일본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다).
뭐, 잘못 썼다 치더라도 누가 지적을 하겠어. 이 당시에는 그런 것도 모르고 일주라고 썼지만, 누군가가 뭐라고 하면 그냥 일주를 하다가 최남단까지 와서 관뒀다고 하면 되지. 어쨌든 큼지막한 글자를 쓴 뒤에 자전거 뒤에 케이블타이로 종이를 매달았다. 이제야 좀 자전거 종주를 하는 사람답군… 아니, 대단하다기보다는 ‘저 고생하고 있어요.’라고 써붙인 것 같다. 불쌍해진 것만 럼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일본 종주를 써붙이고 막상 거리로 나오자, 내가 써놓고도 사람들이 볼까 봐 부끄러워서 차마 얼굴을 들고 거리를 걸어 다니기가 힘들었다. 빨리 시내를 탈출해야 했다. 겨우 철판을 얼굴에 깔고 근처에 있던 맥도날드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오늘은 가마쿠라까지 내려가 태평양 연안을 달려서 하코네 산을 넘을 예정이었다. 날씨도 따뜻하고, 어제 적은 거리를 달려서인지 다리도 가볍고 기분도 산뜻했다.
가마쿠라는 요코하마에서 정말 가까웠지만 직진으로 이어지는 국도가 없었기에, 이리저리 가마쿠라 방향으로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지도를 수시로 확인해 가면서 타야 했다. 가마쿠라에 가까워질수록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이 시간에 학교가 마쳤을 리는 없고, 수학여행이나 현장 체험학습으로 가마쿠라에 온 학생들인 것 같았다.
가마쿠라 역 근처의 유이가하마 해변을 기점으로 바다를 따라 라이딩을 시작했다. 가마쿠라에 처음 왔을 당시 막상 바다가 명성과는 달리 은근히 초라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다시 와보니 뭔가 가마쿠라 바다만의 은은한 분위기가 있다고 해야 하나. 내가 그때보다 더 일본에 심취해서 그런 거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점점 쌀쌀해져 가는 10월이었음에도 해변에는 은근히 서핑보드를 타고 있거나 바다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의 첫 장면에 바로 이 바다가 나온다. 책 속의 주인공도 선생님을 여기서 만났겠지.
유이가하마에서 에노시마 방면의 시치리가하마로 쭉 이어지는 방파제 길을 따라갔다. 시치리가하마로 도착하자 먼 저편에 후지산이 보이고 있었다. ‘가마쿠라에서는 후지산이 보인대.’ 말로만 들었지만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흰색 베일을 쓴 후지산을 정면에서 바라보면서 라이딩을 하니, 마치 내가 후지산을 향해 직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명소여서 그런지 관광객뿐만 아니라 바이크, 자전거 라이딩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 순간 쌩하고 오른쪽으로 바이크 하나가 지나갔는데, 타고 있던 라이더가 한쪽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다. 순간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준 따봉인가? 그제야 오늘 아침에 자전거 뒤에 ‘일본 일주’를 써붙였던 것이 생각났다. 너무 순식간에, 게다가 처음으로 누군가가 반응해 준 일이라 고맙다고 말할 겨를도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번씩이나 가마쿠라를 지나가며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다. 차량이 내 곁을 지나갈 때, 조수석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이따금 차창을 내리고는 “간밧떼!”라고 외치거나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까처럼 우물쭈물하지 않고 그럴 때마다 나도 “아리가또고자이마스!”라고 멀어지는 차량을 향해 크게 소리치곤 했다.
