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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로우 Apr 04. 2024

낭만은 보는 이들의 몫

일본종주 22일차 : 나고야~비와호


나고야에서 하루 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 때문에 에너지가 평소처럼 라이딩으로 소비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팔팔한 정신과 함께 늦게 자서 결국 아침 8시에 일어나고 말았다. 항상 마음만은 '새벽 5시 출발'인데 단 한 번도 종주 내내 지킨 적이 없었다...



나고야의 가을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나고야 성의 해자를 빙 둘러서 지나갔다. 사실 일본의 성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쉬는 동안 나고야 성에 가진 않았다. 오늘 지나가면서 멀리서 그저 바라보며 지나칠 뿐이었다. 


나고야 성 쪽을 지나던 도중 유치원생들이 횡단보도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지나치고 가는 내 뒤통수를 향해 “힘내요!”라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이 났다. “고마워요!”라고 대답했지만, 이미 횡단보도 끝으로 멀어져서 대답이 들렸을까? 아마도 선생님이 언질을 줘서 아이들의 목소리를 맞춘 것 같았다. 어쨌든 아이들에게 응원을 받아보긴 처음이라 쑥스럽기도 흐뭇하기도 했다. 



특히 나고야 시내는 다른 도시들보다 자전거 전용 도로와 차도가 펜스로 잘 구분이 되어 있어서 매우 좋았다. 생활 자전거를 이용하는 시민들을 위한 배려가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이 도시에서 물씬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문제는 일단 코인세탁소를 들러야만 했다. 사실 어제 호스텔에서 세탁을 하지 않았다. 세탁기 이용료가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넷카페도 300엔인데, 호스텔이 300엔이라고? 게다가 건조기는 8분에 100엔이라고 하니 기분이 상해서 '코인세탁소에서 하고 말지' 하고 호스텔을 체크아웃하고 나왔다.


그런데 바깥에 있는 코인세탁소들이 훨씬 비쌌다. 세탁 시간도 100엔 단위로 결제해야 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코인세탁소를 찾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탁과 건조 후에는 주인 분께 양해를 구해가며 보일러실 같은 곳에 들어가서 자전거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럴 바에 그냥 어제 호스텔에서 세탁을 할 걸...


세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지체되는 시간을 바라만 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내게 한 손님 아주머니 분께서 말을 거셨다. 바깥에 있는 자전거를 봤는데, 일본 종주 중이냐면서 이것저것 내게 물으시고는 응원의 한마디를 남기고 가셨다. 


돈을 아낀다고 딱 100엔만 건조기에 사용했는데, 얇은 자전거 옷들은 12분 건조만으로도 다 말랐지만 두꺼운 수건은 다 마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수건의 한쪽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자전거 가방 위에 수건의 구멍으로 케이블 타이로 넣어서 매달았다. 이러면 라이딩하는 동안 금세 바람으로 수건이 마르겠지?


수건의 결말



나고야 시내를 벗어나도 대체로 시가지라서 속도를 크게 내진 못했다. 아침에도 밥을 먹고 출발하지 않아서 사실 내내 먹은 것이라고는 어제 산 에너지 드링크와 곤약젤리 정도였다. 간간히 편의점에 들러서 과자나 에너지젤을 먹었다. 


가다가 갑자기 정차하고 있는 차 앞에 여성 한 분이 서 계셨는데 나를 손짓으로 멈춰 세웠다. 나는 처음에 '갑자기 뭐지...?'하고 무슨 용건이 있나 해서 자전거를 세웠다. 


그녀는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과자 하나를 건네며 "일본 종주 중이시죠? 이거라도 드시고 힘내세요. 파이팅."라고 내게 말했다. 빼빼로 비슷한 자색고구마 맛 과자였다. 여성 분에게 종주 응원과 함께 선물이라니... 게다가 라이트가 깜빡거리는 것을 보아 나를 보시고는 굳이 앞으로 가서 차를 세우고는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몸 둘 바를 몰라 머쓱한 표정과 함께 쑥스러운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 날 보았던 특이한 건물. 뭔가 랜드마크인 것 같았지만 검색해 보니 그냥 태양광 발전소였다.


나고야와 오늘의 목적지인 비와호 사이에는 세키가하라라는 산 위의 마을이 있었다. 오늘 아침에 호스텔의 주인인 듯한 분이 "세키가하라에는 큰 화물차들이 많이 지나다니니까 조심해야 해."라고 걱정 어린 귀띔을 해 주셨다. 이쯤 되자 화물차들과 목숨을 내놓고 라이딩하는 것은 익숙했다. 니이가타에서 도쿄로 갈 때 차의 통행량보단 적어서 그렇게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키가하라에서 떼를 지어 하교하고 있는 초등학생 사이를 지나가자, 뒤에서 "일본 종주?" "일본 종주다, 일본 종주!"라고 호들갑을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림을 받는 것 같아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몇 초 뒤에 "힘내요!"라고 우렁찬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고개를 돌리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 이러한 장면을 모두 고프로로 찍었어야 했는데. 이제 귀찮아서 고프로는 가방에 처박아 둔 채 자전거에 달아두지도 않았다. 이미 도쿄에서부터 고프로 촬영은, 내 유튜버를 향한 꿈은 포기해버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오후 4시 즈음 세키가하라를 넘어서 나가하마라는 비와호 근처의 마을에 도착했다. 해는 이미 지평선에 가까워지고 햇살은 노란 끼가 돌고 있었다. 나는 서둘렀다. 어제부터 상상했던, 꼭 해가 지는 비와호를 바라보면서 텐트를 치고 저녁을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라이딩을 끝마치고 캠핑을 하기 전에 우선 씻어야 했다. 캠핑할 장소에서 5km 떨어진 미리 알아봐 둔 ‘Biwako-yu’라는 목욕탕에 도착했다. 정말 다행히 “타투가 있어도 괜찮나요?”라는 나의 물음에 괜찮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너무 기뻤다. 사실 타투 때문에 일본의 목욕탕을 이용하는 것을 많이 걱정했는데, 대체로 이레즈미 같은 불량배 타투만 꺼려하는 듯했다.


