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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로우 Mar 28. 2024

내가 왜 이 개고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일본종주 20일차 : 요시다~하마마쓰

  어젯밤 TV에서 내가 어제 딱 지나왔던 후지산을 배경으로, 바이크를 타고 있는 여성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나도 저런 여행을 꿈꿨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정면만 보고서 라이딩을 하고 있을까? 홋카이도에서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하는 여유라고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절반 이상으로 접어든 것만 같은 여정에서, 여기서 점점 여정을 늦춘다는 것은 결국 나의 통장 잔고와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막상 여유롭게 가자,라고 생각해도 어디까지 달릴지가 좀처럼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리 목적지를 되도록 정해두어야 한다는 것인데, 여유롭게 달리려고 하면 목적지를 정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게다가 여정에는 좀처럼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도 존재했다. 하지만 목적지를 정하지 않다가는 저번의 니이가타~유자와 라이딩 꼴이 날지도 몰랐다(괜히 욕심을 부려서 3천 엔 숙소를 지나치고 달렸다가 캠핑장도 못 찾고 6천 엔 숙소에 현장예약으로 가게 되었다). 


TV에서 오늘 토요일을 포함해 내일 일요일까지 나고야에서 축제(마츠리)가 열린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160km 떨어진 나고야까지 가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그놈의 160km가 문제다. 라이딩 거리로 160km를 찍은 이후로는, 100km를 탔는데도 심히 자괴감이 밀려왔다. 페이스 조절이라는 것은 체력적인 부분 이외에도 심리적인 면에서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하면 뭐든 독이다.







결국 갈팡질팡하는 마음과 함께 목적지도 제대로 정하지 못한 채 호텔을 빠져나왔다. 꼭 라이딩이 내 인생 같았다. 벌써 30살이 넘었는데 아직도 대학을 졸업 못하고, 계획은 항상 틀어지고, 생각은 항상 바뀌고. 안정된 직장도, 미래에 뭘 할지도 아직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내 인생...


예보를 보고 이미 예상했지만, 밖에는 미친 듯이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어젯밤 저녁을 먹을 때부터 밖에 태풍이 왔나 싶을 정도로 호텔 밖에서 나무들이 신나게 헤드뱅잉을 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어제는 남서쪽으로 가는데 정확히 남서풍. 오늘은 8km 서풍. 내가 가는 방향도 정확히 서쪽이었다. 이쯤 되면 신이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한 것이 아닐까?



날씨는 따스하고 좋았지만 초장부터 바람을 뚫다시피 힘겹게 페달질을 이어갔다. 10Km도 가지 않았는데 벌써 지칠 것 같았다. 요시다 부근은 녹차로 유명한지, 끝없는 초록빛의 녹차밭이 이어졌다. 유명한 찻집이라도 찾아가 이 지역의 명물을 맛보고 가고 싶었지만, 바람 때문에 오늘 어디까지 라이딩이 가능할지가 가늠이 되질 않아서 내게 그런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나마 하마마쓰와 요시다 사이의 업힐을 오르던 와중에 뭔가 차가 여러 대가 주차되어 있는 한 디저트 가게에 들렀다. ‘육아사탕 아이스크림‘이라는 게 유명하다고 한다. 구글 리뷰를 보면 죄다 육아 사탕 이야기였다. "육아 사탕이 대체 뭐야?" 그러고 보면 일본은 항상 어딜 가든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가격도 한결같이 모두 400엔이다. 



아이스크림은 의외로 정말 맛있었다. 아주 깊은 달달함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홋카이도 노보리베츠에서 먹은 홋카이도 젖소 우유 아이스크림보다 훨씬 맛있었다. 육아사탕도 궁금해서 주문했더니 알고 보니 사실 그냥 물엿으로 만든 사탕이었다. 일본인 친구에게 육아 사탕에 대해서 물어보았는데, 자기도 몰라서 검색해 봤더니 '죽은 여자 유령이 자신의 아이에게 주려고 사러 왔었던 사탕'이라고 한다. 유래가 이렇게 오싹한 이야기일 줄이야.


