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종주 21일 차 : 하마마쓰~나고야 (112Km)
자전거를 던져버리고 싶었던, 초속 9미터의 강풍을 견뎌낸 어제가 지나가고 아침이 밝았다. 사실 아침이라기엔 너무 이른 새벽 4시였다. 매번 넷카페에선 항상 잠자리가 불편해서인지 알람 소리 없이도 새벽에 눈을 뜬다. 부스 좌석이라 천장은 뻥 뚫려 있고, 옆 자리의 코 고는 소리, 매장에서 상시로 켜 둔 이상야릇한 음악소리까지 들려왔다.
어제 사 온 신라면 컵라면에 라면수프를 넣은 후, 물을 받으려고 넷카페를 돌아다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정수기가 보이지 않았다. 드링크바는 차가운 물만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무인 카운터라 점원이 부재중이었다. 물 찾아 삼만리로 돌아다니던 도중 손님들이 사용하고 간 담요를 정리하고 있던 점원을 발견했다.
“저 뜨거운 물 받는 곳은 없나요?”
점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에… 뜨거운 물이요…?”라고 내게 되물었다. 마치 10년 동안 주문되지 않은 중국집 메뉴 괴담처럼. 넷카페에 뜨거운 물 받는 곳이 없다고? 그는 조금 찾아보더니 “없는 것 같네요”라는 어이없는 대답을 전해왔다. 결국 컵라면을 먹는 것을 포기하고 생으로 버리고 나왔다. 이곳 일본에서는,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한국에서 통하던 사고방식을 버려야만 한다. ‘당연히 어딜 가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정수기는 있지 않을까’와 같은 사고 말이다.
정확히 하마마쓰에서 나고야는 북서쪽 방향이었고, 오늘 바람은 초속 4미터의 북서풍이었다. 3일째 내가 가는 방향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풍속은 어제와 비교하면 하늘에 감사하며 절을 해야 할 수준이었다. 나고야로 가려면 쭉 북서쪽으로 가야 했지만 바다를 보고 싶어 태평양 쪽으로 향했다. 유명하다는 벤텐지마 해변공원을 잠시 들러서 구경하고 갈 생각이었다.
이른 아침 해변에는 관광객보다는 낚시를 하는 사람만 몇몇 보일 뿐이었다. 알록달록한 주변 맨션들의 디자인도 그렇고 야자수가 쭉 열식 되어 있는 풍경은 마치 일본보다는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바다 건너 보이는 빨간 토리이는 구글에서 보았던 사진보다는 멀고 작아 보여서 아쉬웠다. 해변에는 웬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신대가 있었다. 알고 보니 <유루캠>이라는 애니메이션에 나온 장소라고 한다. 의도치 않았는데 보지 않은 애니메이션의 성지순례가 되어버렸다.
오전 10시 반쯤 토요하시라는 도시를 지나갔다. 점심을 먹을까 하고 검색해 보니 명물로 카레우동이 유명하다고 한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카레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우동이라니… 카레 혹은 우동이라면 먹어 볼 요량이었겠지만, 카레우동이라고 하니 썩 내키지 않아서 그냥 점심으로 편의점에서 오므라이스 도시락을 사 먹었다.
가끔 가다가 국도변에 보이는 휴게소에 들르기도 한다. 일본 휴게소에는 주로 그 지역의 과일이나 채소 같은 특산물을 위주로 팔고 있는데, 야채를 뜯어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자전거 여행 중인 내가 살만한 것은 딱히 없었다. 그나마 기념품 가게에서 국도 번호나 지역 관련 키링을 팔고 있다. 홋카이도에서부터 계속 사서 모아서 캐링백에 달아둘걸.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돈이 아깝다 생각해서 이내 관두고 말았다. 100엔짜리 당고나 사 먹고 휴게소에서 나왔다.
나고야 직전 도시인 오카자키를 지났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작은 강을 따라 자전거를 탔다. 강가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는 듯 많은 사람들과 야외 부스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강 표면으로 잔잔한 물결이 햇빛에 비치며 만들어내는 윤슬 아래로, 검은 잉어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좀 징그럽다 싶을 정도였지만.
하마마쓰에서부터 나고야까지는 총 110킬로였다. 160킬로에 비하면 항상 적은 거리 같아서 나 자신에게 실망하곤 했지만, 그만큼 정말 100킬로 라이딩이 내게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 돼버렸다는 느낌도 있었다. 100킬로 거리라면 이렇게 여유 부리며 이곳저곳을 보고 다녀도, 저녁 안에는 힘들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나 체력이 성장한 것이었다.
어느덧 여느 도시에 가까워질 때처럼 나고야 시내로 가까워질수록 큰 건물도 차량도 늘어나고 있었다. 저녁 5시쯤에는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차들이 정체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차보다 자전거가 빠르다. 옆에서 밀려있는 차들을 추월해서 가는 재미가 은근 쏠쏠했다.
정확히 저녁 5시 반에 나고야의 중심지인 오쓰 상점가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다시 느껴보는 대도시의 혼잡스러운 인파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인파 사이에서 쫄쫄이에 자전거를 끌고 가야 하는 쪽팔림은 덤이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 무사히 체크인을 마치고, 하루동안 흘렸던 땀을 씻어낸 뒤 침대에 몸을 던지듯 풀썩 드러누웠다. 너무 행복했다. 오랜만에 자유다. 내일은 쉴 수 있다….
저녁도 먹을 겸 슬리퍼를 끌고 나와서 상점가를 돌아다녔다. 저녁으로 먹은 것은 나고야의 명물이라는 미소카츠. 미소된장 소스를 얹은 돈카츠 덮밥의 맛은 정말 익숙한 맛이었다. 미소된장이 아니라… 짜장 맛에 굉장히 가까웠다. 짜장카츠라고 해도 믿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맛이었다.
간식거리를 사 오고는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로비에 앉아 있었다. 이런 작은 게스트하우스에도 50대 정도로 보이는 듯한 중년의 한국인 여행객들이 보였다. 한국인들은 로비에서 술판을 거나하게 벌이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는 젊은 프랑스 남자 3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두 그룹이 서로 말을 섞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인들은 술자리를 옮기려고 하는데, 중년 여성이 프랑스 남자와 이야기하는 것에 푹 빠져서는 “일단 먼저 가”라며 버티는 모양새였다. 한국인 남자들은 여자를 보채면서 끌고 나오려고 했다. 꼭 헌팅포차나 클럽에서 볼법한 광경을 나고야의 한 작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보고 있다니.
나고야 다음 코스는 비와호였다. 정말 종주하는 내내 매일매일 캠핑할 장소를 찾아보았지만 딱히 갈 만한 곳이 없었는데, 비와호 주변에는 무료 캠핑장들이 많았다. 드디어 다시 캠핑을 할 수 있다! 캠핑장 근처 마을의 목욕탕, 대형 마트까지 미리 알아보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라는 비와호를 바라보며 캠핑하면 얼마나 낭만적일까? 오늘도 설레는 마음으로 고생 전에 김칫국이라도 마셔 본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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