목욕탕은 정말 좁았다. 과장을 보태서 내 예전 자취방 넓이와 비슷할 정도였다. 두세 명이 들어가면 꽉 찰 것 같은 온탕 하나와 열탕 하나. 심지어 냉탕은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손님들은 정말 40대조차 찾아볼 수 없고 거의 대부분 70대를 넘은 노인들뿐이었다. 나는 거의 탕에서 5분, 샤워를 5분 만에 마치고 해가 지기 전에 캠핑장에 가기 위해 후다닥 뛰쳐나왔다.  


일본에선 웬만한 곳에서 수건은 셀프다. 즉, 구비해두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드라이기도 없길래 ‘머리는 대체 어떻게 말리라고?’라고 생각했는데, 카운터에 물어보니 빌려주셨다. 오랜만에 체중계가 보여서 재었던 몸무게는 64kg. 종주 1달 동안 총 6kg가 빠졌다. 이번 종주 동안 되도록 체지방률이 많이 빠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20분 만에 목욕탕을 나왔는데도 하늘은 들어올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태양은 이미 보이지도 않고 불그스름한 석양이 지평선 부근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직 라이딩도 5km는 남았고, 가다가 먹을거리도 사야만 했다. 나는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캠핑 장소를 골랐었는데, 캠핑장 주변에 목욕탕도 있었고 대형 식료품 마트 역시 있었기 때문이다. 들러서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에 먹을 것들을 샀다. 장 보는 시간까지 5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하늘은 더 어두워져 있는 느낌이었다.









정확히 5시 37분에 내가 이용할 캠핑장에 도착했다. 홋카이도에서 캠핑을 할 때에도 느꼈지만 사실 무료 캠핑장은 캠핑장이라고 하기에는 공터에 가깝다.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는 공용 화장실이 하나 있는 것이 전부이다. 사실상 캠핑이 아니라 화장실 옆 노숙이랑 마찬가지다.


지는 태양은 커녕 노을이라고 하기에도 이미 너무 어두워져 버렸다. 정말 오랜만에 치는 텐트였다. 홋카이도 이후부터 단 한 번도 캠핑을 하지 않았으니... 다행히 혼자였다면 무서웠겠지만 다른 텐트도 하나 있었다. 호수 쪽에서도 인기척이 있었는데, 아마 낚시를 하던 사람이 어두워지자 슬슬 갈 채비를 하는 것 같았다. 



인스타그램에서 나올 법 한 석양을 배경으로 맥주와 영화를 보는 모습을 찍고 싶었지만, 아쉬운 대로 다른 분위기라도 내려고 태블릿에 모닥불 영상을 켰다. 마트에서 사 온 스시와 과일을 꺼내서 먹었다. 칠흑 속에서 반짝거리는 호수 건너 편의 마을 이외에 이미 비와호는 깜깜해서 보이지 않았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며 먹는 스시와 맥주는 너무나도 맛있었다.



사실 날씨가 꽤 쌀쌀해서 오들오들 떨면서 저녁을 먹었던 것 같다. 아는 지인이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캠핑 사진을 보더니 “죽인다 낭만”이라고 쪽지를 보냈다. “너무 힘들어요”라고 답장을 했더니, “역시 낭만은 보는 이들의 몫”이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정말 이보다 낭만을 잘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결국 고생은 나의 몫이지만, 낭만은 보는 이들의 몫이고 나중에 돌아와서 기억을 돌이킬 때 나의 몫일 것이다. 


옆 텐트에서도 일본 예능 영상을 보고 있는지 왁자지껄한 기기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다가 그 사람과 마주쳤는데 처음에는 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굉장히 나이가 꽤 있어 보이시는 분이셨다. 그 분과도 잠시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바이크로 여행을 오셨다고 하는데, 내년에 자전거로 호주 일주를 생각하고 계신다면서 이리저리 내게 양해를 구하고 내 자전거를 살펴보셨다. 이런 나이에도 바이크 투어를 하시면서 자전거 호주 일주까지 계획하고 계신다니... 나도 일본만 해도 힘들어 죽겠는데,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잠은 거의 선잠을 자듯 제대로 자기 힘들었다. 밤 10시부터 12시까지는 폭주족 소리 때문에 잠들기가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바이크 소리를 들을 일이 없었는데, 실제로 들으니 왜 폭주족, 폭주족이라고 하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이 정도면 바이크 소리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웽웽거리는 소리가 텐트 바깥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겨우 잠에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는 도저히 지금부터는 못 자겠다 싶었다. 머리맡의 휴대폰을 들며 제발 새벽 5시이길 빌었지만, 휴대폰 화면의 시간은 새벽 2시였다. 나와 옆 텐트 사람을 제외하고 여기에 올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바람 때문인지 자꾸 주변에 바스락 거리는 소리라던지 인기척 같은 것이 들려서 무서웠다. 마음속으로 '바람 소리겠지, 바람 소리겠지.'라고 계속 억지로 되뇌지만 '과연?'이라고 소리가 내게 되묻는 것처럼 계속 반복해서 들려왔다. 


너무 추워서 나가기 싫었지만, 지퍼를 열고 텐트 밖으로 나가면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귀를 막자,라고 생각하고 이어폰을 끼고 아까 보던 영화를 마저 보았다. 사실상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제 다시는 캠핑을 하고 싶지 않다. 아니, 노숙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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