하마마쓰와 요시다 사이의 업힐은 다행히도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하마마쓰 바로 옆 도시인 가케가와까지 쭉 기분 좋은 내리막이 이어졌지만, 문제는 내리막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맞바람이 계속해서 거세게 불고 있었다는 것이다. 과장을 보태서 내리막을 내려가고 있는데 오르막을 오르는 기분이었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치고 말았다. 극한의 상황에 맞닥뜨리면 사람의 본성이 나온다고 하는데, 내가 이 날 몇 번이나 혼잣말로 욕을 뱉었을까? 그나마 지친 내게 웃음을 주었던 것은, 곳곳에 주차되어 있는 자전거들이 하나같이 다 넘어져 길바닥에 나뒹굴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사람들에게 이 정도로 바람이 셌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라도 남겨둘 수 있었다.




지친 만큼 오늘만큼은 라이딩이 늦어지더라도 점심을 꼭 먹어야만 했다. 아니, 평소 허기를 잘 느끼지 못하는 체질인 나도 이 정도 맞바람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체력소모가 심해 금방 배가 고파졌다. 처음엔 사이제리야로 가려고 하다가 웨이팅이 있다고 해서 나왔다. 


가는 길에 <Sawayaka>라는 조금은 클래식한 느낌의, 간판이 보여서 들어가기로 했다. 간판을 본 후 구글맵을 켜서 검색해 보았는데, 알아보고 왔던 가게도 아닌데 리뷰가 1000개가 놀라서 꽤 놀랐다. 알고 보니 사와야카는 이곳 시즈오카현에만 존재하는 유명한 함박스테이크 프랜차이즈라고 한다. 


“40분 정도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라는 직원의 말에, 사이제리야에선 나왔지만 여기는 명물이니까 시간을 조금 투자하자, 하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자리에 착석했다. 어차피 바람 때문에 라이딩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밥을 먹고 나오면 조금이라도 바람이 잦아들었길 빌 수밖에. 신고 온 에어포스 신발은 온통 자전거 기름이 묻어서 더러워져 있었다. 어떤 사람은 더티 커스텀이라며 일부러 이렇게 만든다는데, 그러지 않아도 자전거를 타면 알아서 더티 커스텀이 되어 있었다. 



40분을 기다려서 자리에 앉았다. 이곳 역시 가족들이 함께 기념일에 올 것만 같은 가게 분위기에,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없어 보였다. 뭐, 이젠 너무나도 익숙했다. 나는


철판에 담긴 함박스테이크를 직원이 내와서는 내가 보는 앞에서 직접 스테이크를 잘라준다. 이때 기름이 엄청나게 튀는데, 독특하게 깔려 있던 종이를 세워서 튀는 기름을 막는다. 맛이 그렇게 특출 나다고는 말하진 못하겠지만(내 미각이 좋지 않은 것일 수도), 확실히 스테이크가 신선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맛이었다. 




맛있게 점심을 먹은 뒤,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내심 바랬지만 나오자 바람이 더 거세져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1m/s 더 빨라진 9m/s로 부는 서풍과 함께, 시간이 오후 2시인데 아직도 나고야는 120킬로 이상 남아 있었다.


오늘도 포기다. 나는 그냥 16킬로 떨어져 있던 하마마쓰에서 끝내자고 마음먹었다. 하마마쓰도 어제의 목적지였는데, 이틀에 걸쳐서 오늘 도착하게 되었구나…

 

그래도 일부러 아름다운 경치라도 보려고 바다 쪽을 향해서 달렸다. 하마마쓰의 태평양 풍경은 지금 사진으로 보면 아름답지만, 이때는 바람 때문에 아무런 마음의 여유를 찾지 못하고 그저 사진만 의무적으로 찍었던 것 같다. 



목적지를 앞당겼기에 하마마쓰에는 해가 지기도 전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어제 호텔에서 잤으니 오늘 또 호텔에서 자는 것은 내게 사치였다. 먼저 잘 넷카페 위치를 확인하고, 일찍 도착한 김에 체크인하기 전에 먼저 저녁을 먹으러 향했다. 하마마쓰에서 정말 유명하다는 교자 가게 <무츠기쿠>라는 곳이었다. 