어느새 13번 국도는 1번 국도가 되었다. 곧 하코네가 나를 반길 예정이었다. 군마처럼 하코네에서도 가파른 오르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딱히 군마 때는 오르막에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1,000미터도 넘었는데 800미터쯤이야, 하고 그저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코네 근처의 온천 마을을 거쳐 서서히 산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하코네의 오르막은 얼마나 힘들까? 오르막을 오르자마자 오늘 시즈오카까지 갈 생각을 접어버렸다. 경사도가 군마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걸 자전거가 오를 수 있다고? 차도 올라가기 힘들지 않을까? 경사다 심히 가파른 곳에서는 일치감치 내려서 포기하고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사서 벌컥벌컥 들이켜도, 쉬는 동안에 도저히 회복이 안 될 정도로 정신을 쏙 빼놓는 경사였다. 마을을 벗어나면서부터는 더더욱 난코스가 펼쳐졌다. 경사도는 기본 10도 이상. 허벅지는 터질 것만 같고 숨은 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가빠왔다. 뱀처럼 구불거리는 오르막길을 따라서 사실상 코스의 반 이상은 자전거를 탄 게 아니라 끌고 걸어서 올라갔다.
마치 자전거가 나를 부축하다시피 반 이상을 걸어서 1시간 반 만에 하코네 호수에 도착했다. 하코네 호수 위에 떠 있는 유명한 유람선이 보였다. 호수 주변에는 많은 서양인 관광객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고, 마을 군데군데에는 관광용 대형 버스들이 즐비했다. 온천 여행으로 도쿄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와야 할 곳을 자전거를 타고 왔다니….
먼저 하코네에서 점찍어 두었던 ‘평화의 토리이’를 보러 갔다. 호수 위에 빨간 토리이가 서 있는 유명한 명소였다. 자전거와 함께 꼭 그 토리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도착하자마자 이 소망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토리이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선 줄이 족히 30분 이상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길어 보였다.
하코네의 숙소들은 대체로 다 호텔이라 비싸기 때문에 가까운 도시로 가야만 했다. 시즈오카는 이미 포기했으니 남은 곳은 하코네 바로 옆에 위치한 누마즈라는 도시였다. 하코네에서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이동하기로 했다. 다음엔 꼭 온천 여행으로 편하고 여유 있게 하코네에 올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그렇게 하코네 호수를 뒤로 페달을 밟으며, 빨간 토리이는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더니 이내 호수와 함께 시야에서 자취를 감췄다. 하코네를 벗어나는 순간까지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지옥의 오르막이 펼쳐졌다. 아무래도 호수이기에 지형상 다시 오르막을 올랐다가 산을 내려가야만 했다. 이미 체력은 털릴 만큼 바닥까지 털렸는데, 뭐가 남았다고 또 털어대는 하코네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서쪽 방향인 누마즈로 향하던 내리막에는 해가 저물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눈앞에 펼쳐진 누마즈의 전경 너머로, 태평양의 수평선 아래로 저물어가고 있는 해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누마즈로 가는 길은 모두 내리막이라 전혀 힘들진 않았지만, 하코네를 오르며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추위에 벌벌 떨면서 달렸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깜깜해져서야 누마즈의 시내에 도착했다. 이렇게 늦게 누마즈에 도착했는데 시즈오카는 무슨 얼어 죽을 시즈오카. 항상 과신했던 나를 질책하며 라이딩을 마무리한다.
오늘도 넷카페에서 자기로 결정했다. 회원 등록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만 했던 첫 번째 방문 이후 두 번째로 가는 넷카페 이용은 식은 죽 먹기였다. 점원이 없어도 회원카드로 바로 체크인한 뒤, 체크아웃할 때 이용한 시간만큼 요금만 계산하면 되는 시스템이었다.
평소처럼 돈을 아끼기 위해 부스석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점포에 개인실 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비싼 개인실에서 머물게 되었다. 개인실은 부스석과 달리 사방이 벽으로 막혀있다. 그렇지만 비싼 만큼 부스석보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된다. 정말 좁은 호텔이라고 해야 할까. 정말 신기하게도 샤워실에서 수건도 무료로 제공해 주고 있었다(일본에서 호텔을 제외하고 목욕탕, 게스트하우스에서 수건을 무료로 주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못 봤다). 개인실이라면 넷카페에 머무르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을지도…? 어쨌든 무료 아이스크림 두 개를 퍼먹다가 오늘도 피로에 곯아떨어져서 잠에 들었다. 내일은 시즈오카를 지나서… 어디까지 가야 하지?
블로그에서도 더 많은 사진이 있는 여행기를 읽으실 수 있어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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