교자 속에는 고기가 딱히 들어있지 않고 숙주와 양상추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삭한 양상추 맛은 마치 방금 반죽한 밀가루에 방금 야채를 넣어 구운 듯한 신선함이 느껴졌다. 항상 느끼지만 맛집을 가면 특출 나게 맛있다는 것은 잘 느끼기는 어렵지만, 기본적으로 재료들이 신선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교자가 유명하다 해서 왔는데, 함께 주문했던 호르몬야끼가 정말 별미였다. 라이딩 때문에 술을 시키진 않았지만 생맥주 한잔이 꿀떡꿀떡 넘어갈 것 같은, 그야말로 술안주였다. 


무츠기쿠 교자와 호르몬야키



무츠기쿠에 첫 손님 그룹으로 들어가 그중 가장 먼저 음식을 먹고 나왔다. 엄청나게 웨이팅이 늘어나 있어서, '일찍 오길 잘했구나...'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밥을 먹었는데도 아직 시간이 6시도 채 되지 않아서, 이대로 체크인을 했다가는 금액이 꽤 나올 것이 분명했기에 넷카페 앞에 있던 맥도날드로 먼저 향했다.


양심도 없이 120엔짜리 콜라 하나를 준비하고 밤 10시까지 죽치고 앉아서 태블릿에 글이나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가서 주문하고 앉았는데, 와이파이 목록에 맥도날드의 와이파이가 보이지 않았다… 점원에게 물어보니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다른 직원과 몇 마디를 나누다가 결국 “아, 죄송합니다. 손님. 와이파이가 안 되네요…”라는 도움이 되지 않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결국 뻐팅기다가 저녁 7시에 바로 넷카페에 체크인을 했다.



샤워를 하고, 지친 다리에 드러그스토어에서 사 온 파스를 붙였다. 언제까지 이런 여행을 해야 하는 걸까. 갑자기 현타가 몰려왔다. 좁은 넷카페에서 남들이 쓰던 담요를 깔은 채 궁상맞게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누군가가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이건 "와, 일본 종주라고? 대단해."라기보다는, "불쌍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만 같았다. 그냥 집에 가만히 있는 게 낫지 않았을까.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변한 건지, 아마 바람 때문에 정신까지도 너덜너덜해진 것 같다.


태블릿을 꺼내 블로그에 캠핑을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썼다. 지금 거의 20일째 달리고 있는데, 주렁주렁 캠핑 장비를 가지고 와서는 그것도 가장 춥다는 홋카이도에서만 캠핑을 두 번 하고, 이후 혼슈에 와서는 단 한 번도 캠핑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내 자괴감의 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마 차음엔 뭣도 몰라서 무식하게 용감하기라도 했던 걸까. 사실 캠핑장은 대부분 유료이고, 무료는 며칠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한다. 무료라면 샤워장이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100%이기 때문에 샤워할 곳도 주변에 찾아야 한다. 일본 종주에서 대부분 캠핑을 한다고 하면 사람이 없는 공원인데, 따지고 보면 사실 그것도 무법에 가까운 불법이라 굳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하고 싶진 않았다(물론 내가 첫날 코호네의 집에서 했던 캠핑도 그러한 케이스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자괴감은 지울 수가 없다. 이쯤 되면 캠핑 장비를 그냥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근처 드러그스토어에서 사 온 처음 마셔 본 에비스 맥주는 정말 맛있었다. 만화 <에반게리온>의 미사토가 마시던 바로 그 에비스 맥주 맛(나도 언젠가 냉장고 전체를 에비스 맥주로 꽉 채우고 싶다)이 이 맛이었구나. 맥주 한 캔의 기운과 함께, 이전까지 자괴감에 휩싸인 마음 속에서도, 하마마쓰까지 왔기에 이제 내일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나고야에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나고야에서는 하루를 쉴 생각이다. 관광 따윈 필요 없다. 도쿄에서처럼 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다. 


고작 70km밖에 달리지 못한 이 날






제 블로그에서도 더 많은 사진과 함께 종주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ywhfrv/22329220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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